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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8 : 신라의 역사 37 (제26대 진평왕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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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8 : 신라의 역사 37 (제26대 진평왕 1)

두바퀴인생 2011. 1. 27. 00:26

 

 

 

 

한국의 역사 138 : 신라의 역사 37 (제26대 진평왕 1)

 

 

제26대 진평왕

 

진평왕(眞平王, 565년? ~ 632년, 재위 579년 ~ 632년)은 신라의 제26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 는 백정(伯淨, 白淨, 白丁), 중국측 사서에는 진평(眞平)으로 기록되어있다. 진흥왕의 장손으로 아버지는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립종(金立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왕비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생애

진평왕은 동륜태자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장이 11척에 달했다 한다. 법흥왕이 불교을 받아들이면서, 신라 왕족의 이름에 불교적인 요소, 의미을 포함하여 짓게 되었는데, 진평왕의 이름은 싯다르타의 아버지 이름 백정, 마야 부인의 이름은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 또는 마하마야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579년 7월 17일에 진지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치세 초기부터 자신의 동생들을 비롯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제도 개혁에 힘쓰는 한편, 수, 당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중반 이후에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 격화되어 백성들이 자녀를 내다파는 일 등이 벌어졌다. 말년에는 칠숙의 반란을 겪었다. 삼국사기는 정확한 사망 연대에 대해서 칠숙의 난이 일어난 631년과 이듬해인 632년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치세

588년 12월에 상대등 노리부가 죽어 이찬 수을부(首乙夫)로 하여금 그 자리를 잇게 하였다. 승려들을 중국 대륙으로 보내 불법을 배우는 한편, 591년 7월에 남산성(南山城)을 쌓고, 593년 7월에는 명활성(明活城)과 서형산성(西兄山城)을 고쳐 쌓는 등 국방을 충실히 하였다.

 

602년 8월에는 백제군이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하기에 군사를 보내 격파하였으나 귀산(貴山) 등 장수들이 죽었다. 603년 8월에는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에 쳐들어왔다. 이에 왕이 친히 군사를 끌고 상대하였다. 605년 8월에는 백제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608년에는 원광수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아, 2월에는 북쪽 변방의 백성 8천 명을 사로잡고, 4월에는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아 갔다. 3년 뒤 실제로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병력으로 원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나라 안에 기괴한 일도 몇 차례 발생했다. 609년에는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9달 동안이나 불에 타는 일이 있었다. 613년에는 봄에 가물고 초여름에 서리가 내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614년에는 비구니로 살고 있던 진흥왕비 사도부인이 죽었다.

 

611년부터는 백제와의 전쟁이 격화되었다. 10월에 백제가 가잠성(椵岑城)에 쳐들어와 100여일 간의 공방전 끝에 이를 함락시키고 현령 찬덕(讚德)은 자살하였다.

 

616년 10월에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해 왔다. 618년에는 7년 전에 빼앗긴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북한산주의 군주인 변품(邊品)을 보내 이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전 가잠선 현령 찬덕의 아들 해론(奚論)이 싸우다 죽었다.

 

623년에는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해 왔다. 624년 10월에 백제가 다시 쳐들어와 속함성(速含城), 기잠성(歧暫城), 혈책성(穴柵城)이 함락당하고, 급찬 눌최(訥催)가 전사하였다.

 

626년 8월에는 백제군이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하였고, 성주 동소(東所)가 전사하였다. 이후 왕은 고허성(高墟城)을 쌓았다.

 

627년 7월에는 백제의 사걸(沙乞)이 쳐들어와 두 성을 함락시키고 백성 300여 명을 잡아갔다. 이처럼 전쟁의 피해가 극심해진 데다가 3월에 강풍이 불고 흙비가 5일간 내렸으며,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망쳐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졌다.

 

628년 2월에는 가잠성을 포위공격하는 백제군을 물리쳤으나,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자녀들을 내다파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허비하고, 당나라와 대치하게 되자,

 

629년 8월에 대장군 김용춘, 김서현, 부장군 김유신을 파견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략하였다. 고구려군의 기세가 대단했으나 김유신이 선두에 서서 용맹을 떨치니 신라군은 크게 이겨 5천여 명을 베고, 성을 함락시켰다. 9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제도 개혁

왕은 즉위 초부터 새로운 인물들을 주요 요직에 앉히고, 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고, 자신의 두 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했다.

 

즉위 2년차인 580년에는 스스로 신궁(神宮)에 제사를 올렸으며,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김후직(金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재위기간 내내 진평왕은 관제 개편에 온 힘을 쏟았다. 581년에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통해 관리들의 인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또한,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정비 제도를 단행한 뒤,

 

584년에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고치는 한편, 공물과 부역을 담당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 1인을 두었다. 또한, 수레와 가마를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585년에는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의 3궁에 각각 궁내 업무를 책임지는 사신(私臣)을 두었다.

