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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7 : 신라의 역사 46 (신라의 대당 전쟁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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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7 : 신라의 역사 46 (신라의 대당 전쟁 1)

두바퀴인생 2011. 2. 5. 03:52

 

 

한국의 역사 147 : 신라의 역사 46 (신라의 대당 전쟁 1)

 

 

신라의 대당전쟁 1
-  불타는 북쪽 전선과 호로하의 혈전
  
 문무대왕 재위 11년이 되던 671년 유월의 여름, 당나라의 군사원조를 받아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던 신라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죽지장군이 이끈 신라군이 가림성(加林城:지금의 충남 부여인근)석성(石城:가림성 주변성)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 1만명과 격전을 펼친끝에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때 당군은 전사자만 5300명으로,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거둔 최초의 일대 쾌거임에는 분명하였지만, 문제는 아직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기에는 역부족하였다는 것에 있었다. 더구나 사로잡힌 적장중에는 백제출신 장군이 2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백제부흥세력중 일부가 지난날의 원한을 갚기위해 일본은 물론 중국과의 연합도 마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총관 설인귀(薛仁貴)는 문무대왕에게, 백제원정 당시에는 군사원조요청을 하였다가 지금에와서 배신했다는 내용의 강력한 항의를 하자, 백제의 잔적과 합류하여 신라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격하였다는 명분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옛 백제땅을 신라땅으로 선포하는 상징적인 조치로 사비성(지금의 부여扶餘)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가 이렇게 강경자세로 나오자, 당나라 역시 한반도 주둔 병력을 대폭증강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9월 당은 장군 고간을 평양에 파견하는 한편 말갈병 4만명을 증원하여 평양에 참호와 성루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원책으로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실은 대규모 선단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신라 역시 그해 10월 서해를 건너오던 당의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100여명을 사로잡고 당군을 괴멸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10월 해전의 승리에 고무된 문무대왕은, 옛 백제땅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에 대해서도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2월 고성성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다음해 2월에 벌어진 가림성 전투에서는 패배하는 등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가림성은 죽지장군에 의해 탈환된 성이었지만, 이후 죽지장군은 문책성에 가까운 인사조치로 각종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아마 죽지장군이 물러난 이후 당군에 의해 재점령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옛 백제땅에서의 전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고간(또는 고보)은 정예 1만명을 거느리고 이근행이 이끈 3만명과 합류하여 7월달 평양에 8진영을 만들어 주둔하였다.  백제 땅에서의 전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4만명이나 되는 당군의 평양 증파는 신라에게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8월에 이르러 한시성마읍성이 이따라 격파당하자, 신라 단독의 힘으로는 당군의 남진을 막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무대왕편 12년 8월 백수성(白水城)전투의 기록을 보면,  신라 군사가 고구려 군사와 함께 마주 싸워 당군 수천 명을 참살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한곳에 몰려 있는 당군을 향해 신라와 옛 고구려 부흥군 군사들이 합동작전을 펼쳐 양면 공격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백수성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분명 큰 승리였지만, 여전히 숫적으로는 당군이 우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은 승리를 너무 성급하게 당의 진영 깊은 곳까지 추격하여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석문(石門)에서 당군의 역습을 받은 신라군은 대아찬 효천(曉川)등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하였으며,  옛 고구려 군사와 모처럼 구성한 연합전선 마저도 상당히 약화되고 말았다.

 이렇게 북쪽 전선이 위태롭게 되자,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는 한편 시간을 벌기위애 굴욕적인 외교도 감수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문무대왕은 당나라에 사죄표문을 올리며 금 120푼 은 3만 3500푼(10푼=3.75kg) 구리 3만 3천 푼등 총 6톤에 달하는 광물을 비롯 엄청난 양의 조공품을 받쳐야만 했다. 또 별다른 자연재해가 없었음에도 그해 곡식이 귀하여 기근이 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공품목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신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식량착출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무대왕은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벌은 시간을, 철저하게 당나라와 펼칠 대격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사용하였다. 우선 재위 13년 모반을 일으켜 당나라로 붙으려던 대토(大吐)일당을 처단하는 등 친당파 세력들을 강력하게 제거하였다. 그리고 국원성을 시작으로하여, 국내의 주요 성곽들에 대해 대대적인 증측과 보수 공사를 단행하는등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아울러 서해상에 병선 100척을 증파하여 당군의 해상 지원을 막는 한편, 북변에 대한 병력도 증강시켰켜 안동도호부에 대한 견제도 강화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도 말갈족과 거란족을 앞세운 대규모 병력을 북쪽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제 문무대왕으로서는 굴욕을 참으면서 1년에 걸쳐 준비한 성과가 전쟁이라는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호로하(瓠瀘)의 혈전, 당군의 남하를 막다.

 문무대왕 13(673년)년에 단지 신라의 북변이라고 나왔을 뿐, 언제 어디서 벌어졌는지 정확치 않다. 그러나 전투는 매우 격렬하여 무려 9차에 걸친 대격전이 벌어졌다. 전쟁의 상황은 초반에는 매우 불리하여 호로강(=호로하瓠瀘)인근 지역까지 내려 온 것으로 보인다. 호로강에 대해서는 현재 임진강의 지류로 보는 견해가 다수의 의견이다. 

 기록으로보면 《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나와 있다. 특히 호로강 위에 있는 호루고루 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축성수법이 모두 확인되고 있고, 신라계는 물론 고구려 계의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어 대동지지의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호로고로 성은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한창이던 662년, 김유신 장군이 평양까지 당나라의 군량 수송을 갔다가 고구려군에 쫓기던 중, 이곳에서 어렵사리 반격에 성공하여 참패를 모면한 곳이기도 하다. 즉 신라군에게는 매우 익숙한 지역이었다.

 임진강이 서쪽으로 꺽어지면서 형성된 28m의 현무함 지대위에 설치된 이 천연 요새에서, 당군을 막지 못한다면 전선은 한강까지 순식간에 밀릴 것이다. 그리고 한강이 열리게 되면 중국과의 뱃길이 연결되어 신라로서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아마도 9차에 걸친 대 혈전중 대부분은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신라군은 복잡하게 얽힌 임진강의 지류와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기록에는 수급을 벤 자만해도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호로하에 빠져 익사한 당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였으니, 단순한 육지전만 아니라 살수대첩과 같은 수공작전도 펼쳐 졌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라의 대승이었다. 또한 굴욕을 참으면서 군사를 배양하고 때를 기다렸던  신라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신라는 삼국통일과정에서 외세에 의존하였다는 점과 영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곤한다. 그러나 신라는 한치의 땅이라도 내어주지 않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으며,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격결한 전쟁을 치뤄 낸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역사를  더이상 대륙영토를 잃었다는 부정적 관점에서가 아닌, 중국과 당당하게 맞서싸워 이 땅과 민족 그리고 우리역사를 지켜냈다는 긍정적 관점에서 서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