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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1 : 신라의 역사 40 (진평왕 시대의 인물들 2) 본문
한국의 역사 141 : 신라의 역사 40 (진평왕 시대의 인물들 2)
미실 : 치맛자락 하나로 천하를 뒤덮은 경국지색(계속)
진흥왕이 말년에 미실과 색사에 미쳐 정력을 과도하게 낭비하다가 풍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왕이 죽었지만, 사도부인과 미실은 그 사실을 조정에 알리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안정시킨 뒤에 조정에 공표할 심산이었다. 그래서 우선 세종, 미생, 설원랑, 노리부 등을 불러 충성을 확인한 다음 금륜을 찿아갔다. 금륜에게 왕위에 오르면 저들을 져버리지 않을 것과 미실을 왕후로 삼을 것을 확약받은 뒤에야 조정에 진흥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러나 금륜(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뒤 그들과 약속을 저버렸다. 미실을 왕후로 삼지도 않았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다. 진지왕은 오직 궁궐 밖을 휘젓고 다니면서 황음을 일삼았고, 민가의 처자들을 함부로 범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러자 미실과 사도테후는 그를 폐위키로 결정하고, 세종을 불러 은밀히 대책을 논의 하였다. 당시 화랑도는 크게 문노파와 미실파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문제는 문노의 낭도들이었다. 만약 세종이 미실의 사주를 받고 진지왕을 폐위할 경우 문노파 화랑도들의 반발이 문제였다. 그럴경우 내전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농후하였기 때문이다.
미실과 사도태후는 한가지 계책을 내놓았는데, 원화제도를 복구하여 화랑도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미실을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봉사화랑, 미생을 전방봉사화랑으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 중에는 평민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대거 발탁하여 고관에 임명했다.
이렇게 사전작업을 마친 후에 사도태후는 자기의 오빠인 박노리부를 시켜 거사를 감행토록 하고 행동대로 세종과 낭도들을 동원했다. 반정이 일어나자 진지왕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허무하게 포박되었으며 별궁에 잠시 유폐되었다가 곧 죽음을 당했다.
진지왕을 죽인 사도태후는 자기의 손자 백정(진평왕)을 왕위에 앉혔다. 당시 진평왕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는데, 사도태후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보명과 미실로 하여금 진평왕과 관계토록 하였다. 당시 미실은 서른이 넘은 나이로 보명보다 골품이 낮은 관계로 보명에게 양보했으나 보명이 당시 임신 중이라 사양했다. 이에 미실은 열세 살의 어린 소년 진평왕에게 첯 경험을 안겨주는 영광을 얻었다. 이후 진평왕은 보명과 미실을 좌우로 삼았고, 미실은 어린 진평왕을 끼고 정사를 좌지우지했다.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부터 미실이 죽은 607년 20여 년간은 미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실은 원화로 있으면서 당시 신라의 최대 군사조직이자 인재양성기관이었던 화랑도를 원격조정했으며 실질적으로 왕권을 장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후궁들을 모두 다스리고 있던터라, 왕 주변의 여자들은 미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심지어 진평왕의 모후 만호부인이나 왕비 마야부인도 그녀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할 정도였다.
이렇듯 40년 동안 신라 조정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던 미실은 60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몇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그녀였지만,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60줄 나이에 접어던 때에 순애보를 간직하고 미실에게 나타난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설원랑이었다.
설원랑은 10대에 미실을 만나 섬겼고, 그후로 그녀의 수족이 되어 입 안의 혀처럼 움직였다. 그녀가 풍월주가 되라면 풍월주가 되었고, 풍월주의 자리를 내놓고 문노를 스승으로 섬기라면 거기에도 순종했다. 미실이 죽을 병에 걸려 드러눕자, 설원랑은 그녀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낮없이 병석을 지켰다. 그러다 그는 오히려 그녀보다 먼자 죽음을 맞이했다. 40년 동안의 순애보는 그렇게 끝났다.
설원랑이 죽자, 미실은 아픈 몸을 일으켜 슬퍼하며 울었다. 그리고 자기의 속옷을 설원랑의 관에 함께 넣어 장사 지내도록 했다. 마침내 미실도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구천에서나마 부부애를 맺자는 언약을 한 것이다. 사다함을 보낸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녀의 순정이 마침내 40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자신을 보필한 설원랑에 의해 열린 것이었다.
그 며칠 뒤, 그녀도 설원랑을 따라 구천으로 갔다. 동생 미생의 친구 설원랑이 죽을 당시 58세였으니, 그녀는 아마 예순 살쯤 되었으리라.
