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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5 : 신라의 역사 54 (제34대 효성왕)

두바퀴인생 2011. 2. 13. 02:51

 

 

 

한국의 역사 155 : 신라의 역사 54 (제34대 효성왕)

 

 

제34대 효성왕

효성왕(孝成王, ? ~ 742년, 재위: 737년 ~ 742년)은 신라의 제34대 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고 경덕왕의 형이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계비(繼妃)인 소덕왕후(炤德王后)이고, 비는 739년 맞이한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혜명(惠明)이다.

 

생애

738년 2월, 선대의 성덕왕을 조문한 당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당나라는<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新羅王)>에 책봉 되었다. 당나라와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여, 738년 4월에는 「도덕경」을 하사 받았다.

 

739년 정월에 이찬 의충(義忠)이 죽자 이찬 신충(信忠)으로 중시를 삼았다. 2월에 동모제(同母弟) 헌영(後 경덕왕)을 파진찬으로 삼고, 3월엔 김순원의 딸 혜명을 왕비로 들였다. 5월에 헌영을 태자로 삼았다.

 

740년 8월, 후궁(後宮)의 아버지인 파진찬 영종(永宗)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영종을 죽였다. 효성왕이 후궁을 총애하자, 왕비 족당이 이를 시기하여 후궁을 모살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영종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재위 6년 742년 5월에 사망하여, 시호는 효성왕으로 추봉하였다.

 

가계

  • 아버지 : 성덕왕
  • 어머니 : 소덕왕후(炤德王后) 김씨
  • 왕후 : 왕후 박씨 - 739년 출궁을 당함.
  • 왕후 :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 - 김순원의 딸.
  • 후궁 : ? - 파진찬 영종의 딸.

 

참조

 

 

 

제34대 효성왕 실록

(?~ 서기 742년, 재위기간 : 서기 737년 2월~ 742년 5월, 5년 3개월)

 

1. 왕권회복을 꿈꾸는 효성왕과 영종의 친위혁명

효성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소덕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성덕왕 23년인 72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737년 2월에 성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효성왕의 치세는 5년 남짓한 짧은 기간인 탓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의 연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재위 4년에 일어난 영종의 반역이었다. 효성왕은 파진찬 영종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는데, 왕은 그녀를 몹시 총애하여 당시 왕비였던 이찬 순원의 딸 혜명의 질투를 유발했다. 질투를 심하게 하던 혜명은 영종의 딸인 후궁을 죽이려 했고, 이 때문에 순원파와 영종파가 크게 대립했다. 그런가운데 영종파가 점점 수세에 몰리자,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바로 반란이었다.

 

영종의 반란은 근본적으로 순원파와 그의 친척들을 제거하기 위한 친위혁명의 성격이 짙었다. 영종의 딸을 총애하던 효성왕의 마음은 영종파에 기울어 있었지만, 순원파의 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효성왕도 어쩔 수가 없는 처지였다. 이에 효성왕은 은밀히 영종파와 손을 잡고 순원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오히려 영종파가 대거 척결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순원은 효성왕의 장인이자, 외조부였다. 효성왕의 어머니 소덕왕후는 순원의 딸이었고, 효성의 왕비 혜명도 순원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덕왕후와 혜명은 이복 자매였을 것이다.

 

이쨌던 효성왕은 이모와 결혼한 셈이었는데, 이렇듯 2대에 걸쳐서 순원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는 것은 순원이 당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기 전에 효성왕에겐 박씨 성을 가진 왕비가 있었다. 그녀는 738년 당나라에서 정식으로 신라 왕비로 인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효성왕이 순원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박씨를 출궁시키고 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성덕왕이 성정왕후를 출궁시키고 순원의 딸 소덕왕후를 맞아들인 경우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성덕왕이 첯째 왕비인 성정왕후를 출궁시키고 순원의 딸 소덕왕후를 맞아들인 것도 순원의 막강한 정치 권력에 굴복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 미안함 마음 때문에 성덕왕은 출궁당하는 성정왕후에게 많은 땅과 재물 및 노비를 붙여 줬을 것이다.

 

효성왕이 영종의 딸을 총애하고, 영종파를 지원한 것도 순원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엿였을 것이다. 효성왕이 영종을 지원하자, 자연히 영종파와 순원파 간에 대립이 생겼다. 효성왕은 암묵적으로 영종파의 혁명을 방관하며, 순원파가 제거되길 바랐다.

 

하지만 영종의 친위 혁명은 실패하였고, 이는 곧 효성왕의 입지를 크게 좁히는 결과로 나타났다. 효성왕의 힘은 영종의 난 이전보다 훨씬 축소되었고, 왕권은 모두 순원일파가 장악해 버렸다. 그는 완전히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채 2년도 되지 않은 742년 5월에 그는 죽었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는데, 이는 그가 자살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효성왕 대에 주목할 만한 문화적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 수입된 일이다. 738년 2월에 당나라 현종은 성덕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좌찬선 대부 형도를 홍려소경 자격으로 신라에 파견하여 조문토록 했다. 이때 형도가 <도덕경>을 가져와 효성왕에게 바쳤다.

 

형도라는 인물은 학문이 뛰어나고 바둑의 수도 꽤 높았던 모양이다. 당시 신라 백성들 중에 바둑을 잘 둔다는 사람들이 형도와 대국하였는데, 아무도 형도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효성왕의 묘호는 '효를 이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버지 성덕왕처럼 그도 첯 왕비를 출궁시키고, 순원의 딸을 맞아들인 사실에 의거하여 순원파에 의해 올려진 듯하다. 따지고 보면 '효성'이란는 묘호는 효성왕에겐 매우 굴욕적인 이름이다. 효성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동해에 뿌려진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2. 효성왕의 가족들

효성왕은 부인이 셋 있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다. 첯째 부인은 박씨인데, 이름과 가문은 기록되지 않았다. 둘째 부인은 순원의 딸 김씨로 혜명왕후이며, 셋째 부인은 영종의 딸이다.

 

비록 순원의 압력에 의해 박씨를 내쫓고 혜명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나, 효성은 혜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효성은 파진찬 영종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여 그녀를 총애하였다. 이에 혜명은 영종의 딸을 죽이려고 하였고, 영종은 효성왕과 결탁하여 친위혁명을 일으켜 순원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영종과 그 무리들이 모두 죽고 딸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