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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5 : 신라의 역사 44 (제30대 문무왕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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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5 : 신라의 역사 44 (제30대 문무왕 1)

두바퀴인생 2011. 2. 3. 05:19

 

 

 

 

한국의 역사 145 : 신라의 역사 44 (제30대 문무왕 1)

 

제30대 문무왕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은 신라 군인이자, 제30대 (재위: 661년 ~ 681년)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서현의 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휘는 법민(法敏)이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려는 당나라군을 격퇴하여 676년 삼국을 최초로 통일한 군주이다.

 

왕비는 파진찬(波珍飡) 김선품(金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김부식이 그의 저서 〈삼국사기〉에 묘사된 왕의 외모는 영특하게 생겼다 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사후 무속의 신으로도 숭배되었으며, 기존에는 삼국통일을 달성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대왕'으로 불렀으나,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문점에 제기되면서 대왕이라는 존칭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생애

생애 초기

문무왕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치열하게 영토 분쟁을 벌이던 때에 태종 무열왕(김춘추)과 김서현의 딸이자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650년진덕여왕 때 왕명으로 아버지 김춘추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 활동을 벌여 당 고종에게 대부경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뒤 진덕여왕 재위기간 중 법민은 당나라에 있었다.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655년파진찬에 임명되고 파진찬으로 병부령(兵部令)에 겸임된 뒤왕태자에 봉해졌다.

 

삼국통일 달성

백제 공략

문무왕은 660년(무열왕 7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명장 김유신과 함께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661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을 때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승하하자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661년(문무왕 1년)36세로 즉위한 뒤 백제의 잔적을 소탕하고 제복을 당식(唐式)으로 고쳤으며, 당악(唐樂)을 배우게 했다.

 

663년 백제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 등이 의자왕의 왕자로 일본에 체류중이던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삼아 부흥군을 일으킨 근거지인 주류성(周留城)을 당군과 같이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 지수신(遲受信) 등이 끝까지 저항하던 임존성(任存城)으로 진격하여 공략, 임존성을 함락시켜 백제부흥군의 활동을 차단하고 백제부흥군을 완전히 궤멸시켜 한반도 남부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663년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만들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여 신라의 독립성을 부정하려 하였다.

 

665년에는 문무왕에게 당의 지원을 받아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된 부여융(夫餘隆)과 취리산(鷲利山)에서 화맹을 맺도록 강요당하였다.

 

고구려 공략

백제를 멸망시킨 문무왕은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663년 평양 공격에 나선 소정방의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해 주었고,

 

재위 6년째인 666년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667년에는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직접 신라 장군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 장새(獐塞)까지 갔지만 당나라군이 후퇴하면서 함께 철군하였다.

 

668년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68년 당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고, 6월에 문무왕도 직접 한성주(漢城州, 경기도 광주시 주변)까지 올라와 한성주에 상주하고 머무르면서 평양성으로 신라 군사를 보내 평양성 공략을 도왔고, 마침내 보장왕의 항복을 받는데 동참하였다.

 

한반도 통일

672년 이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를 향해서도 침략을 개시했다.

 

673년 문무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기존 신라 영역에 성곽을 축성하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방어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백제 멸망 후에 폐지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켰다.

 

한편 신라인으로서 당나라와 내통한 자를 과감하게 처벌하여 한성주총관(漢城州摠管) 수세(藪世), 한성도독(都督) 박도유(朴都儒), 아찬 대토(大吐) 등을 처형하였다. 이어 비상체제하에서 왕권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674년(문무왕 14년) 신력(新曆)을 쓰고, 이듬해 동인(銅印)을 제작하여 백관(百官)과 주군(州郡)이 사용하게 하였다. 그해 당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에 봉해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는 한편,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했다.

