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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3 : 신라의 역사 42 (제28대 진덕여왕)

두바퀴인생 2011. 2. 1. 01:01

 

 

 

 

한국의 역사 143 : 신라의 역사 42 (제28대 진덕여왕)

 

 

제28대 진덕여왕

진덕여왕(眞德女王, ?~654년, 재위: 647년~654년)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은 김(金), 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생애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진덕여왕은 왕위 계승자로 내정된 김춘추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며, 김춘추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비담을 비롯한 반란군은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밀려 결국 궤멸되었다. 반란군을 토벌한 진덕여왕은 알천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다.

진덕여왕은 그 후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가계

 

참고

 

 

 

 

 제28대 진덕여왕실록(재위기간 : 서기 647년 정월~654년 3월, 7년 2개월) 

 

1. 난국 타개책으로 즉위한 진덕여왕과 신라의 구애 작전

진덕(眞德)여왕은 진평왕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 국반의 딸이고, 월명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만이다. 그녀는 자태가 곱고 키가 7척이며 팔을 뻗으면 무릅까지 닿았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647년 정월에 일어난 비담의 난 중에 죽자, 그 와중에 승만이 왕위에 올랐는데, 왜 그녀가 왕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당시 성골로서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성골 여자인 승만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성골이라는 신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없어 이 또한 가설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왕에서 진덕여왕까지를 성골 왕으로,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를 진골 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하여 이 기록의 진위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진덕여왕의 즉위를 성골과 진골의 구분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선덕여왕의 영흠한 지혜를 믿던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실권자 김춘추가 난국 타개를 목적으로 그녀를 왕위에 앉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지 9일만에 비담의 난은 종식되었다. 내란을 종식시킨 일등공신은 김유신이었다. 당시 도성 병력은 반군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는데,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말려 반군은 궤멸되었고, 비담을 비롯한 30여 명의 반군 지휘부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진덕여왕은 곧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내정을 수습하는 한편 당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당 태종은 지절사를 보내 선덕여왕을 광록대부에 추증하고, 진덕여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 왕에 책봉하였다. 이로써 진덕은 즉위 한 달 만에 내정을 안정시키고, 국제적으로도 공인도 받았다.

 

그러나 신라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비담의 난으로 많은 신하와 장수가 죽었고 병력 손실도 컸다. 백제가 그 틈을 노려 그해 10월에 쳐들어 왔다. 백제군은 순식간에 무산, 감물, 동잠 등 세 성을 포위하자 김유신이 병력 1만을 이끌고 나가 대적하였으나 열세였다. 그때 김유신 휘하의 비녕자가 아들 거진과 함께 목숨을 내놓고 싸우다 전사하자, 그들의 용맹에 힘입어 신라군의 사기가 되살아나 백제군을 격파하고 3천 명의 적을 죽이는 큰 성과를 냈다.

 

648년 3월엔 백제 장군 의직이 신라 서쪽 변경을 유린하며 휩쓸고 다녔는데, 요거성을 비롯하여 열개의 성이 무너졌다. 김유신이 나가 의적과 대적하였는데, 김유신의 전술에 말려 백제군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쫓겨갔다.

 

649년 8월엔 백제 장군 은상이 다시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다시 출전시켜 열흘 동안 적과 대적하여 고전하다가, 도살성에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여 9천 명에 가까운 적군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듯 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즈음, 김춘추는 아들 문왕과 함께 당에 들어가 있었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난 자리에서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여 하락을 받아 내고, 스스로 신라의 휘장과 복식을 당의 것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또 사신 감질허가 당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자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래서 649년 정월부터 신라 백관이 모두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고,  650년부터 당의 연호를 썼다.

 

                   

 

당 태종이 죽자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사신으로 보내 '태평송'을 올렸다.

 

한마디로 태평송은 지극한 '아부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는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까지 가세하여 신라를 공격하면 회복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던지 당의 군사 지원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김춘추가 스스로 당의 복제를 따르겠다고 한 것이나,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사용한 것도 모두 당의 지원을 받아 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김춘추가 주도한 이 같은 구애작전은 나중에 나당연합군으로 결실을 맺는다. 김춘추가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철저하게 무릎을 끓은 모습은 약소국 신라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진덕여왕은 재위 8년째인 654년 3월에 죽었고, 사량부에 능이 마련되었다. 당 고종은 대상승 장문수를 사절로 보내 조문하였으며, 진덕여왕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보냈다. 

 

진덕여왕의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