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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0 : 신라의 역사 39 (진평왕 시대의 인물들 1) 본문
한국의 역사 140 : 신라의 역사 39 (진평왕 시대의 인물들 1)
1. 진평왕 시대의 인물들
미실 : 치맛자락 하나로 천하를 뒤덮은 경국지색
진흥왕 중반기에서 진지왕 대를 거쳐 진평왕 초기 10년까지 약 40여 년간의 신라 정치는 미실이라는 한 여자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미실이라는 여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신라의 특이한 문화와 신라 여인들의 독특한 삶, 그리고 미실의 남다른 성장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미실은 제2대 풍월주 미진부의 딸이다. 미진부의 아버지는 아시공이며, 어머니는 법흥왕과 소지왕의 후궁 벽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삼엽궁주이다. 법흥왕은 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후비 옥진궁주에게서 아들 비대를 얻었는데, 그는 비대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했지만 위화랑과 법흥왕의 정비 소생의 딸 지소부인이 비대의 어머니 옥진이 골품이 없기 때문에 비대는 태자가 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아시공과 삼엽궁주가 지소부인을 지지하고, 옥진의 아버지 위화랑이 또한 지소부인을 지지함으로써 비대의 왕위 계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지소부인과 입종(법흥왕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삼맥종(진흥왕)이 왕위를 이었다.
진흥왕이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지소부인은 섭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더불어 진흥왕의 즉위에 지대한 역활을 했던 아소공과 삼엽궁주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또한 그들 사이네 태어난 미진부 역시 16세의 어린 나이로 태후의 폐신(총애받는 신하)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미진부는 법흥왕과 백제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 사이에 태어난 딸인 남모와 결혼했다. 그런데 초대 원화인 준정이 자기가 차지할 원화 자리가 남모에게 넘어가는 것을 질투하여 남모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바람에 아내를 잃게 되었다. 그 후 미진부는 한동안 아내를 맞이하지 않다가 법흥왕의 후궁이며 위화랑의 손녀인 묘도와 몰래 사통하고 있었는데, 지소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 묘도를 미진부에게 시집보냈고 그들 사이에서 딸 미실과 남동생 미생이 태어났다.
미실이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후 처음으로 만난 남자는 세종이다. 세종은 지소태후와 계부인 박이사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데, 지소태후는 세종이 성장하자 미녀들을 뽑아 궁중에 모아 두고 세종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선택하라고 하여 세종은 미실을 선택했다.
하지만 지소태후는 미실을 꺼렸다. 지소태후도 법흥왕의 명령으로 박이사부(박영실)을 계부로 맞아들였는데, 지소태후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태자가 없던 법흥왕은 원래 박영실을 부군으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일 이후, 지소태후는 박영실을 몹시 싫어 했으며 법흥왕이 계부로 삼으라고 하자 더욱 싫어했다. 그런데 미실이 박영실과 인척 관계였으니 꺼렸다. 하지만 박이사부의 충고로 미실을 맞아들여 세종의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지소태후는 자신과 박이사부 사이에 태어난 딸 숙명을 진흥왕의 왕비로 삼고,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부인을 내쫒으려 했다. 사도부인 또한 박영실의 딸이어서, 그녀와 미실은 인척관계였다. 그래서 지소태후는 사도부인에 대한 미움이 미실에게까지 연계되었고, 결국 미실을 궁에서 내치기에 이른다.
궁궐에서 쫓겨난 미실은 또 한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유명한 화랑인 사다함이었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비량의 손자이다. 비량은 위화랑의 누나 벽화를 사랑했는데, 당시 벽화는 소지왕이 죽은 뒤에 법흥왕의 후궁이 되어 있었다. 비량과 벽화는 몰래 사통하였는데, 그들은 늘 벽화궁의 뒷간에서 만나 정을 통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구리지라 했으니, 이는 '구린 데서 낳은 아이'라는 뜻이다. 구리지는 위화랑의 둘째 딸 금진과 결혼하여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열두 살에 화랑도에 입문하여 문노에게 격검과 학문을 배웠으며, 561년에 열여섯 어린 나이로 가야 정벌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제5세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과 사다함이 사랑에 빠진 것은 가야 정벌 출전 전이며 그들은 서로 사통하였다. 미실을 잃은 세종은 모후의 명령으로 진종의 달 융명과 결혼하였으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융명은 거들어 보지도 않고 미실을 그리워 했다. 그 무렵, 미실과 사다함은 사랑이 깊어져 결혼을 약속하고 미실은 진흥왕을 찿아가 사다함과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결국 허락을 받아 냈다.
그런 상황에서 사다함이 가야 정벌 전쟁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사다함은 용맹이 뛰어나고 무슬이 탁월하여 귀당비장에 임명되었다. 사다함이 전장으로 떠나는 날 미실은 노래를 불렀는데,
"바람이 불어도 임 앞엔 불지 마오.
물결이쳐도 임 앞엔 치지 마오.
어서 돌아와 다시 만나 안아 보오.
아아,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떼라니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영영 이별의 노래가 될 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미실과 사다함이 결혼 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세종은 식음을 전폐하고 미실의 이름만 불러댔다. 결국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이에 세종은 미친 듯이 좋아하며 미실의 숙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실은 세종과의 관계를 거부했다. 이미 세종이 융명을 정식 아내로 맞이한 터라 미실은 첩의 신분으로 전락할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지소태후에게 달려가 미실을 정식 부인으로 삼도록 해 달라고 졸랐다. 지소태후는 별 수 없이 미실을 정부인으로 삼고, 융명을 후부인으로 삼았다. 그러자 융명이 불만을 표시하며 궁을 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지소태후는 미실에게 향후에라도 세종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은 다음에 융명을 궁 밖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다.
