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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6 : 신라의 역사 45 (제30대 문무왕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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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6 : 신라의 역사 45 (제30대 문무왕 2)

두바퀴인생 2011. 2. 4. 02:40

 

 

한국의 역사 146 : 신라의 역사 45 (제30대 문무왕 2)

 

 

삼한 통일의 영웅 김유신

신라의 삼한 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 김유신이다. 또한 그는 신라사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 인물 열전 맨 앞자리에 있는 것이나, 그 분량이 열 권의 열전 중에 무려 세 권이나 되는 것도 신라사에서 그의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잘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정통 신라인이 아니라 가야 왕족 후예였다. 그래서 그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의 성장 길목엔 항상 가야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렇다고 순수한 가야인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가야 왕실의 후예이면서 동시에 신라 왕실의 후예였던 것이다.

 

그의 혈관에 피가 섞이기 시작한 것은 유신의 6대조 취희왕부터이다. 취희왕의 아버지 좌지왕은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 신라의 아찬 도령의 딸 복수도 섞여 있었다. 복수가 아들 취희를 낳자, 좌지는 그를 태자로 삼고 복수를 왕후로 삼았다. 이후 취희는 신라의 각간 진사의 딸 인덕을 맞아 질지왕을 낳았다. 질지왕은 가야 여인 방원에게서 감지왕을 비롯한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간지왕은 신라의 각간 출추의 딸 숙씨에게서 구충(구형왕)을 낳았다. 구충은 가야인 계봉의 딸 계화에게서 무력, 무득을 얻었고, 무력은 진흥왕의 딸 아양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이 바로 김유신의 아버지이다.

 

더구나 할아버지 무력이 진흥왕의 딸과 결혼하여 서현을 낳고, 아버지 서현 또한 만호태후(진평왕의 어머니)의 딸 만명과 결혼하여 유신을 낳았으니, 신라인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셈이다.

 

사실 유신은 서현과 만명이 야합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만명은 그녀의 어머니 만호가 남편 동륜태자가 월담하다가 개에게 물려 어이없이 죽자, 입종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과 사통하여 낳은 사녀였다. 만명은 몰래 가야의 후손 서현과 만나고 있었는데, 만호태후는 그녀와 서현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만호는 지소태후의 딸이므로 진골정통이었는데, 서현은 아양의 아들이므로 대원신통류였다. 거기다 서현은 물락한 가야의 왕족이었다. 만호는 그런 처지의 서현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합이 지속되던 중에 만명은 그만 임신을 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은 서현과 야반도주를 결심하게 되고, 그런 낌새를 눈치 챈 아버지 숙흘종이 그녀를 창고에 가둬 놓았지만, 창고에 벼락에 쳐서 문이 부서진 덕분에 탈출하여 도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가 유신이니, 이때가 595년이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만호태후는 서현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문으로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손자를 보고 싶어 하였다. 결국, 외손자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만호는 딸을 용서하고 서현을 사위로 받아들였다. 막상 손자를 대하고 보니, 그 위용이 대단하고 인물이 출중하여 만호는 만족한 표정으로 "너는 참으로 나의 손자로다."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유신은 성장하면서 스스로 만호태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야파 낭도들이 찿아와 같은 가야 사람임을 들먹이며 청탁을 하면, "나는 곧 태후의 자손인데, 어찌하여 나더러 가야인이라고 하는가?"하고 물리쳤다고 한다.

 

만호태후의 후광을 입어 그는 가야파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며 검술도 뛰어나고 지략을 겸비하여 강직하고 용맹하기도 하여 많은 낭도들이 그를 따랐다. 15세에 화랑에 입문하였으며, 17세 때 홀로 석굴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당시 고구려와 말갈, 백제 등이 신라를 침략하곤 하였는데, 유신은 그들의 침략을 막는데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런데 입굴한 지 4일째 되던 날, 웬 노인이 나타나 물었다.

"이 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어찌 혼자서 머무는가?"

그 노인은 난승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유신은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님을 알고 가르침을 구했다. 난승은 유신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의로운 일에 쓰라고 하면서 홀연히 사라졌다.

 