 

당이 백제·고구려의 옛 땅에 도호부를 두어 통치하려 하자, 676년 나당 전쟁을 벌여 한반도를 침략한 당나라를 몰아내고 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사후

681년 7월에 56세로 서거하였다. 죽은 후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였고,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장사하였다. 전설에는 자신의 사후 동해 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평가 및 논란

신라의 삼국통일을 높이 평가하는 측에서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했다는 점을 높이 사는 반면, 당나라를 끌어들인 일과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를 포기했다 하여 외세의존적,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가계

  • 아버지 : 태종 무열왕
  • 어머니 : 문명왕후, 김서현의 딸, 김유신의 누이동생
  • 부인 :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 자의왕후 김씨는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둘째아들 구륜공의 아들 선품공의 장녀(長女)이다. 진골정통계이다.
  • 외숙부 : 김유신

 

기타

진골의 두번째 왕이었던 그는 모계를 통해 신라왕실의 혈통이었다. 어머니인 문명왕후의 친정어머니이자 문무왕의 외조모 만명부인은 종실 숙흘종의 딸로, 숙흘종진흥왕의 동생이자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이며, 문무왕에게는 종고조부가 된다. 비인 자의왕후는 그의 7촌 고모인데 진흥왕-진지왕-문흥왕(추존)-무열왕-문무왕으로 이어졌으며, 자의왕후는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둘째아들 구륜의 아들 김선품의 장녀(長女)이다. 문무왕과 자의왕후는 7촌 고모-조카간이 된다. 따라서 그는 부계, 모계 모두 왕족인 성골이었다.

 

문무왕릉과 감은사

문무왕은 자신의 사후 화장하여 동해에 뿌리면 자신이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켜주겠다고 유언하였다. 문무왕 사후 시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하였는데, 어느 날 왜구가 신라를 침입하려다가 번번히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거나 파도를 만나 난파되었다. 신문왕은 이것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의 혼이 격퇴한 것이라 확신, 대왕릉 근처에 감은사라는 절을 건립하고 문무왕의 넋을 위로하였다 한다.

 

 

 

 

제30대 문무왕 실록

(?~ 서기 681년, 재위기간: 서기 661년 6월~681년 7월, 20년 1개월)

 

1. 지략가 문무왕과 신라의 삼한 통일 

문무왕은 무열왕의 장남이며, 문명부인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범민이다. 태종무열왕 원년인 654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에 임묭되었다가 곧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태자 시절에 통일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660년의 백제 정벌 전쟁에선 무열왕을 대신하여 신라군을 직접 지휘하는 과감한 면모를 보였다. 661년 7월에 무열왕이 죽자, 신라 제30대 왕에 올랐다.

 

그가 즉위할 무렵, 당의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려 하엿다.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과 유돈이 들어와서 당나라 공격에 호응하라는 당 고종의 당부를 전하엿고, 문무왕은 상중임에도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출전하엿다.

 

백제부흥군은 옹산성에 웅거하면서 신라군을 막아섰으나, 오히려 신라군에게 포위당해 궤멸당했다. 그 후 당 고종의 칙지를 받은 문무왕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쌀 4천 석과 벼 2천 석을 수레 2천여 대에 싣고 가 평양을 공격하고 있던 소정방을 지원하게 하엿다. 하지만 군량을 받은 소정방은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군대를 이끌고 달아났고, 그 틈을 이용한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추격하였으나 김유신은 역공을 가해 고구려군 1만을 궤멸시키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사건 이후 고구려는 함부로 신라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북신과 도침이 이끄는 백제부흥군이 부여풍을 왕으로 세우고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웅진성 탈환을 꾀하고 있었다. 웅진성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백제부흥군에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었다. 이에 신라군이 당군과 연합하여 웅진성으로 진주하였고, 뒤를 맞은 백제부흥군은 후퇴하여 임존성(홍성)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펼쳤다.

 

그 무렵, 백제부흥군 내부에서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신의 권력 독점은 부여풍과 마찰을 낳았고, 급기야 부여풍에 의해 복신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부흥군을 장악한 풍왕은 왜군과 연합하여 나당연합군을 공격하였으나, 백강에서 크게 패하는 바람에 무너졌다. 그 뒤 부흥군은 잔존 세력이 사비성에 웅거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궤멸되었다.

 

백제부흥군을 완전히 제압하자, 당은 다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665년 방효태를 앞세워 공격을 시도하다가 당군이 대패하여 전멸했다.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12월에 이적을 앞세워 재차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장남 남생이 동생들에게 쫒겨 당군에 항복하였고, 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열두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크게 흔들렸고 667년 신성과 그 주변 16개 성이 남생을 앞세운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에는 보장왕이 머물고 있던 하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도 무너졌다. 그 뒤, 왕자 안승이 장수 검모잠과 함께 고구려 부흥군을 이끌며 재건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익산)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는 당군과 백제 세력이 손을 잡을 경우 고구려 유민과 힘을 합쳐 대항하라는 뜻이었다.

