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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4 : 신라의 역사 43 (제29대 태종무열왕)

두바퀴인생 2011. 2. 2. 05:10

 

 

 

 

한국의 역사 144 : 신라의 역사 43 (제29대 태종무열왕)

 

제29대 태종무열왕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2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의 제 29대 (재위 654년~661년)이자 신라의 군인, 외교관이었다. 성은 김(金), 는 춘추(春秋)이다. 김용춘문정태후(文貞太后) 김씨의 아들이며, 제18대 풍월주를 지냈다. 진평왕 사후 한때 유력 왕위계승자로 지목되어 사촌누이이자 이모인 선덕여왕의 견제를 받았으나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당나라와 고구려, 일본 등에 외교관으로 파견했다.

 

고구려백제 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신라는 자구책으로 외교활동을 했고, 그는 외교관으로서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나라, 당나라와의 연합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무열왕의 부계는 진지왕의 자손이고 모계는 진평왕의 자손으로 부계와 모계 모두 신라의 왕족인 성골이었다. 그러나 무열왕 이후 부계만이 왕족인 진골 계열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를 진골의 시조로 간주한다.

 

김유신의 처남이자 장인이 된다. 김유신은 그가 왕위 계승자라는 점을 내다보고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냈고, 본부인의 사후 무열왕의 딸을 재취 부인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에 사망하였으나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군주이기도 했다. 이견의 소지가 있으나 보통 한국 역사상 중국식 묘호를 받은 첫 임금이기도 하다.

 

생애

불우한 유년기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602년 신라 금성에서 태어났다. 진지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진지왕의 둘째 아들 김용춘(金龍春)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天明公主, 또는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이다. 천명공주선덕여왕의 관계는 천명공주가 맏딸이라는 설이 있고, 둘째 딸이라는 설이 있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귀족들에 의해 폐출된 뒤 유궁에 감금되었다가 4년만에 사망하였으므로 아버지 김용춘, 큰아버지 김용수(金龍樹) 그리고 진지왕이 유궁에 있을때 첩에게서 얻은 아들 서숙(庶淑) 비형랑의 왕위 계승권은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용춘과 용수는 사촌 형인 진평왕의 배려로 궁에서 자랄 수 있었고, 맏딸 천명공주는 용수에게 시집갔다가 용수 사후 용춘에게 개가하였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가 김용수 라는 소수설도 있으나 보통 무열왕의 생부는 김용춘으로 보는 설이 다수이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 춘추 역시 궁궐에서 자라났고 화랑도에 가입하여 풍월주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같은 불우한 처지였던 가야의 왕족 출신 김유신과 친밀해졌고 이후 김유신은 그와 그의 아들 법민을 도와 삼국통일의 뜻을 실천해 나간다.

 

결혼과 재혼

김춘추는 일찌기 대신 보종의 딸 보라궁주 설씨와 결혼했으나 보라궁주는 딸만 둘 낳고 요절하였다.

 

체육을 좋아했던 그는 축국(소의 내장 또는 돼지의 내장에 바람을 넣어 공처럼 만든 것)을 즐겼는데, 그가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임을 알아본 김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이 찢어지게 한 뒤 여동생 문희와 보희에게 옷을 수선할 겸 시중들게 하였다. 언니인 보희는 전날 꿈에 자신이 눈 오줌이 금성(경주)에 범람하는 꿈을 꾸었다가 동생인 문희에게 꿈을 팔았는데, 그의 옷을 수선하려 할때 코피가 나서 다른 곳으로 물러나야 했다. 춘추의 옷을 수선한 문희는 곧 그와 동침했고 수태하게 되었다.

 

문희가 임신했으나 본부인(설씨)이 있던 김춘추는 관심갖지 않았고, 이에 김유신은 김춘추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계략을 써서 경주 읍내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여동생 문희를 올려놓고 화형을 기도하였다. 입궐하던 귀족의 제보로 선덕여왕이 읍내에 나타나 연기의 사연을 묻고 김춘추를 보내 사태를 해결토록 하여 결국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결혼하게 하였다. 이때 문희가 춘추의 정식 부인이 된 것은 아니며, 고타소 등 두 딸을 낳은 본부인 설씨의 사후에 춘추의 정실 부인이 되었다. 이후 문희의 언니 보희도 김춘추의 소실로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결혼에는 정략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에 의하면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 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성골계로 대표되는 구 귀족집단의 견제와 반발을 받았다.

