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대당전쟁 2 -나당전쟁의 분수령 천성전투
신라는 나당연합의 성과에 힘입어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구려땅 전체를 복속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한데 이어, 백제 땅마저 차지하기 위해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그뿐 아니라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우선 자국의 백성과 영토 그리고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아가 신라의 역사와 민족의 생존을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만 되는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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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 3월 고구려 왕족인 고연무와 함께 1만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말갈병을 앞세운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은 시작되었다. 후일 발해의 성립으로 신라의 영토가 대동강 이남으로 고착화 되었지만, 이 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결코 북방영토를 가볍게만은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전투는 671년 6월 죽지장군이 가림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 1만여명을 선재공격하여 5300명을 참살하는 대승을 거두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나당전쟁에서 천존, 죽지, 김원술같은 비교적 젊은층의 장수들은 물론 승전을 기록한 대부분의 장군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당전쟁의 기록은 오히려 상당히 축소된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당시 당나라는 설인귀(薛仁貴)가 있는 평양 안동도호부를 거점으로 삼아 남하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중국과의 뱃길을 열어 병력을 집중투입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총 병력 2만 정도의 안동도호부였지만, 671년 9월에 말갈병 4만명을 증원하였으며 672년 정월에는 이근행과 고보를 장군으로 삼아 총 4만명을 추가로 파병하였다. 따라서 안동도호부의 총 병력은 10만에 달하였고, 그로인해 한시성과 마읍성이 격파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전선은 상당히 뒤로 밀려나긴 하였지만, 신라는 격전을 거듭한 끝에 임진강 전선을 끝까지 사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전투가 674년 8월에 있었던 호로강(=임진강의 지류)의 전투였다. 이렇게 당나라의 남하전략이 신라군의 강력한 방어전술에 의해 막히게 되자, 675년부터는 해상작전과 병행하여 우선 한강유역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바로 675년 9월에 있었던 천성(泉城- 경기도 파주 일대로 추정)전투와 매초성(경기도 양주 일대로 추정) 전투가, 한강유역을 장악하여 한반도를 양분시키려는 당나라의 계획과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신라의 전략이 맞부딪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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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 되어야 할 '천성전투'
675년 접어들어 당나라가 거란 말갈병 등을 동원하여 총공격이 있을 것이란 소식은 기정 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문무대왕 역시 고구려,백제 출신의 병력들까지 흡수하여 새롭게 편제된 9군을 중심으로 총력전 체제를 완비하였다. 이제야 말로 삼국을 통일한 진정한 힘을 발휘할 때였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등장하였다. 설인귀는 신라에서 죄를 지어 사형당한 김진주의 아들 김풍훈을 끌어들여 신라 침공의 앞잡이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김풍훈을 앞세운 당군의 목적지는 천성이었다. 지금까지는 천성전투에 대해 매초성 전투의 전초전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높았지만, 최근 들어 이 천성전투의 중요성을 재평가 하려는 움직임이 높다. 즉 천성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매초성 전투의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는 것이 재평가의 핵심이다.
또 천성전투는 나당전쟁에서는 드물게 승전 장수 이름은 문훈(文訓)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확실한 승리라는 뜻이다. 9월 문훈은 천성전투에서 설인귀를 상대로 격전을 펼친끝에 1400여 명의 수급을 베고 적선 40척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얼핏보면 그리크지 않는 승리같지만, 자세히 보면 엄청난 대승이다.
우선 당군이 천성을 장악하려던 이유는,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대군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천성전투의 승리로 인해 당나라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대군을 고립시키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더구나 노획한 적선만 40척에 이른다. 그렇다면 파손되거나 격침된 적선은 그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140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기록으로 당시 당나라 군사의 전사가가 그 정도에 그쳤으리라고 단정하기엔 무리이다. 재차 언급하자면 수급을 베는 행위는 전투가 마무리 된 뒤에 주로 행해지는 것이다. 즉 적의 시신을 확인 할 수 있는 경우에 제한되어 목이 베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성의 경우 전쟁상황으로 보아 배가 정박하고 있는 항포구 혹은 강포구까지 전투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고, 이럴경우 상당한 익사가 발생하게 되는데 익사자의 경우는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설인귀가 무려 40척이나 되는 선박을 버려두고 도망가야 될 만큼 다급한 지경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천성을 거점으로 삼아 매초성의 주력군을 지원하려던 설인귀의 작전은 문훈에 이해 완벽하게 격파당하였으며, 당의 수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양국의 운명을 판가름할 매초성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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