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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8 : 신라의 역사 57 (제37대 선덕왕) 본문
한국의 역사 158 : 신라의 역사 57 (제37대 선덕왕)
제37대 선덕왕
선덕왕(宣德王, ?~785년, 재위: 780년~785년)은 신라의 제37대 왕이다. 휘은 양상(良相)이다. 내물 마립간의 10대손이며, 미사흔의 9대손이다. 아버지는 해찬 효방(孝芳)이고, 할아버지는 김원훈(金元訓)이다. 또한 증조부는 신라의 풍월주로 이름을 날린 사다함이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이다. 선왕 혜공왕은 그의 외사촌형제가 된다.
생애
경덕왕 23년(764년) 아찬(阿飡)을 거쳐 혜공왕 10년(774년)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 1년(780년) 혜공왕과 일족이 김지정에게 피살되자 김경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살해하였다.
반면,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왕은 김양상, 김경신에게 살해되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김지정의 난은 당시 실권을 장악한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을 겨냥했다는 학계의 일부 해석이 있다.
경덕왕 때 관제 개혁이 있었는데, 혜공왕 때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등의 대신들의 주도로 관제 개혁을 모두 취소하였다.
혜공왕 이후 무열왕계는 끊어졌다. 성덕왕의 외손이며 사다함의 증손이라는 김양상이 신라 하대(下代)의 첫 왕이 되고, 즉위하자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김양상은 자신의 아버지 개성왕으로 추증하여 사당을 만들고,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도 만들었다. 후에 원성왕 김경신에 의하여 모두 허물어 졌다.
선덕왕도 후사 없는 가운데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내물왕 11대손 김경신과 무열왕의 8대손 김주원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가족 관계
- 조부 : 김원훈(金元訓)
- 아버지 : 김효방
- 어머니 : 사소부인(四炤夫人), 성덕왕의 딸
- 왕비 : 구족부인 김씨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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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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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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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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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대 선덕왕 실록
( ? ~ 785년, 재위기간 : 서기 780년 4월~ 785년 정월, 4년 9개월)
1.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선덕왕의 5년 치세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 손으로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는 개성대왕 효방이고,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 정의태후이다.
선덕왕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계승할 신분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이찬의 품계를 받고 성덕대왕 신종 제작을 감독하였고, 혜공왕 10년인 764년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상대등에 오르기 전에 이미 두 차례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혜공왕 4년에 일어난 대공의 난 때에는 33일간이나 궁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탓에 당시 조정은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었고, 정국은 그야말로 안개 속에 갇힌 듯하였다.
반란 사건은 양상이 상대등에 오른 뒤에도 계속되었다. 혜공왕 11년 6월에 국정을 맡고 있던 시중 김은거가 번역죄로 처형되었고, 또 8월에는 새로운 시중 정문이 반역으로 처형되었다. 김은거와 정문은 김양상파와 정치적 대결에서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 조정을 김양상파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양상은 혜공왕 재위 13년에 상소를 올려 시국을 극렬하게 비판했다. 이는 혜공왕이 양상의 편에 서 있지 않았음을 뜻한다. 당시 혜공왕은 갓 스물 살이 되어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혜공왕은 김양상과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양상은 혜공왕의 정국 운영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왕당파들을 몰아쳤을 것이다.
그러자 혜공왕과 양상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급기야 왕당파의 영수인 이찬 지정이 780년 2월에 친위혁명을 일으켜 대궐을 장악해 버렸다. 이에 양상은 군벌인 이찬 경신(원성왕)과 결탁하여 역혁명을 일으켰다.
양쪽 군대는 약 두 달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결과는 양상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양상은 혜공왕과 왕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던 이찬 경신을 상대등으로 삼고, 이찬 의공을 시중으로 삼아 조정을 꾸렸다. 그리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781년 7월에 몸소 패강 남쪽까지 가서 주와 군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음해 2월에는 한산주를 순행하였고, 그곳 주민들을 패강진으로 옮겨 북방의 영토를 안정시켰다. 7월에는 사림벌에서 대규모로 군대를 사열하여 군대의 기강을 다잡았다.
그러나 이때 선덕왕은 노쇠한 몸이었다. 그래서 그는 784년 4월에 왕위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상대등 경신을 비롯하여 신하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선덕왕은 병상에 누워 말년을 보냈고, 정사는 상대등 경신이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785년 정월, 선덕왕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임종을 앞두게 되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과인은 본래 재능이 없고, 덕이 모자라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추대를 받아서 피할 수 없어 왕위에 올랐다. 욍위에 오른 이래 해마다 하는 일이 순조롭지 못했고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졌으니, 이는 모두 과인의 덕성이 백성들의 소망에 부합하지 못하여 정치가 하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은 까닭이다. 과인은 항상 왕위에서 물러나 궁궐 밖에서 살고자 하였으나, 많은 신하가 매번 지성으로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까지 주저하여 왔다. 이제 갑자기 병이 들어 다시 회복이 어렵게 되었으니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과인이 죽은 후에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하여 동해에 유골을 뿌리도록 하라."
선덕왕은 이 해 정월 13일에 죽었다.
선덕왕은 한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자식은 없었다. 부인은 구족왕후로 각간 양품의 딸이다. 혹은 의공의 딸이라고도 한다. 그녀는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시집와서 선덕왕이 왕이 된 뒤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선덕왕이 죽고 경신(원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785년 3월에 외궁으로 보내졌다. 이때 그녀는 벼 3만 4천 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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