 

이어 586년에는 의례 등을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고,

 

591년에는 왜전(倭典)을 영객부(領客府)로 고치고 영객부령 2인을 두었다. 이들은 외국 사신 접대 업무를 보았다.

 

한동안 왕은 중앙관제 개편보다 지방의 군현제도 개편에 힘썼다.

 

재위 26년째인 604년에는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여 남천주(南川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다.

 

614년에는 백제의 침략에 대비해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였다.

 

이후 622년 2월,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김용수를 첫 번째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은 이후, 다시 관제 개편이 시작되었다. 내성사신은 앞서 재위 7년(585년) 설치한 3궁의 사신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623년 정월에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고,

 

624년 정월에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 상사서(賞賜署, 유공자 상훈 기관)와 대도서(大道署, 불교 관장 기관)에 각각 대정(大正, 장관) 1인씩 두었다.

 

불교 및 중국과의 관계

진평왕 시절에는 여러 고승들이 신라와 중국 대륙을 오갔다. 특히 이들이 귀국할 때는 사신단과 함께 귀국하고 있어, 국가가 불교를 지원함을 알 수 있다.

 

585년 7월에는 지명(智明)이 불법을 배우러 남조의 진나라(陳)로 갔다가 602년에 사신단과 함께 귀국하였다.

 

589년 3월에는 원광(圓光)이 불법(佛法)을 배우러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지명과 마찬가지로 사신단과 함께 600년에 귀국하였다.

 

596년 3월에는 승려 담육(曇育)이 불법을 배우러 수나라에 들어갔으며, 같은 때에 왕이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토산품을 바쳤다. 담육은 605년 사신단과 함께 귀국하였다. 특히 원광은 귀국 후인 608년 수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었다.

 

승려 뿐만 아니라 진평왕 대에 중국 대륙의 통일 왕조와의 사신 왕래도 빈번하였다.

 

594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隋)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이후 왕은 596년, 602년, 604년, 611년 4차례에 걸쳐 수나라에 토산품을 진상하였다.

 

특히 611년에는 수나라에 병력을 요청하였는데, 실제로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군을 파견하였다.

 

이후 613년 7월, 수 양제가 사신 왕세의(王世儀)를 보냈다. 원광 등이 사신 일행을 황룡사에 모셔 법회를 가졌다.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왕조가 바뀐 이후에도 교류는 계속되었다.

 

621년 7월, 수나라 대신 중국 대륙을 장악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물건을 바치자 이에 당 고조가 조서와 비단, 예술품으로 답례하였다.

 

3년 뒤인 624년 3월에는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했다.

 

이후 진평왕은 625년, 626년, 627년(2회), 629년, 631년 총 6회에 걸쳐 당나라에 토산품을 진상하고, 고구려가 침략하지 못해 도와줄 것을 청원하였다. 실제로 625년 당 태종에게 고구려가 조공길을 막고 있다고 호소하자, 당 태종이 영류왕에게 일러 양국이 서로 화친하게 되었다.

 

말년

630년에는 대궁 뜰이 갈라지는 일이 있었다.

 

631년 2월에는 흰 개가 궁궐 담장에 올라가는 일이 벌어지더니, 5월에 이찬 칠숙(柒宿)이 아찬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반란을 미리 알아채고 칠숙과 석품을 처형하였다. 이후에도 흰 무지개가 궁궐 우물에 들어가고, 토성이 달을 침범하는 일이 벌어졌다. 7월에는 당나라에 미녀 두 명을 바쳤으나 당 태종은 두 여인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을 염려하여 돌려보냈다.

 

삼국사기는 고기(古記)를 인용하며, 632년 정월에 왕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631년에 왕이 죽었다는 신당서자치통감의 기록을 함께 전하고 있다.

 

재위 54년 만에 왕이 죽자 한지(漢只)에 장사지냈고 당나라 태종(太宗)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 왕의 장녀 덕만이 왕위를 계승해 선덕여왕이 되었다.

 

일화

왕의 옥대

삼국유사에는 하늘이 내려준 진평왕의 옥대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즉위 원년인 579년,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상제의 하사품이라며 옥대를 주었다. 이후 왕은 천지신령 혹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항상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 이 옥대는 황룡사 구층탑, 황룡사 장륙존상과 함께 신라의 3대 보물로 알려졌다.

 

이후 신라가 망한 뒤 경순왕고려 태조에게 이 옥대를 바쳤다. 장식이 62개나 있었다고 한다.

 

비형랑

비형랑(鼻荊郞)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녀(桃花女)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어느 날 진평왕은 비형랑을 불러 궁중에 살게 하고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밤마다 궁궐을 빠져 나가 밖에서 놀았다. 이에 왕은 병사들을 파견해 지켜보게 하니, 비형랑은 귀신과 놀고 있었다. 이에 왕이 비형랑을 시켜 강에 다리를 놓게 하니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완성되었다.

 

하루는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묻기를,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했다. 이에 비형랑은 길달(吉達)을 추천하였다. 당시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어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가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