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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1 : 신라의 역사 50 (신라의 대당 전쟁 5) 본문
한국의 역사 151 : 신라의 역사 50 (신라의 대당 전쟁 5)
신라의 나당전쟁 5
-기벌포해전과 못 다 이룬 역사
서기 670년 압록강 너머 개돈양에서 시작된 나당전쟁은 671년 4월 석성 전투를 거쳐 675년 천성성 전투와 매초성 전투를 기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라는 가장 치열하였던 675년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한반도 중부전선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제 최후의 676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676년이 되자 당의 도림성 공격으로 인하여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는등, 전황은 신라에게 다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다만 당나라 역시 돌궐족이나 거란족의 확장을 막아야했으므로, 한반도 공략에 전력을 투입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당나라로서는 최대한 빠른시일내에 한반도 서부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인 대공세가 절실하였다.
그리고 그 목표지점이 현재 충남 장항 금강입구 일대로 알려져 있는 기벌포였다. 그렇다면 당나라는 왜 기벌포를 목표지점으로 삼았는가? 우선 기벌포는 660년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당시 13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던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주변 해류의 흐름은 물론 지형지물등에 매우 익숙한 지역이었다. 또 흑지상지를 비롯하여 671년 석성전투에서 당나라측에 참여한 백제출신장군 2명등, 옛 백제 땅에는 여전히 반신라세력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을 회유하고 포섭한다면 옛 백제 땅에 당나라 기지를 건설하고 장기전 체제로 이끌어 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안동도호(安東都護) 설인귀(薛仁貴)가 기벌포 해안에 나타난 것은 변화무쌍하며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음력 11월이었다. 660년 원정 당시는 날씨가 온화한 음 5월에서 6월 사이였다. 그렇다면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병선들은 공격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숫적으로 매우 열세에 있었던 신라에게 역공을 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신라는 즉시 사찬(沙飡) 시득(施得)이으로 하여금 신라 병선을 이끌고 기벌포 앞바다로 나가게 하였다.
당시 신라 병선의 규모는 정확치 않다. 다만 660년 나당연합 당시,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 등을 전달해주기 위해 동원되었던 병선이 1백 척인 점을 고려해 본다면, 기벌포 해전 당시 동원되었던 병선은 적어도 2~3배 규모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 수군은 10만여 명을 일시에 상륙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해전에 능숙하였다. 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수군의 규모 역시 전해지지 않지만 숫적으로 신라 수군을 충분히 앞도하였을 것이다.
사찬 시득은 결국 월등한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득이 해전에서 거둔 전술상의 이익은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당나라는 예상보다 많은 전력상의 손실을 입었을 것이며, 이것은 육지에 상륙하고서도 정상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해전에서 지칠대로 지친체 힘겹게 상륙한 당나라군에 대해, 신라는 맹렬한 공격을 퍼붇기 시작하였다. 무려 22회에 걸친 치열한 격전, 신라는 이 전투에서 4,00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재차 말하자면 수급을 베는 행위는, 전투가 끝난 후 농공행상등을 위해 확인할 수 있는 적의 시신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 진다.
하지만 기벌포 해전은 해전과 육지전이 병행하여 이루어 졌는데, 해전의 경우 발생하는 익사자에 대해서는 수급을 베거나 그 숫자를 파악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벌포 전투의 경우 실제 전사자는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당나라는 기습적인 전략으로 옛 백제 땅을 점령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체 두번 다시는 한반도 땅을 복속할 계획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676년 한 겨울철에 벌어진 기벌 포대첩을 끝으로 신라와 당나라가 벌였던 6년간의 치열한 전쟁도 막을 내렸다. 기벌포 전투는 앞서도 지적하였듯, 기록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당시의 전투규모가 훨씬 컸을 것으로 예측되고, 또 나당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승전이라는 점에서 대첩으로 평가된다.
문무왕은 옛 백제땅을 지킨것뿐 아니라,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신라 영토를 확정하고, 중국의 한반도 진출을 저지하였다는 점에서 신라 역사상 최고의 제왕으로 평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뿐만 한반도 주둔 당의 주력군을 격파함으로 인해, 평양지역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를 더이상 유지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안동도호부는 요양지역으로 옮겨갔으며,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다시 우리민족의 주측이 된 남북국 시대가 열렸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대왕왕이라고 부름)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져 있음
문무왕은 나당전쟁이 끝난지 5년 후인 서기 681년 재위 21년만에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였으며, 동해에 묻으면 용으로 환생해서라도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문무왕의 위업은 거기에서 끝났다. 개인적으로 문무왕을 높게 평가하지만 위대한 제왕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단지 당나라와 치열한 전투끝에 한반도를 지켜냈으면서도, 다시 친당정책으로 전환한 것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실리와 경제를 생각하는 측면에서 충분히 고려되야할 정책이다. 문무왕도 언제까지 영토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백성들을 끝없이 전쟁에 내몰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점을 고려 한다 하여도 안동 도호부가 철수한 평양땅에 대해,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너무도 아쉽다. 신라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 확보한 것은 분명 최선을 다한 결과이긴 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제왕이 되기 위해서는 최선의 결과를 넘어서는 위업이 필요하다.
또 삼한통일이라는 대업의 의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평양수복계획은 반드시 필요했다. 실리적인 측면을 고려 한다 해도 발해나 말갈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대동강이나 청천강보다는 압록강을 경계로 삼는 것이 효율적이다.
적어도 삼국의 도읍이라도 병합해야, 삼한통일의 대의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문무왕의 역사는 미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북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발해의 성립으로 힘들었다면, 그 후대 왕이라도 설성왕 7년이후 점차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던 대마도에 대한 원정계획이라도 세웠어야 마땅하다. 그일은 문무왕이 유조로 남겼던 왜구의 해적 행위 근절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는 돌이킬 수 없고, 역사는 또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라는 비록 최선을 다한 최상의 결과를 이루어 냈지만, 우리가 꿈꾸는 그리고 우리가 이루고 싶었던 그이상의 결과를 개척하여 나가지 못하였기에,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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