얼마뒤, 사다함이 승전보를 울리며 돌아와 미실과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미실은 이미 세종의 부인이 되어 있어, 그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파랑새여 파랑새여 저 구름위의 파랑새여
어이하여 내 콩밭에 내렸는가.
파랑새여 파랑새여 내 콩밭의 파랑새여
어이하여 다시날아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왓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왜 왔는가.
공연히 눈물 짓게 하고 상심하여 여윈 끝에 죽게 하려는가.
나는 죽어 귀신이 되리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이 되리.
그래서 그대에게 날아들어 수호신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전군부처(세종과 미실) 보호하리,
만년천년 죽지 않도록."
사다함은 그녀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를 잃은 슬픔이 뼈와 살에 사무쳐 그 상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날로 여위더니 7일 만에 죽어 버렸다.
사다함이 죽은 뒤에 미실의 남편 세종이 화랑도의 풍월주가 되었다.
한편, 미실은 사다함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는데,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고 있던 중, 밤에 꿈속에서 사다함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나는 너의 배를 빌려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 뒤로 미실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제11대 풍월주 하종이다. 사람들은 미실이 입궁하기 전에 이미 사다함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미실은 사다함이 죽은 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랑을 잃은 그녀에겐 더 이상의 순정 같은 것은 없었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색정과 권력욕 뿐이었다.
미실은 당시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태자와도 사통하였는데, 이는 동륜의 어머니 사도왕비가 주선한 일이었다. 사도왕비는 지소태후가 자신의 딸 만호와 동륜태자를 결혼시키려 하자, 미실을 동륜에게 붙여 그 마음을 빼았으려 하였는데, 미실이 동륜의 자식을 잉태하면 태자비가 되게 해 주겠다며 미실을 충동했다. 미실은 크게 기쁘하며 동륜에게 접근하여 사통하였고 그리고 마침내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흥왕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미실의 미모가 탐이나서 자신을 섬기도록 명령했다. 미실은 음사에 매우 능하고 음악과 춤에도 뛰어났기 때문에 진흥왕은 쉽게 빠져 들었으며 미실은 이를 이용하여 왕후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사도왕비가 원한 일이었다. 사도왕비는 자신은 물론 미실과 보명 등 여러 여자를 동원하여 진흥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흥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된 미실의 힘은 어느덧 남편인 세종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쯤되자, 그녀는 세종이 부담스러워졌으며 진흥왕을 움직여 세종을 전장에 내보내 버렸다.
세종이 떠난 뒤, 미실은 진흥왕에게 원화제도를 부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원화는 화랑도가 생기기 전에 풍월주의 위치에 있었던 여자를 지칭하는데, 미실은 스스로 원화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풍월주는 없어지고, 원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진흥왕은 미실의 요구대로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를 복원하여 미실을 원화에 임명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전장에 나가있던 세종의 낭도들이 크게 반발하자, 세종은 미실을 생각하여 이렇게 낭도들을 타일렀다.
" 새로운 원화 미실은 나의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
그 뒤로 낭도들이 그녀에게 순종하게 되고, 그녀는 궁궐에선 왕후의 권력을 얻었으며, 궁밖에선 풍월주의 권력을 얻었다. 이때가 진흥왕 재위 29년(568년)으로 미실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원화가 된 미실은 설원랑과 친동생인 미생을 봉사랑(색공상대)으로 삼았다. 설원랑은 후에 제7대 풍월주가 되는 설화랑인데, 위화랑의 차녀 금진이 설성이라는 낭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또한 미생은 미실의 친동생인데 그녀는 친동생과도 정을 통하였다.
거기다 동륜태자와도 사통하고 있었는데, 동륜은 미실을 잊지 못해 늘 합궁할 생각만하고 있었고, 미실은 진흥왕이 알게 될까 염려하여 동륜을 피하고 있었으나 동륜은 막무가내로 찿아와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통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동륜의 요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고 이에 미실은 자기가 거느린 유화(여자 낭도) 중에서 미인들을 골라 동륜에게 붙여 주었다. 이에 동륜은 미친 색광이 되어 미생과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황음을 일삼았다. 소문난 미인이라는 미인은 모두 찿아 다니면서 색을 즐겼고, 그러다가 급기야는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까지 넘보게 되자, 보명은 미실 때문에 그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으나, 밤마다 담을 넘어 온 동륜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결국 관계를 허락했는데 밤마다 보명궁을 드나들다가 어느날 보명궁의 담을 넘다가 보명궁을 지키던 큰 개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궁궐은 발칵 뒤집어졌으며, 진흥왕은 노발대발하여 사건의 진상을 캐는 과정에서 그간 동륜이 낭도들과 어울려 황음을 일삼은 행각들이 들춰졌고, 그 낭도들은 미실의 수하들임이 밣혀졌다.
그 사건으로 분노한 진흥왕은 미실을 궁궐에서 내쫓고 원화의 직위에서도 해임시킨 뒤, 세종을 불러 풍월주에 재임명했다. 그러나 미실은 그녀의 정부인 설원랑이 풍월주가 되기를 희망하여 세종에게 풍월주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하자 미실의 요구대로 세종은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미실이 궁궐에서 내쫓기자, 이번에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진지왕)이 미실을 찿았다. 미실은 금륜과 사통하면서 그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을 다시 궁궐로 불러 줄 것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진흥왕이 미실의 뛰어난 색사를 잊지 못해 궁궐로 다시 불러 들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그 무렵 지나친 색사로 인한 정력 소비로 몸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으며, 그런 가운데 미실과 색사를 무리하게 즐기게 되자,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고 풍질에 걸렸다.
진흥왕이 중풍에 걸린 뒤로 왕권은 사도부인과 미실이 장악했고, 조정의 인사도 그녀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다가 진흥왕은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576년 마흔세 살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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