유신이 석굴에서 돌아오니, 화랑도의 부제는 설원랑의 아들 보종이었다. 하지만 보종의 어머니 미실이 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보종으로 하여금 유신에게 풍월주 승계를 양보하도록 하여 유신이 풍월주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그러나 유신은 가야 혈통이라는 한계 때문에 여러 면에서 제약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의도적으로 그의 옷고름을 찢었고 춘추를 자기집으로 대려가 동생 문희로 하여금 춘추의 옷고름을 달게하고, 자신은 자리를 피했다. 춘추는 유신의 뜻을 알고 문희와 상간하였는데, 결국 문희가 임신을 하였다. 하지만 춘추는 자신의 부인 보량 때문에 문희와의 관계를 발설하지 못했다. 이에 유신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 목적을 달성하는데,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덕만공주(선덕여왕)가 춘추와 주변 사람들을 데리고 남산에 나들이를 나갔다. 그때 유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동생 문희가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기에 그에 대한 벌로 문희를 불에 태워 죽이겠다고 미리 소문을 냈다. 유신은 덕만공주가 나들이 나가는 날을 택해 연극을 꾸몄는데, 마당에 장작을 쌓아 놓고 남산에서 잘 보일 수 있도록 연기를 피웠다. 그 광경을 본 덕만공주가 그 까닭을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주변 사람들이 유신의 동생 문희가 춘추의 아이를 뱄다는 것과 유신이 분노하여 동생을 태워죽이려고 한다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이야기 하자 덕만공주는 같이 온 춘추에게 힐책하면서 당장 달려가서 그녀를 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문희는 훗날 왕후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 기록은 유신이 신라 왕실과 인척지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찌보면 치졸하고 음흉하기까지 한 이 사건 덕분에 유신은 가야 혈통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라 왕실에 편입되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유신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전장에 나가 세운 혁혁한 전공이었다. 유신이 처음으로 크게 공을 세운 것은 진평왕 51년(629년)의 낭비성 공략 작전이었다. 이때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기세에 눌려 매우 불리한 처지였고,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김유신이 적진을 세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적장의 목을 베어 오거나 깃대를 뽑아 왔다. 그 덕분에 신라군의 사기가 올라 5천여 명의 적군을 궤멸시키고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유신은 아버지 서현의 부장에 불과했다. 유신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선덕왕 13년 이후였다. 당시 유신은 압량주 군주였는데, 선덕왕은 그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백제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유신은 출전하여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 일곱 성을 함락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회군하여 도성으로 돌아오는 중 백제가 메리포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선덕왕은 즉시 유신에게 출전토록 지시하자, 유신은 가족도 만나지 못한 채 곧장 달려가 백제군을 공격하였다. 이런 유신의 태도에 장병들들이 감화하였고 바로 사기가 충전되어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그렇듯 전장에서 이름을 날린 유신은 선덕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공신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데, 당시 바담은 선덕왕이 병약할 뿐만 아니라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대도 황룡사 대탑 건립 같은 큰 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었다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비담은 반란군을 이끌고 명활산성에 주둔하면서 궁성을 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비담의 반란에 가담한 지방군이 많아 반란군의 규모가 관군보다 우세하였다. 선덕왕은 월성에 진을 친 채 10일 동안 서로 공방을 벌이고 있었는데, 형세는 점점 비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유성이 월성쪽으로 떨어지자 비담은 별이 떨어진 것은 여왕이 패할 징조라고 말하면서 부하들을 독려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오르고, 반면  관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선덕왕은 그 소식을 듣고 몹시 불안해했다. 이에 유신은 한 가지 계책을 냈는데, 유신은 다음날 한밤중에 대형 연에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달아 밤하늘로 띄워 날려 보냈다. 그것은 마치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었다. 그러자 유신은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였다. 그 바람에 비담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관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유신은 비담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결국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고,  비담을 포함한 관련자 30여 명을 처형하였다.

 

이 사건 이후 유신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그 뒤로 벌어진 여러 전장에서 승승장구하여 신이 내린 장수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고, 품계도 이찬에 올랐다.

 

654년에 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정치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올랐고, 660년에는 만인지상의 재상직인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그 해에 유신은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을 물리치고,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무너뜨렸다. 이후 백제부흥군의 토벌을 주도하였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활을 하였다.

 

백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유신은 백제에 포로로 잡힌 조미압을 이용하여 백제 좌평 임자를 회유하는 데 성공하였다. 유신이 임자를 회유하면서 '혹여 백제가 망하면 임자가 유신에게 의존하고, 신라가 망하면 유신이 임자에게 의존하자'고 제의했는데, 임자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조미압은 백제와 신라를 오가며 유신에게 백제의 내부 사정을 소상히 알려주었고, 그것은 유신이 백제 병합 계획의 단초가 되었다.

 

이렇듯 김유신은 용장과 지장의 면모를 다 갖춘 장수였다. 용맹과 기개가 높고 성품이 대쪽 같았으나, 필요에 따라 암수를 쓰고 흉계를 꾸밀 줄도 아는 음흉함도 있었다.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룬 유신은 673년 7월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인 셋과 여러 첩을 두었고, 많은 자녀를 얻었다. 첯째 부인은 영모이며, 제11세 풍월주 하종의 딸이다. 하종은 미실과 세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돌째 부인은 유모인데, 영모의 동생이었다. 셋째 부인은 지소인데, 무열왕과 문명왕후의 딸이다. 그녀는 유신이 죽은 뒤에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이들에게서 삼광, 원술, 원정, 장이, 원망 등의 적자와 서자 군승을 얻었으며, 딸을 넷 얻었다. 후손 중에 적손 윤중이 성덕왕 때 대아찬에 올랐고, 윤중의 서손인 암은 이찬에 올랐으며 음양가의 술법에 능하였다. 현손 장청은 유신의 행록 열권을 지어 세상에 남겼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과장된 것이 많아 사가들이 가려 썼다고 한다.

 

흥덕왕 때에 유신에게 흥무대왕이라는 추증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