문노: 화랑도의 대들보
화랑도를 거론하려면 문노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그는 모든 화랑의 스승이자 전범이었고, 신라 화랑도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538년에 비조부와 가야 왕 찬실의 딸 문화공주사이에서 태어났다. 문화공주는 원래 호조의 첩이었는데, 비조부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문노다.
비조부의 정부인은 법흥왕의 손녀 청진공주였는데, 법흥왕이 청진을 몹시 총애한 터라 비조부도 요직에 발탁되었다. 법흥왕에게 영실을 포함한 일곱 명의 총신이 있었는데, 그들과 더불어 비조부도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법흥왕이 박영실을 총애하여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까지 했다. 비조부는 그런 박영실을 섬겼고 병부령에 올라 군대를 통솔하기도 하였다.
박영실에 대한 왕위 계승은 지소부인과 반대하는 신하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지소부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영실과 비조부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실과 비조부는 야인으로 머물면서 바둑이나 두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문노는 아버지 비조부가 권력에서 밀려난 이후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검술이 뛰어났고, 용맹하였으며 의로운 일에 앞장서는 일이 많았다. 문노 휘하에는 가야 출신 낭도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의 뜻을 펼치려 했다.
544년 가야 왕자 출신 김무력이 백제를 칠 때, 17세의 나이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555년에는 북한산주에서 고구려전에 출전하였고, 557년에는 국원(청주)에 머물면서 북가야의 반란 세력을 소탕하였다.
그는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어머니 출신 성분이 낮은 까닭에 항상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대범한 성격으로 낭도들의 불만을 나무랐으며 그의 대인 기질이 여려 화랑에게 전해지면서 제5대 풍월주가 되는 사다함 같은 화랑은 열두 살에 스스로 찿아와 그를 스승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561년에 사다함이 가야 정벌전에 참전하면서 동행하기를 요청하자 그는 공을 세우는 것보다 가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출전하지 않았다. 그 뒤로 문노의 명성은 한층 높아져 가야 출신 낭도들이 대거 문노 밑으로 모여 들었다. 화랑도의 가야파는 이렇게 문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사다함이 미실의 변절에 절망하여 죽자, 미실의 남편 세종이 제6대 풍월주에 올랐다. 세종은 문노를 찿아와 도움을 요청하자 문노는 세종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섬겼다. 그러자 세종은 진흥왕을 찿아가 문노를 위해 간언했다. 이에 진흥왕은 문노에게 급찬의 지위를 내렸으나 문노는 받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을 위하는 세종을 계속 섬겼다. 사도부인도 문노를 자기편으로 끌여들이기 위해 은근히 문노를 돕기도 하였다.
미실이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를 복원하자 세종은 전쟁에 출전하였고, 문노도 세종을 따라 출전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명성을 드높였다. 그러자 미실이 그를 불러 봉사화랑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문노는 거절했다. 문노는 미실과 설화랑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실은 문노의 그런 생각을 알면서도 화랑도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문노를 멀리 할 수는 없었다.
진지왕이 폐위된 뒤 조정에서는 문노의 힘을 의식하여 아찬의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서야 비로소 벼슬을 받았다. 문노는 당시 실권자인 미실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미실도 문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미실은 오히려 그를 국선으로 삼고 제8대 풍월주에 임명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 하였다. 그만큼 문노는 당시 낭도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었다.
문노는 늦게 결혼하여 아내 윤궁을 두었는데, 그녀는 문노의 큰 후원자 노릇을 했다. 윤궁은 국선의 아내로서 화랑과 낭두의 아내들을 이끌었고 직접 옷을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문노는 윤궁 말고는 그 어떤 여자와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심지어 유화들조차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았고, 색을 즐기지도 않았다.
문노는 풍월주로 있으면서 화랑도의 토대를 세우고 조직을 완성했다. 그 덕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그 중심에 화랑도 출신들이 있었다. 신라 통일의 영웅 김유신도 문노를 신라 화랑의 으뜸으로 삼았으며 신라 화랑이 추구하던 가장 이상적인 화랑상이었다.
그는 606년에 향년 69세로 죽었다. 그의 아내 윤궁은 나이가 열 살이나 아래였으나, 그가 죽던 해에 그녀도 같이 죽었다. 슬하에 대강,충강,금강 등 아들 셋과 윤강,현강,신강 등 딸 셋을 두었으며 대강은 후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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