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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2 : 신라의 역사 41 (제 27대 선덕여왕)
제 27대 선덕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음력 1월 8일, 재위: 632년~647년) 또는 선덕왕(善德王)은 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국사에서의 최초의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큰이모이다.
생애
《삼국사기》에서는 그녀가 진평왕의 장녀로 기록되어 있고, 일연의 《삼국유사》와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그녀를 차녀로 기록하고 있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는 그녀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그녀가 즉위하기 1년 전인 631년,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켜[2] 위기에 몰렸으나 이 난은 곧 진압되었다. 이때 상황은 ‘흰 개가 궁궐 담장에 올라갔다’고 표현되어 있다.
즉위 초
즉위년인 632년에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다.
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렸으며, 여러 주 · 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이듬해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완성하였다.
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보내어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였다. 당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였다.
즉위년 12월에 사신을 보낸 이래, 여러 차례 사신이 오갔으며,
재위 3년인 635년에는 당나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재위 초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633년 신궁에 제사를 드린 바로 다음 달 서라벌에 지진이 나고, 그 해 8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분황사를 완성한 634년 3월에는 알밤만한 우박이 내렸다.
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그 해 3월에는 여왕이 병이 들었는데, 이를 낫게 하기 위해 황룡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들어갔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
재위 5년인 636년부터는 백제와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그 해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637년에는 이찬 사진(思眞)을 서불한에 봉하고,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638년에는 이상한 일들이 이어졌다. 3월에는 서북부 변경 칠중성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움직였으며, 9월에는 누런 꽃이 비처럼 내렸다. 다음 달 고구려가 칠중성에 쳐들어 오자 알천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고 불안한 민심을 달랬다.
639년에는 북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하슬라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7월에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동해가 붉게 되고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
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으며,
642년 정월에는 당나라에 토산품을 바쳐 양국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선덕여왕 재위 내내 당나라와의 조공 관계가 성립되었다.
같은 해 7월 백제 의자왕의 대군이 쳐들어와 서쪽 40여 개 성을 빼앗겼다. 또한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을 공격하려 하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한편 백제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이찬 김품석(品釋) 등 많은 장수들이 죽었다. 왕은 패배를 만회하고자 자신의 조카이자 김품석의 장인인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은 신라를 구원해주기는 커녕 김춘추를 감금하였다. 이를 안 여왕이 김유신을 보내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당 태종이 “그대들은 여인을 임금으로 삼고 있으니 백제, 고구려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고 있다. 이에 내 왕족을 보내 신라왕으로 삼으려 한다.”고 대답하여 사신은 빈 손으로 귀국하였다.
644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신라는 일전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 우리의 영토를 500리나 빼앗았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여왕은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비담의 난과 죽음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란 와중인 정월 8일에 여왕은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고, 일전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에 장사지냈다.
평가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에서도 특히 흠모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론은 이와 사뭇 다르다. 그는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라며 왕의 치세를 혹평하였다. 이덕일은 이를 유교적 가치를 갖고 있던 김부식의 차별적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삼국유사 선덕여왕조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깨달은 일 세가지(지기삼사(知幾三事))가 수록되어 있다.
당 태종의 모란꽃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양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여근곡의 백제군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가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승하와 도리천
어느날 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기타 일화
-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 삼국유사 신주 편에 따르면, 하루는 여왕이 병이 깊어 홍륜사의 법척법사를 불러 치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밀본법사를 불러 침실 밖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경을 다 읽고 밀본은 막대기를 들어 침실 안으로 던졌다. 이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뜰 아래로 쓰러졌다. 이에 왕의 병이 당장 나았다.
