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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7 : 신라의 역사 56 (제36대 혜공왕) 본문
한국의 역사 157 : 신라의 역사 56 (제36대 혜공왕)
제36대 혜공왕
혜공왕 (惠恭王, 758년~780년, 재위: 765년~780년)은 신라의 제36대 국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휘는 건운(乾運)으로, 경덕왕의 아들이다.
생애
탄생 설화고려 후기의 명승(名僧) 일연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35대 임금인 경덕왕에게는 딸이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경덕왕은 후계자가 없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경덕왕은 표훈이라고 하는 승려랑 벗하며 지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고승(高僧)이며, 하느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 경덕왕은 표훈에게 "나를 계승할 아들을 낳고 싶은데,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였더니, 표훈이 "하늘님에게 왕이 아들을 갖게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이 "경덕왕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면 나라를 멸망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차라리 딸을 낳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경덕왕이 나라를 멸망시켜도 좋으니 사내 아이만을 바란다고 간청하여 결국 하느님이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얼마 후 경덕왕의 부인 만월부인이 혜공왕을 낳았고, 이것을 기뻐한 경덕왕이 혜공왕에게 "건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치세
혜공왕 때 신라에는 많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768년 일길찬 대공과 아찬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다가 진압되었고, 770년에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꾀하자 살해했고 775년 김은거와 이찬 염상과 정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경덕왕 때 관제 개혁이 있었는데, 혜공왕 때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등의 대신들의 주도로 관제 개혁을 모두 취소하였다.
삼국사기에는 780년에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 혜공왕이 난의 과정에서 살해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시해한 인물이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야사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이 김양상, 김경신의 의하여 피살되었다고 한다.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武烈王係)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혜공왕의 치세의 종말과 더불어 중대(中代) 신라는 끝나며, 신라를 왕위(王位) 투쟁과 호족의 난립으로 엉망이 되는, 끝없는 혼돈으로 몰아넣게 되는 하대(下代) 신라가 시작된다.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김양상이 무열왕계을 왕으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즉위하여 선덕왕이 되었다. 김양산은 사다함의 증손으로 내물왕의 10세손이라고 한다.
가계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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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아달라 이사금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태종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제36대 혜공왕 실록
(서기 758 ~ 780년, 재위기간 : 서기 765년 6월~ 780년 4월, 14년 10개월)
1. 반란에 시달리는 혜공왕과 안개 속의 신라 정국
혜공왕은 경덕왕의 장남이며, 경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건운이다. 758년에 태어났으며, 세 살 때인 760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765년에 경덕왕이 죽자 여덟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이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후 경수태후의 섭정을 받으며 제왕 수업을 해야 했다. 섭정 기간에 그는 매일같이 태학에 나가 박사들에게서 강의를 듣고, 경서와 시문, 역사를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혜공왕 즉위 이후 여러 불길한 사건이 터졌다. 즉위 이듬해인 766년에는 해가 두 개나 나타나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해가 두 개나 나타났다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다. 아마 흐린 날에 해와 달이 동시에 하늘에 나타난 것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어쨌던 이런 자연의 현상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불길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경수태후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고 민심을 달랬다. 또한 왕으로 하여금 신궁에 직접 제사를 올려 혜공왕의 왕위 승계를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불길한 사건이 이어졌다. 2월에 양리공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위로 향했다. 이는 혜공왕 대에 다섯 번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여 그 중 한 사건으로 혜공왕이 바뀔 것이라는 점을 예언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불미스런 소문이 도는 가운데 강주에서는 땅이 내려앉아 너비가 5여 척이나 되는 연못이 생기고, 그 물빛이 검푸르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거기다 767년 6월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경수태후는 그런 와중에서도 당나라에 이찬 김은거를 파견하여 혜공왕을 책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달에 하늘에서 별이 세 개나 대권로 떨어져 서로 부딪히는 일이 일어났다. 그 빛이 마치 불같이 솟아 흩어졌는데, 이것이 몹시 불길한 일이었다.
여러가지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자 신라 사회는 매우 뒤숭숭해졌고, 그런 상황에서 768년에 당나라에서 대종이 보낸 책봉사가 도착하여 혜공왕에게 신임표와 책봉서를 안겼다.
그러나 마치 그 일을 반대라도 하듯이 서라벌에 벼락이 치고, 우박이 쏟아져 혜공왕을 불안하게 하였다. 또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져 왕의 죽음을 예고했고, 그와 함께 지진도 일어났다. 우물이나 샘물도 모두 말라 버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호랑이가 궁궐로 들어와 사람들이 기급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그런 모든 일들은 반역의 빌미가 되기에 좋았고, 기어코 불길한 예언들은 현실로 드러났다. 768년 7월에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인 이찬 대렵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무려 33일간이나 반란군이 왕궁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싸움이 장기화되고 지방 군대가 토벌대를 형성하여 반란군을 공격하는 바람에 대공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반란이 종식된 뒤에도 불길한 일들은 계속 이어졌다. 769년 5월에 메뚜기 떼가 대거 창궐하고, 가믐이 심하게 이어져 흉년이 닥쳤다. 11월에는 치악현에서 쥐 8천여 마리가 한꺼번에 평양쪽으로 이동하는 기현상도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아예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 가믐에 시달려야 했다. 770년 3월에는 흙비가 쏟아졌고, 5월에는 북쪽에서 혜성이 나타나 한 달간이나 머무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또 보름 뒤에는 호랑이가 집사성으로 들어와 군대가 동원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호기를 놓칠세라 그해 8월에 대아찬 김융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사형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775년 6월에 이찬 김은거가 세 번째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그러자 8월에는 이찬 염상이 시중 정문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혜공왕은 이렇듯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반란을 겪으면서 어느듯 성년으로 성장하였고, 모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혜공왕은 정사엔 관심이 없었고, 지나치게 색을 탐하여 늘 음악과 여색에 빠져 있었다.
그런 탓에 법 질서가 문란해져 조정은 한치 앞으로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천재지변이 계속 이어져 민심이 이반되고 사직이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또한 조정은 상대등 양상파와 이찬 지정파로 나뉘어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그 와중에 혜공왕은 지정 편을 들었다. 그런데 이찬 지정은 780년 2월에 다섯 번째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군대를 모아 대궐을 포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혜공왕을 죽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는 친위 혁명의 성격이 짙었을 것이다.
그러나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경신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지정을 공격하였다. 양쪽 군대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결국 김양상의 승리로 세력 다툼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혜공왕과 왕비는 김양상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때 혜공왕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혜공왕에게는 왕후가 둘 있었는데, 첯째 신보왕후는 이찬 유성의 딸이고, 둘째 창장부인은 이찬 금장의 딸이다. 이들이 언제 궁에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혜공왕이 살해될 때, 이들도 함께 살해되었다.
혜공왕의 자식들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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