 

고구려가 무너지자 당은 고구려와 백제 땅은 물론이고 신라 땅까지 모두 장악하려 하였다. 신라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양국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당은 신라 사신을 억류하는 등 추태를 보이자 곳곳에서 당군과 신라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옛 백제 땅은 당의 웅진도독부가 지배하였는데, 혹 백제 유민과 당군이 결탁할 것을 염려하여 문무왕은 옹진 도독 부여 융에게 화친을 청하였다. 하지만 융은 힘이 없었고, 도독부 소속 장수인 사마칭이 군대를 보내 신라 진영을 염탐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670년 7월 품일 등을 시켜 백제 지역을 공격하여 63개 성을 차지하고, 그곳 백성들을 신라 땅으로 이주하도록 조치했다. 또 천존, 죽지 등의 장수도 일곱 성을 장악하고 도독부 병력 2천여 명을 죽였다. 군관과 문영도 열두 성을 빼앗고 적병 7천을 죽였다.

 

당과의 전투는 이듬해에도 계속 이어졌다. 6월에 장군 죽지가 석상에서 당군과 싸워 5천 3백여 명을 궤멸시키자, 당나라 행군 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신라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에 문무왕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과거 고구려를 얻으면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겠다고 한 약속을 언급하면서 조목조목 설인귀의 글을 반박하고, 신라군의 행동이 정당함을 역설했다.

 

이렇듯 신라가 한치도 양보하지 않자, 양국은 다시 전쟁으로 치달았다. 전쟁은 그로부터 4년 동안 지속되었다. 671년 당나라 장수 고간 등이 번병 4만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는 등 방어책을 강구하고 공격을 해왔다. 하지만 신라군이 당나라 수송선 79여 척을 공격하여 궤멸시키자 당군은 군량이 떨어지게 되었고, 672년 8월에는 평양 근처에서 고구려 유민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당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당군이 달아나자 추격하다가 석문에서 당군의 역습에 패배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급기야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직을 삭탈하고, 당나라에 가 있던 왕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 왕에 임명하여 유인궤의 군대와 함께 파견하였다. 유인궤는 군대를 동원하여 칠중성을 격파하고, 신라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이 없자, 칠중성을 이근행에게 맡기고 돌아가 버렸다.

 

그 기회를 노려 문무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면서 사과하자, 당 고종이 그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김인문을 다시 소환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해 왔다. 장군 문훈이 설인귀를 맞아 적병 1천 4백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는 승리를 거두자 결국 설인귀는 포위를 풀고 퇴각하였는데, 그 뒤를 친 신라군은 군마 1천 필을 노획하였다.

 

설인귀 퇴각 이후, 유인궤의 후임으로 칠중성에 머무르고 있던 이근행이 병력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라군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이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백제의 옛 영토와 고구려의 남쪽 영토가 신라에 귀속되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 옛 땅에 주와 군을 설치하여 기강을 바로잡는 한편, 당에는 계속해서 토산물을 보내며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런가운데 설인귀의 공격은 여전히 이어졌다.  676년 설인귀는 도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현령 거시지를 죽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설인귀는 신라 장수 시득의 수군과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20여 차례 공격으로 승리하였고 적병 4천을 베었다.

 

이렇게 되자, 당나라는 686년 고구려 옛 땅을 지배하던 안동도호부를 대동강변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땅을 장악하게 되었고 마침내 삼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정복한 새 영토를 정비하고, 곳곳에 관리를 파견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한편, 678년에는 북원(원주)에 북원소경, 6890년에는 옛 가야 도성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여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5소경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렇듯 통일과 영토 확장에 주력하던 문무왕은 681년 7월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능은 월성군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해중릉으로 마련되었다. 그의 능이 바다에 조성된 것은 그의 뜻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용이 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흔히 신라 통일을 삼국 통일이라고 말하지만, 신라가 장악한 땅은 백제의 한반도 영토와 고구려의 일부 지역에 불과하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라는 애초부터 삼국 통일을 외친 것이 아니라 삼한의 통일을 외쳤고, 대개 삼한의 영토가 대동강 이남 지역에 한정된 것을 감안할 때, 그 목표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은 삼국 통일이 아닌 삼한 통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것은 우리 민족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켰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의미가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신라의 통일이 한민족의 활동 무대와 영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킨 원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신라의 삼한 통일을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했다는 것이나 통일로 인해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이 좁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개념이 형성된 고려 이후의 사관에 해당된다.