 

삼국 통일 기틀 마련

진평왕이 죽자 그는 왕위 계승권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6촌 누나이자 이모인 선덕에게로 왕위가 돌아갔고, 이후 그는 선덕여왕의 즉위 초기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덕여왕은 그를 외교 사절로 고구려백제,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이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隋)·당(唐)과의 연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김춘추는 주로 외교분야에서 활동했다.

 

김춘추가 활동하던 당시는 삼국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던 때였다. 그가 아찬으로 재직 중인 642년 신라는 백제군에게 대야성(경상남도 합천)을 빼앗겼다. 그때 김춘추는 당시 대야성의 성주인 사위 품석과 딸 고타소(古陀炤)를 잃었다. 백제의 장군 윤충은 대야성 성주 품석과 고타소의 목을 베어 말에 실어 금성으로 보냈고 김춘추와 선덕여왕은 이를 목격했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와 힘을 합쳐 백제를 공격하고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났다. 그러나 국경 문제로 오히려 고구려에 붙잡혀 갇혀 있다가 고구려의 대신 선도해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 647년 일어난 구 귀족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 형제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김춘추는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고, 여러 차례 수나라와 당나라에 다녀왔다. 649년 김춘추는 당나라에 건너가 백제 정벌을 위한 군대를 요청해 당 태종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도입하게 하여 발전시켰다. 관직은 대아찬을 거쳐 각간에 이르렀다.

 

생애 후반

즉위와 제도 정비

김춘추는 654년 왕위에 올랐다.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귀족 중 상대등이자 섭정인 알천을 후임자로 지명했으나, 알천은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 자신에게 추천된 왕위계승권을 춘추에게 양보하였다. 그래서 춘추는 무난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 직후 무열왕은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죽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왕후(文貞王后)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당나라에 즉위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고,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新羅王)의 책봉고명을 받아왔다.

 

왕위에 오른 다음에는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발표하게 하고, 지방행정에 관련된 조항인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율령(법률)을 새로 정비하면서 동시에 일부 성골계를 억압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진골계를 대거 임용하여 내부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태종무열왕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55년(태종무열왕 2), 즉위 2년차 초에 장남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그의 10명의 아들들은 그가 왕으로 즉위할 당시 성인이었는데, 부왕이 즉위하기 전에 이미 신라 선덕여왕진덕여왕 조정에서 관직에 임용되어 있었다. 655년 초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또는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족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지방에 있는 33개의 성을 공격하자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나라 고종은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56년(무열왕 3)에는 신라의 개국 공신인 서라벌 6부 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알평은 은열왕(恩烈王), 소벌도리는 문열왕(文烈王), 정지백호는 감문왕(甘文王), 손구례마는 문의왕(文義王), 배지타는 장열왕(壯烈王), 설호진은 장무왕(壯武王)으로 각각 추봉하였다. 이는 신라 6부의 귀족가의 시조에게 왕을 추존함과 동시에 이들에게도 진골의 지위를 부여하여 진골계를 강화하려는 그의 의도였다. 656년에는 당나라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차남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셋째 아들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 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해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 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무열왕 이후 상대등을 왕이 임명함으로서 화백회의혜공왕조 이전까지 왕권 아래에 복속시켰다.

 

외교 정책

즉위 직후 책봉고명사신을 파견하고, 이후 매년 당나라에 사신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백제일본의 외교 관계를 인식하여 즉위년인 654년 고구려에도 특별 사신을 파견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이후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치중하게 된다. 그는 당나라수나라 및 과거 열조들이 고구려에 당한 수모를 상기시켰고, 이는 성공을 거두었다.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백제 정벌과 최후

659년에 백제가 자주 국경 지역을 침범하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 정벌에 나섰다. 한편으로 정보전을 병행하여 백제에 간자를 보내 혼란을 부추겼고, 백제에서 귀순하는 자에게는 특별히 포상을 하여 6두품 이상의 관직을 하사하였다. 660년 초 당나라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오자 나당연합군을 결성하는데 참여했고, 3월에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끄는 수군, 육군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고, 5월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나라 군의 백제공격을 지원하였다. 음력 6월 김유신 등과 황산벌 전투에 참여하였고, 음력 7월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병석에 눕게 된 태종무열왕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여 통일을 완수하지는 못하였다.