가계
- 부모 : 진평왕(眞平王), 마야부인(摩耶夫人)
- 동생 : 천명공주(天明公主)
- 제부(弟夫) : 김용춘
- 조카 : 김춘추(태종 무열왕)
- 동생: 선화공주(善花公主)
- 백부: 진정 갈문왕(眞正葛文王)
- 숙부: 진안 갈문왕(眞安葛文王)
- 사촌 : 진덕여왕(진안 갈문왕과 월명부인의 딸)
- 남편(삼국유사의 기록)
-
- 음갈문왕(飮葛文王) : '음'은 '반'(飯)의 잘못일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 재위 초에 당 태종이 모란꽃 그림을 보내 여왕을 희롱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음갈문왕은 선덕여왕 재위 1년 이후에 혼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남편(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
참고
제27대 선덕여왕실록
(재위기간 : 서기 632년 정월~647년 정월, 15년)
1.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선덕여왕과 신라 내정의 혼란
선덕(善德)여왕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고 아름은 덕만이며, 마야부인 김씨 소생이다. 진평왕은 첯 왕비 마야부인에게서 두 딸을 얻었는데, 첯째는 천명이고, 둘째 는 덕만이다. 천명은 폐위된 진지왕의 첯 아들 김용수에게 시집갔으므로 관례상으로는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를 사람은 사위 김용수였다. 하지만 용수는 폐왕의 자식이므로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용수는 천명이 자신의 동생인 용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동생 용춘에게 천명을 부탁하고 얼마가지 못하고 병으로 죽어 버렸다. 덕만은 공주 시절 진지왕의 둘째 아들 용춘과 결혼하여 살았다. 507년에 나이 60에 가까운 미실이 병으로 죽고 난 뒤,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화백회의의 지지를 얻어 둘째 딸 덕만을 후계자로 정했다. 덕만이 후계자로 정해진 것은 마야부인이 죽고 승만부인이 둘째 왕비로 책봉되었을 때였다. 승만은 왕비에 책봉된 후에 아들을 하나 낳았으나 그 아이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결국 632년 정월에 진평왕이 죽자, 덕만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용춘이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용춘에게서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즉위 후에는 흠반과 을제가 보태져 남편이 세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삼서제도'를 따른 것이었는데, 삼서제도란 왕녀가 자식을 갖지 못할 때, 남편을 셋 얻게 하는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였다. 선덕여왕은 즉위년 2월에 그들 중에서 을제에게 국정을 맡겼다. 용춘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스스로 궁을 떠나겠다고 선덕여왕에게 허락을 청했다. 선덕여왕은 언니 천명공주가 남편 용수를 사별하고 자신의 남편인 용춘을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궁을 떠나 천명과 살도록 허락했다.
선덕여왕 대에 와서 신라는 당과의 유대 관계를 한층 더 강화했다. 즉위년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이듬해 7월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635년에 사신을 통해 이세민의 신임표를 보내면서 선덕여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진평왕의 봉작을 잇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 이세민은 여자가 왕이 되는 것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봉작 내리는 것을 3년이나 질질 끌면서 허락을 미루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 이세민에게 매우 불쾌한 감정이 생겨 겉으로 표시는 할 수 없었지만 사사건건 은근히 비꼬며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신왕이 여자임을 내세워 봉작을 내리는 일을 질질 끌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은 몹시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그런 심사를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640년에 당나라 국학에 신라 왕실의 자제들을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등 관계 회복에 주력하였다. 사신이 갈 때마다 이세민은 불쾌한 언사를 서슴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신라 사신은 당나라에 대해서 대꾸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지속적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고 고구려의 위협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선덕여왕 재위 2년(633년) 8월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고, 636년 5월에는 장군 우소를 앞세워 독산성을 공격해 왔다. 하지만 신라의 맹장 알천의 활약으로 백제군을 전멸시켰다.
