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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6 : 신라의 역사 55 (제35대 경덕왕) 본문
한국의 역사 156 : 신라의 역사 55 (제35대 경덕왕)
제35대 경덕왕
경덕왕(景德王, ?~765년, 재위: 742년~765년)은 신라의 제35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휘는 헌영(憲英). 효성왕의 동복 동생이며, 아버지는 제 33대 왕 성덕왕. 어머니는 이찬 순원(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왕비는 서불감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부인(満月夫人, 경수왕후(景垂王后)). 효성왕에게 아들 없었기 때문에 742년 5월에 효성왕의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
생애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으로 효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덕왕 때는 신라가 극성기에 달한 때로 제반 제도·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는 한편, 전국의 행정체제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개혁하며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경덕왕은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하였으며, 굴불사(堀佛寺)를 비롯하여 영흥(永興)·원연(元延)·불국(佛國) 등의 절을 세웠다. 그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의 소리는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인 동시에 국보(99호)이며, 후에는 봉덕사 종으로 불렀다. 경덕왕은 당과도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 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경덕왕 10년(751년)에는 불국사가 완공되었으며, 757년 3월에는 녹읍이 다시 지급되었다.
가계
- 아버지 : 성덕왕
- 어머니 : 소덕왕후 김씨
- 왕후 : 삼모부인
- 왕후 : 만월부인 김씨(滿月夫人 金氏) - 서불한(舒弗邯) 의충(義忠)의 딸
- 후궁 : ? - 이찬 순정의 딸
참고
제35대 경덕왕 실록
(?~ 서기 765년, 재위기간 : 서기 742년 5월~ 765년 6월, 23년 1개월)
1. 전제정치를 꿈꾸던 경덕왕과 제도 개혁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 아들이며, 소덕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헌영이다. 효성왕의 동복 아우인 그는 파진찬 벼슬에 있다가 효성왕 재위 3년인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죽자 욍위에 올랐다.
경덕왕은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관제를 정비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고, 748년에는 정찰 한 명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도록 했다. 이는 성덕왕 대부터 지속되던 전제왕권 체제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747년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었고, 749년에는 천문박사 한 명과 누각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이는 성덕왕 대에 산박사와 의박사를 둔 것에 대한 연계 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를테면 전문 식견을 갖춘 학자 관료들을 육성하여 성덕왕 이래 추진하던 유교정치 구현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덕왕은 근본적으로 유교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었고, 중국의 한, 당의 정치를 그 모델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는 당나라 태종이 그랬듯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경덕왕의 개혁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756년에 귀족 세력의 대표격인 상대등 김사인은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경덕왕의 정책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당시 사회에선 천재지변이 모두 왕의 부덕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빋고 있었다. 그런데 경덕왕 즉위 이후에 천재나 천문의 이상 징후가 많았다. 재위 2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첯 왕비인 삼모부인을 내쫓은 직후였다. 재위 3년 겨울에는 중천에 닷말들이 그릇 크기만 한 엄청난 별이 열흘 동안 떠 있다가 사라지는 이해 못 할 일도 벌어졌다. 재위 4년에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졌고, 이어 가뭄이 계속되었다. 재위 6년에도 심한 가뭄이 들었고,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흉년에 전염병 마저 돌았다. 재위 7년에는 큰 별똥별이 떨어졌고, 재위 8년에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뿌리채 뽑히기도 하였다. 재위 13년에는 엄청난 우박이 쏟아졌고 가뭄과 메뚜기 떼가 창궐했다.
이러한 천재지변으로 김사인은 왕의 정치력을 강도 높게 비판하자, 경덕왕도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757년 정월에 김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경덕왕은 이찬 신충을 상대등으로 삼고 다시금 제도 개혁에 나섰다.