 

660년 11월 백제로부터 귀환해 돌아온 백제정벌군과 백제 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내려주고 관등을 승진시켰다. 그리고 백제 멸망(660년 7월) 이후에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도 처벌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최후

백제를 정벌한 뒤 그는 경상북도 경산에 압독주(押督州)를 설치하고 도독을 임명하여 백제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도 사비성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도독을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을 임명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신라 조정에서 항전과 반발 여론이 나왔으나 무열왕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불안감을 느낀 고구려는 각각 신라를 침공한다. 660년 가을 고구려는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해왔다. 661년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은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경기도 여주)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한산성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이 산성의 함락을 막아 무열왕은 동타천의 관등을 대나마(大奈麻)로 승진시켰다. 이 해에 압독주를 다시 가야지역인 대야성(大耶城)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한편 백제의 귀족들은 다시 일본에 구원군을 요청하였고, 사비성을 중심으로 부여 풍, 검모잠 등이 백제부흥군을 거병하였다. 무열왕은 정벌군을 편성하던 중 음력 6월 병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사후

금성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문무왕은 그에게 특별히 태종의 묘효를 추봉하면서, 성한에게는 태조, 박혁거세를 국조로 하고 종묘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 당시 그의 비석은 잘려나갔으며 귀부와 거북이 이수부분만이 남아있어 판독불능이었으나, 거북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그의 묘가 무열왕릉임을 판독하였다.

 

평가와 비판

신라인들은 백제의 정벌과 고구려를 상대로 외교를 감행한 것, 나-당 동맹을 성사시켜서 백제, 고구려 정복의 기틀을 마련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가야는 이미 신라 진흥왕때 정벌하였으나, 가야계와 혼인을 통해 유대관계를 형성한 것 역시 가야계를 완벽하게 흡수한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에는 시호 '무열' 외에 특별히 '태종'이라는 '묘호'를 부여하였다. 묘호는 중국에서 종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던 특수한 호칭으로 그는 한국 역사상 묘호를 받은 두 번째 군주였다.

 

외교력과 수완을 .발휘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당나라와 밀계를 맺고 외세를 끌어들어 민족사적 강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그 밖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무렵 민족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고조선-부여 계열인 고구려, 백제와, 고조선-진-진한과 흉노 계열이며 스스로 중국인의 후손으로 인식한 신라인이나 김춘추 사이에 동류 의식이 있었는가에 대한 회의도 제기되고 있다.

 

그 밖에 백제를 흡수한 것에서도 의자왕 이후 등장한 백제부흥군과 부여 풍의 존재를 놓고 그가 통일을 이루었는가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가족 관계

  • 후궁: 여희(呂姬)

 

기타

  • 그의 시호 중 묘호인 '태종'이라는 것은 지증마립간의 시호 지증과 함께 중국식 시호를 받아들인 또다른 증거로 지목되기도 한다. 지증마립간의 지증이 중국식 시호를 도입한 것이라면 그의 시호 무열왕 외에 묘호 태종은 중국식 묘호를 도입한 것으로 해석한다. 문무왕은 그를 '태종'으로 묘호를 추시하면서 성한을 '태조', 박혁거세를 '시조'라 하였다.
  • 재임 중 657년 신라의 개국공신과 6촌 촌장들을 왕(王)으로 추존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내렸다.
  • 사후 무속 신앙에서 숭배하는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된다. 주로 경주와 그 주변 지역에서 숭배되어 왔다.

 

 

 

 

 

 

제29대 태종무열왕실록(재위기간: 서기 645년 3월~661년 6월, 7년 3개월)

 

1. 통일의 야망을 이룬 무열왕과 백제의 몰락 

태종무열(太宗武烈)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장남 김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 소생이다. 603년에 태어 났으며, 아버지 김용수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 천명부인이 삼촌인 김용춘에게 재가하였기에 용춘의 양자가 되었다. 24세 되던 626년에 화랑도의 풍월주에 올랐다. 이후 이찬의 벼슬에 올라 진평,선덕,진덕여왕 대의 대외 정치 및 외교 문제에 중추적인 역활을 하였다.

 

642년에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고, 맏사위 품석(큰딸 고타소의 남편)을 비롯해 죽죽, 용석 등을 참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김춘추는 외교 관계를 통해 백제를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고구려로 간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담판에서 연개소문이 '죽령 이북 땅을 내놓아라'고 하자 거절했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자 다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거짓으로 연개소문의 제의를 수락한 뒤, 간신히 신라로 돌아올 수 잇었다.

 

647년에는 김유신 등과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옹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활을 했다. 진덕여왕 즉위 이후에는 친당 정책을 주도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당을 방문하여 당태종 이세민에게 병력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어 냈다.