이 싸움 이후 한동안 백제는 조용해졌다. 백제 무왕이 나이가 늙어 전쟁을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번에는 고구려가 638년 10월에 북쪽 변경을 침입해 왔고, 11월에는 칠중성(임진강변)으로 침입해 왔으나 알천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이렇게 고구려의 침입이 잦아지자 선덕여왕은 하슬라(강릉)를 북소경으로 삼아 사찬 진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 무렵, 백제의 무왕이 죽고 의자가 왕위에 올랐다. 젊은 왕 의자는 군대를 정비하여 642년 7월 신라에 대대적인 총공세를 감행해 왔다. 그 결과 한 달만에 신라의 서쪽 변경 40여 개 성이 함락되고 그틈에 또 고구려가 침입하여 당항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또 백제 장군 윤충이 같은 달에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 도독 이찬 품석(김춘추의 사위)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을 죽였다.
대야성 함락에 놀란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했으나 고구려 연개소문은 신라의 죽령 이북 땅을 내주면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말로 김춘추를 농락했다. 김춘추가 연개소문의 제의를 거절하자 그를 감옥에 가둬버렸다. 난감해진 김춘추는 일단 땅을 내주겠다고 약속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신라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선덕여왕은 고구려, 백제, 왜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같은 운명임을 깨닭고 급히 당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지원해 주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은 신라 사신을 농락하면서 노골적으로 당의 위세를 과시하는 등 군대 파견은 커녕 불쾌한 언사에도 아무런 애꾸도 못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644년 선덕여왕은 다시 사신을 보내 군대를 요청하자, 이세민은 마지못해 고구려에 당의 사신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과거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 중에 신라가 고구려 땅을 빼앗아 간 사실을 들면서 거절했다.
그 무렵,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년 3월 백제군이 신라 변경을 쳐들어 오자 김유신이 나가 적 2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그해 5월, 당의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선덕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하였다. 그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를 급습하여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렇듯 게속해서 백제에게 당하자 조정은 크게 흔들렸고, 심지어 반정 세력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반정의 명분은 여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백제와 전쟁에서 계속 땅을 빼앗기고 나라가 피폐헤졌다는 것이었다. 사실 선덕여왕은 즉위 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앓아 누웠고 정사를 잘 챙기지도 못했다. 거기다 대외 전쟁은 계속되었고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런 와중에 승려 자장의 제안으로 645년 황룡사 대탑을 건축하는 등 전쟁 중에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드는 공사를 하였고 그런 사실들이 반정세력에게 명분을 주고 말았다. 충성스럽던 비담과 염종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647년 정월에 명활산성을 장악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645년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로 당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았다. 그 때문에 그의 반정에는 많은 군대가 동참하였으나 쉽게 서라벌 도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서라벌에서 근왕 세력과 반정 세력이 대치한 가운데 군세가 불리한 근왕세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차에 김유신과 알천 등의 활약으로 결국 비담이 붙잡히고 내란은 종식되었다.
선덕왕은 이미 병을 앓고 있던 중으로 반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자, 병이 악화되어 내란 중인 1월 8일에 생을 마감했다.
선덕왕은 아기를 갖지 못햇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남편이었던 용춘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흠반과 을제가 동시에 남편으로 관계를 하였으나 아기를 잉태할 수가 없었다. 그들 모두 유부남으로 본 부인과 이혼하고 선덕을 섬겼다. 그러나 후에 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왕위를 잇는 것은 용춘이 한때 선덕왕의 남편이었다는 점이 참작된 것이다.
선덕왕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자기가 죽을 시기를 예언하고 무덤의 위치까지 정해 뒀다고 한다. 현재 선덕왕릉이 있는 경주시 보문동이 바로 그곳이다.