 

신라에겐 고구려나 백제, 왜, 당이 모두 외세였다. 국력이 약했던 신라의 입장에선 그들 중 어느 나라와도 연합을 꾀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신라의 입장에선 삼한 통일도 힘겹고 벅찬 일이었으며, 그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선택한 것일 것이다. 한반도 동쪽의 작은 나라 신라가 북방의 대국 고구려와 숙적 백제, 그리고 대륙의 당, 남방의 강적 왜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 남아 한반도의 일부나마 통일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는 것이다.

 

 

문무왕의 가족들

문무왕의 정비는 자의 왕후이며 신광부인,야명부인 등 후비가 있었다. 자의 왕후는 소명, 정명(신문왕) 등으리 아들을 낳았고, 야명부인은 아들 인명을 낳았다. 이들 중 자의, 신광, 야명, 인명 등에 대해서 기술한다

 

자의 왕후(?~681년)

자의는 파진찬 선품의 딸이며 보룡 소생으로 진골정통 계통이디. 보룡은 선품이 죽은 뒤 무열왕을 섬겨 당원낭자를 낳았다. 덕분에 자의는 무열왕의 총애를 받아 범민에게 시집갔다.

 

자의는 인물이 뛰어났는데, 김유신의 외조카 흠돌이 그녀를 탐내어 첩으로 삼고자 하였다. 당시 자의의 아버지 선품이 죽고 없었기에 흠돌이 자의의 집안을 얕보고 보룡을 찿아가 딸을 자기 첩으로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보룡은 이를 거절했다. 그 때문에 흠돌은 보룡에 대하여 험담을 늘어놓고 다녔다. 보룡이 무열왕의 아들 당원을 낳자, 노골적으로 그녀의 행실을 비난했다.

 

그런 가운데 자의는 법민에게 시집갔고, 법민이 태자에 오르자 태자비에 책봉되었다. 그러자 흠돌은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여 이모인 문명왕후를 찿아가 자의를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흠돌은 자의가 진골정통 계열이므로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 경우, 진골정통이 중용되어 가야파의 힘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고 하였다. 문명왕후는 흠돌의 말을 옳게 여겨 태자의 후비로 있던 유신의 딸 신광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법민이 받아들이지 않아 신광은 태자비에 오르지 못하였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의는 왕후가 되었다. 하지만 흠돌에게 복수하지 못햇다. 흠돌은 이모인 문명왕후를 극진히 모신 데다, 흠돌의 부인 진광은 유신의 딸이고, 신광의 언니였기에 자의도 흠돌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문명태후의 입김으로 흠돌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야 햇다.

 

흠돌의 딸이 태자비가 되면서 자의 왕후와 흠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흠돌은 딸을 내세워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였으며 그것은 자의왕후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681년 문무왕이 죽음을 앞두자, 흠돌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심지어 그는 태자 정명을 내쫓고 인명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자의왕후는 그런 흠돌을 견제하기 위해 북원경에 있던 오기(김대문의 아버지)를 불러들였고, 그 와중에 문무왕이 죽었다. 문무왕이 죽자, 흠돌은 인명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자의왕후와 세력다툼을 벌였다. 그러다 그녀는 병을 얻어 한 달도 못 돼 죽고 말았다.

 

신광부인

신광은 김유신의 딸이며, 법민이 태자에 오르기 전에 시집갔다. 하지만 법민에게 정처 자의가 있었던 까닭에 후첩이 되어야 했다.

 

한때 흠돌의 계략을 옳게 여긴 문명왕후의 영향력에 힘입어 그녀가 태자비에 오를 뻔했으나, 법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다.

 

야명부인

야명은 누구의 딸인지 기록되지 않았다. 태자 법민의 첩이 되어 왕자 인명을 낳았는데, 흠돌이 인명의 폐신이 되길 자청하여 받아들였다. 후에 흠돌은 인명을 내세워 반란을 획책한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인명

인명은 문무왕의 아들이며, 후첩 야명부인 소생이다. 흠돌이 그의 폐신이 되어 섬겼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흠돌은 그를 왕으로 내세워 반란을 획책하다가 실패하여 반란의 괴수로 지목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