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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3 : 신라의 역사 52 (제32대 효소왕)

두바퀴인생 2011. 2. 11. 04:44

 

 

 

한국의 역사 153 : 신라의 역사 52 (제32대 효소왕)

 

 

 

효소왕(孝昭王, 687년 ~ 702년, 재위: 692년 ~ 702년)은 신라의 제32대 이다.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 신문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황후이다. 691년에 태자가 되었고, 692년 7월에 선왕 신문왕이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

 

생애

692년(재위 원년), 당의 측천무후로부터,<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에 책봉됐으며 휘를 피하기 위해 좌-우이방부(理方府, 입법을 관할)를 좌-우의방부(議方府)로 개칭했다.

 

694년(재위 3년)에 문무왕의 동생인 대각간 김인문(金仁門)이 당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695년(재위 4년)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해 각각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관할케 했다.

 

698년(재위 7년) 3월에는 일본으로부터 온 사자를 숭례전에서 접견했다.

 

699년(재위 8년) 2월에 당에 조공했다.

 

700년(재위 9년) 5월,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을 진압했으며, 중시 김순원(金順元)이 이에 연루돼 파직당했다.

 

재위 11년 702년 7월에 사망해, 시호는 효소왕으로 정하고, 망덕사(경주시 배반동)의 동쪽에 매장됐다.

 

그 왕릉은 현재의 경주시 조양동의 사적 184호에 비정 되고 있다.

 

효소왕이 죽자, 당의 측천무후가 죽은 효소왕을 위해 정무를 2일간 맡지 않았다고 한다.

 

 

 

제32대 효소왕 실록

(?~ 서기 702년, 재위기간 : 서기 692년 7월~ 702년 7월, 10년)

 

1. 어린 효소왕의 즉위와 공신들의 권력 독점

효소왕은 신문왕의 장남이며, 신목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홍 또는 이공이다. 신문왕 11년(691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인 692년 7월에 신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의 태자 책봉 시기가 691년인 것을 고려할 때, 효소왕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신문왕 대에 통일의 후유증은 거의 해소되었고, 정국 불안 요소들이 대부분 제거되었기 때문에 효소왕 시대의 정치와 사회는 안정된 편이었다. 하지만 왕이 어린 탓에 정사는 신문왕 대의 공신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즉위년 8월에 대아찬 원선을 중시로 임명하였는데, 원선은 흠돌의 난을 진압한 공신이었다. 신문왕 대의 공신이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로 임묭되었다는 것은 효소왕 대의 정치가 공신들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시는 진덕왕 대인 651년에 처음 설치되어 무열왕과 문무왕을 거치면서 입지가 강화되었고, 신문왕 대엔 정치 권력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효소왕 대에 이르면 상대등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고, 중시가 조정을 장악하는 형국이 되었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는 이후로 경덕왕 대에 시중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신라 후반기에 이르면 왕권을 제약하거나 때론 능가하는 존재로 변신하게 된다.

 

원선을 이어 당원이 중시가 되고, 당원이 연로하자 대아찬 숙원이 중시가 된다. 이들은 모두 신문왕 대의 공신들로 왕족들이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신문왕 대의 공신들에겐 그들을 대적할 정적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므로 정권은 안정된 편이었다. 그러나 공신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는지경에 이르자, 효소왕은 왕권을 되찿기 위해 공신들과 한바탕 대결을 벌이게 된다.

 

재위 9년 5월에 이찬 경영이 모반을 꾀하다가 처형되었는데, 이 사건을 이용하여 효소왕은 공신 세력을 권력의 핵심에서 밀어내게 된다. 우선 중시로 있던 순원을 모반과 연계하여 쫓아내고, 이듬해인 영암군 태수로 있던 일길찬 제일을 사익을 탐한 죄를 물어 장형에 처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효소왕이 마음 먹고 치른 일전은 오히려 공신 세력을 단결시키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것은 효소왕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효소왕은 경영의 모반 사건이 발생한 지 2년 만인 702년 7월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 초반에 불과하였다. 그가 혈기왕성한 나이에 아무런 이유없이 죽었다는 것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효소왕 치세 중 주요 사건은 아래와 같다.

 

효소왕 4년 11월(자월)을 정월로 삼았다가 9년에 다시 1월(인월)을 정월로 삼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것은 당시에도 해가 가장 짧은 동지를 한 해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으려 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해 10월에는 서시와 남시를 설치했고, 이로써 신라 도성 서라벌에는 도상 안의 내시, 동쪽의 동시, 그리고 서시와 남시를 합쳐 큰 시장이 넷이나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7년 3월 기사에서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이즈음에는 신라에서도 왜의 공식 국호를 일본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는 문무왕 10년 670년에 자국의 공식 명칭을 '일본'으로 개칭했다고 통보해 왔는데, 신라에서도 그점을 인정하여 그들을 왜라 부르지 않고 일본으로 불렀던 것이다.

 

8년 7월 기사에는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 만에 회복되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에도 가끔 바다에서 적조 현상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또 9월에는 '신촌 사람 미흘이 무게 백 푼 되는 황금 한 개를 주워서 바쳤으므로, 그에게 남변 제일의 위품과 벼 1백 석을 내렸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 당시에도 금이 매우 소중한 보석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과 당시 금 값이 대략 1푼에 벼 1석 정도였음을 알려 준다. 하지만 1푼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는 알 수 없다.

 

효소왕은 망덕사 동쪽에 묻혔으며, 자식은 한 명도 두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부인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는 실제 효소왕에게 부인과 자식이 없었던게 아니라, 그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될 때, 부인과 자식 또한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