선덕왕은 공주 시절 김용춘과 결혼하였고, 그 때문에 용춘의 아내였던 선화공주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또 선덕왕은 삼국유사에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라는 제목으로 일부 내용이 전해지면서 꽤 총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선덕왕을 높이기 위한 과장된 면이 있으며 사실과는 다르다고 판단된다.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무찌른 것은 장군 알찬의 지략이며, 비담의 무리가 일으킴 반정의 명분이나 황룡사 대탑 건립 같은 무리한 공사를 강행한 것은 반정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 * *
지금까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선덕왕까지 살펴 보았고 미실에 대해서도 살펴 보았다. 신라 왕실의 진골과 성골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무질서한 근친간의 결혼, 의제가족제도, 마복자 제도 등 신라 사회의 결혼 풍습은 혈통에 혼란을 가져오며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 모두를 섬겼고 동륜태자,사다함,세종 등 당대에 내노라 하는 왕족들이 앞다투어 미실을 탐하였고 미실 또한 권력욕에 사로 잡혀 마음껏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진평왕은 미실에게 시달리면서도 왕권을 유지하였고 미실이 나이 60세에 죽고 나서도 24년을 더 왕좌에 있다 죽었다.
천명공주는 드라마에서 처럼 일찍 죽지 않고 오랫동안 살면서 첯 남편이던 용수가 죽자 평소 흠모하던 그의 동생 용춘에게 시집을 가서 속세를 떠나 그와 같이 바둑이나 두면서 여생을 산궁에서 보내다가 죽었다. 덕만은 용춘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자 즉위 후에 유부남이던 두 명의 남편을 더 만들었다. 그래도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는 등 미래를 내다보는 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비롭게 보였을 지는 몰라도 총명하지도 않았고 병약하기만 하여 국정을 제대로 돌 볼 수가 없었다.
미실이 60세 나이로 죽고 그후 진평왕이 24년을 더 재위에 있다가 죽으면서 덕만이 왕위에 올랐다. 선덕여왕 덕만은 15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당나라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계속되는 대외 전쟁으로 나라 재정이 피폐해 졌으며 진흥왕 대에 확장하였던 많은 땅을 백제와 고구려에 빼앗겼다. 병약하여 정사를 제대로 돌 볼 수가 없었고 후계자를 생산하지도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황룡사 대탑을 건축하는 등 내치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래서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은 명분이 있었는데 선덕왕의 전쟁, 대외관계, 내치 등 정치역량이 부족하였고 총명하지도 못했다는 사실과 병약한 몸, 그리고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석녀였다는 사실이다.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을 섬겼고 나이 40에 진평왕이 열세 살에 즉위한 579년부터 진평왕을 섬기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나이 60이 되어 미실이 죽은 607년까지 거의 20년간 신라 조정을 자지우지한 시기다. 미실이 60세 나이로 죽은 해가 607년이며 진평왕은 미실이 죽은 이후 24년을 더 재위에 있다가 죽으면서 선덕왕이 즉위한 해가 632년이다. 이를 볼 때. 미실과 선덕의 나이차는 대략 20~30년 이상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20대 처녀와 50대 아줌마가 우리 드라마에서 치열하게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흥왕 재위 36년, 진지왕 2년, 진평왕 52년, 선덕왕 15년, 진덕왕 7년, 태종무열왕 7년의 재위기간과 치적을 살펴보면 선덕여왕의 치적은 재위기간 15년에 비해서 이룬 것이 별반 내세울 것이 거의 없는 여왕에 불과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비추어 볼 때 TV 역사 드라마는 역사를 왜곡하여 허구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역사 드라마가 허구와 과장된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주몽','용의 눈물','불멸의 이순신','대조영'은 그래도 비교적 역사 내용에 충실하게 드라마가 제작된 작품들이나, '연개소문'은 한시대에 나타난 풍운아로, '천추태후'는 드라마 전체가 엉터리 내용으로 사랑과 권력투쟁을 그리고 있며 시청자들과 청소년들의 역사 인식에 엄청난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는 관련 역사 학회와 공동으로 조언을 받고 있지만 드라마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역사 조작에 합류하고 있다. '역사는 역사고 드라마는 드라마'라고 하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선과 악으로, 백과 흑으로 구분하려는 이분법적 사고로 충동시키고 있으며 시청자들은 자신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환상에 빠지고 있다. 이렇듯 드라마 작가들의 심각한 역사 왜곡은 시청자들의 역사의식을 또한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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