우선 그해 3월에 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다시 녹봉제를 실시했다. 그리고 8월에 조부에 사를 두 명 두어 세수 업무를 한층 강화했다. 12월에는 전국 주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그 휘하의 현과 군을 대폭 정비하였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10현을 예속시켰으며, 상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예속시켰다.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두었다.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수악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예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6현을 두었다.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수경 10군 31현을,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4군 44현을 예속시켰다.
전국 9주의 이름을 모두 바꾸거나 간소화하였고, 소속된 소경과 군현을 명시했다. 이로써 통일 이래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행정 구역을 확실하게 규정했다.
758년 2월에는 모든 관원들에 대해서 60일 이상 휴가를 얻는 자에게는 해직으로 간주하라는 교지르 내리고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4월에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을 관료로 임명하는 등 조치를 내리고 율령박사 두 명을 임명하여 유교에 입각한 법치주의를 강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759년에는 757년의 지방 행정 조직 정비에 이어 중앙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함으로써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관직과 관명까지 중국의 것을 따랐던 만큼 당나라와 친분을 강화하려는 경덕왕의 노력은 남달랐다. 신년이 닥칠 때마다 조공 사절을 보낸 것은 물론, 당 현종이 촉 지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그곳 행재소까지 사신을 보내 조공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 현종은 감탄하여 5언 10운 시를 써서 경덕왕에게 보낼 정도였다.
당과의 관계는 이처럼 돈독하였지만 왜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성덕왕 대에 일본이 침공한 것에 대해 분노가 풀리지 않은 탓에 일본측의 관계 개선 사신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753년에 일본에서 다시 사신을 파견했지만 그들의 행동이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하여 이번에도 거절하여 돌려 보냈다. 그래서 그 후로 일본과는 거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다.
이렇듯 경덕왕은 정치 외교 면에서 매우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그 덕분에 왕권이 강화되고 정치가 안정되자, 조금씩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시작했다. 재위 19년에는 대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월정교와 춘양교를 짓는 등 공사를 벌이고,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신종을 만들고 풍악을 즐기는 등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순이라는 인물이 경덕왕이 총애하는 인물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왕은 백방으로 그를 수소문 하였으나 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산속에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주색에 빠진 경덕왕을 찿아와 간언하였다.
"제가 듣건대,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황음을 그칠 줄을 몰라 정사가 문란해지고 국가가 망하였습니다. 앞서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 수레는 마땅히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허물을 고치고 자신을 새롭게 바꿔 국가의 수명을 영구히 하소서."
당시 중국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전국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순은 당을 앞서가는 수레에 비유하며 경덕왕에게 충고한 것이었다.
다행히 경덕왕은 남의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호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반성하며 당장 풍악을 물리치고 이순에게 강의를 청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과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자. 경덕왕은 며칠 동안이나 그 강의를 경청했다. 그 덕분에 경덕왕은 말년까지 별 탈없이 조정을 유지했다.
경덕왕은 재위 24년망인 765년 6월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처음에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마련되었으나, 후에 성덕왕의 능이 있는 양곡장으로 옮겨졌다.
2. 경덕왕의 가족들
경덕왕은 생식기의 길이가 8차(24센티)나 될 정도로 정력이 왕성한 인물이었으나 자식 복은 별로였다. 부인을 셋이나 얻었으나 자식은 한 명밖에 두지 못했다.
첯 왕비는 삼모부인이었는데, 자식을 얻지 못해 왕궁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사량부인으로 불리었다.
둘째 왕비는 경수(또는 경목)왕후인데, 각간 의충의 딸이다. 그녀는 처음엔 만월부인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재위 2년인 743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하다가, 15년 후인 758년에 임신을 하여 왕자 건운(혜공왕)을 낳았다. 건운이 여덟 살이 되던 765년에 경덕왕이 사망하자, 그녀는 어린 혜공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셋째 왕비는 이찬 순정의 딸인데, 그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경수왕후가 초기에 아기를 얻지 못하자 그녀에게 아기를 얻고자 하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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