 

한편, 당시 화랑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유신 등의 가야파 군벌과 손을 잡고 막강한 힘을 형성했으며, 654년에 진덕여왕이 죽자, 신하들의 지지를 얻어 52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당시, 신하들은 상대등 알천에게 섭정을 하라고 요청했다. 알천은 김유신보다 앞선 세대로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고, 백성에게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선덕여왕 시절에 임종, 술종,호림,염장,유신 등 당시 가장 이름 있던 장수들과 남산 우지암에 모여 국사를 논의하고 있던 중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자 다른 이들은 놀라서 일어섰으나, 그는 오히려 웃으면서 호랑이를 때려 잡았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용맹과 기개가 높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전쟁에 나가 패배한 적이 없는 뛰어난 전술가 였으며 진덕여왕 시절엔 상대등에 임명된 덕망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신하들은 그런 그를 높이 평가하여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알천은 그런 제의를 거절하였는데, 그는 사심이 없고, 형세 판단이 정확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은 이미 늙었고, 내세울 덕행도 없다면서 김춘추를 추천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김춘추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정치인이었으나 폐왕 진지왕의 손자라는 사실 때문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많아 처음부터 왕위 계승 대상에서 배제돤 상태라 왕위 계승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영걸 알천이 그를 추천하고 덕망이 높던 김유신 또한 지지하자, 대세가 김춘추에게 기울어져 가까스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무열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 심라를 노리고 있었고, 일본마저 백제와 연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라의 희망이라곤 오직 바다건너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주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655년 정월, 고구려,백제,말갈 등의 군사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 왔고, 졸지에 서른세 개의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른다. 무열왕은 급히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당 고종은 영주 도독 정명진과 중량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덕분에 고구려는 급히 신라 전선에서 발을 뺐고, 백제의 의자왕도 물러났다.

 

그 무렵, 백제에서는 의자왕이 초반의 승리에 도취되어 점차 향락에 빠지면서 신료들은 임자파와 성충파가 갈려 내분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의자는 임자파를 지지하는 바람에 성충이 감옥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성충은 술과 향락에 빠진 의자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충언으로 간하다가 미움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다 죽었다.

 

그런 가운데, 당은 고구려 공격이 실패하자 다음해인 658년 설인귀와 정명진을 재차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고, 659년에도 다시 공격에 나섰지만 고구려의 연개소문 전술에 말려 계속 패전만 거듭했다. 그래서 무열왕이 요청한 신라에 대한 당의 원군 파병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무열왕은 660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노심초사 당의 원군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해 3월 당 고종은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삼고, 당에 숙위하던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13만 군사를 파견했다. 이에 무열왕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소정방은 7월 10일 백제 도성을 칠 계획을 세우고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김유신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소정방과 연합하게 하고, 자신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7월 9일 김유신이 황산벌로 진격하니, 백제의 맹장 계백이 오천 결사대와 함께 대적해 왔다. 김유신과 품일 등이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눠 네 번이나 공격을 감행했지만, 적진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김유신의 아우 흠순은 자신의 아들 반굴에게 적진을 돌파할 것을 명령했으나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에게 적진을 뚫을 것을 명령하여 돌진하였으나 계백은 어린 관창의 용기가 가상하여 포로로 잡힌 관창을 돌려 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돌아온 즉시 다시 말머리를 돌려 계백의 진영으로 뛰어 들었다. 계백이 그를 붙잡아 머리를 베어, 벤 머리를 말안장에 매에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내자 되돌아 온 관창의 머리를 보고 신라군은 비분강개하기 시작했다.

 

              

 

신라군이 관창의 머리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진격하니,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계백도 전사했다.

 

계백이 무너지자, 백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7월 12일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당과 신라 연합군은 웅진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휘하 장수들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다.

 

무열왕은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금돌성에서 나와 주연을 베풀고 병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이 마루 아래에 앉아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술을 따르니, 백제의 조평 및 여러 신하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백제 병력이 완전히 궤멸된 것은 아니었다. 임존성에는 흑치상지 등이 웅거하고 있었고, 무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에서 병력을 집결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백제 왕조는 회복할 힘을 잃고 있었다.

 

무열왕은 마침내 일생의 숙원이던 백제 병합에 성공했으나, 백제의 잔병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한 때인 661년 6월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시호는 무열이며 태종이라는 시호가 추가되었다. 능은 영경사 북쪽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