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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7 : 신라의 역사 36 (제25대 진지왕)

두바퀴인생 2011. 1. 26. 01:24

 

 

 

 

한국의 역사 137 : 신라의 역사 36 (제25대 진지왕)

 

 

제 25대 진지왕

진지왕(眞智王, ? ~ 579년 음력 7월 17일, 재위: 576년~579년)은 신라의 제25대 임금이다. 휘는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나 장남인 동륜태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대신 즉위했다. 어머니는 사도왕후(思道王后), 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능은 경주(慶州)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

 

치세

즉위와 동시에 이찬 거칠부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이듬해에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드렸다. 재위 3년(578년) 7월에는 남조의 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백제와는 대결 양상을 이어갔다.

 

재위 2년인 577년 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이에 왕은 이찬 세종(世宗)을 파견하여 물리치고,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고, 579년 봄에는 백제가 웅현성(熊峴城),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내리서성 등의 길을 끊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17일, 왕이 죽고,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야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즉위한 지 4년 째 되던 해에 정사가 어지럽고 문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하였다. 폐위되기 직전 진지왕은 도화녀(桃花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화녀가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2년 뒤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둘이 관계를 맺었고, 도화녀는 이후 비형랑을 낳았다. 이후 비형랑은 진평왕 대에 관리로 등용된다.

 

한편, 위서 논란이 있는 야사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을 왕후로 만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과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던 것 때문에 미실사도태후가 결의하여, 노리부를 앞세워 폐위시켰다고 한다.

 

가계

 

참고

 

 

 

 

제25대 진지왕실록

(? ~ 서기 579년, 재위기간: 서기 576년 8월~579년 7월, 2년 11개월)

 

1. 허수아비 왕 진지왕의 타락한 삶과 비참한 죽음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이며, 지소태후의 사녀 숙명공주 소생이다. 이름은 금륜 또는 사륜이라 하였고, 진흥왕 33년에 태자 동륜이 야밤에 월담하다가 개에 물려 죽는 바람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576년 8월 진흥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진지왕의 어머니 숙명공주는 모후 지소태후의 중용으로 어린 나이에 씨 다른 오빠인 진흥왕과 결혼하였으나, 서로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숙명은 풍월주 위화랑의 아들 이화랑을 좋아하였고, 왕비 신분으로 그와 자주 사통하였다. 그러다가 아이를 임신하여 이화랑과 달아나기에 이러렀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소생인 금륜도 진흥왕의 자식이 아닐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왕권은 섭정인 지소태후가 장악하고 있었고, 그녀는 숙명의 아들인 금륜을 태자에 앉히려 했다. 비록 진흥왕은 정비 사도왕후 소생인 동륜을 태자에 책봉하고자 했으나 지소태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태자 자리는 거의 금륜에게 돌아갈 형국이었는데, 숙명과 이화랑이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 일로 태자 자리는 진흥왕의 뜻대로 동륜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동륜은 예기치 못한 일로 목숨을 잃는다. 당시 신라 사회에는 색공(色供)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유부녀나 처녀에 관계없이 여자가 귀족이나 왕에게 색사로 봉사하는 일이었다. 진흥왕에게도 색공을 드리는 미실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가무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하여 많은 남자의 눈을 사로 잡았다. 태자 동륜도 아버지의 색공녀인 미실과 관계하면서 색에 빠져 있었다.

 

동륜의 정비는 외조부 김입종이 첩에게서 얻은 딸 만호였다. 하지만 동륜은 만호에게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낭도들과 어울려 다니며 색을 즐겼다. 그러다가 미실과도 관계하게 되는데, 이후 미실에게 푹 빠져 버린다. 미실은 동륜을 크게 원하지도 않았으나 동륜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와 계속 관계하게 되었다.

 

 

 

 

 

동륜과 미실을 맺어준 사람은 엉뚱하게도 동륜의 어머니 사도왕비였다. 심지어 사도는 미실에게 동륜과 관계하여 자식을 얻으면 태자빈을 내쫓고 그녀를 태자빈으로 삼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그러나 미실은 동륜을 싫어한 나머지 자기가 거느린 유화들 중에서 인물이 출중한 아이를 뽑아 동륜과 관계하게 하였다. 이에 동륜은 여러 여자와 색을 즐기며 지냈는데, 진흥왕의 또다른 색공녀인 보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밤이면 몰래 보명이 거쳐하는 보명궁을 넘나들다가, 어느날 보명궁을 지키던 큰 개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렇게 동륜이 갑자기 죽자 태자 자리는 금륜에게 돌아왔고, 진흥왕이 죽자 금륜이 마침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금륜이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왕권은 모두 사도태후와 진흥왕의 애첩 미실이 장악하고 있었다. 진흥왕은 색을 너무 탐한 나머지 그것이 원인이 되어 마흔세 살에 중풍으로 죽는다. 그러나 사도태후는 미실과 진흥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금륜으로 하여금 미실과 정을 통하도록 한다음 금륜에게 진흥왕의 죽음을 알리고 금륜이 왕위에 오른 다음에 미실을 왕후에 봉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금륜은 사도태후의 요구를 받아들여 왕위에 올랐다.

 

진지왕의 즉위 과정이 이렇다 보니, 즉위 이후에도 왕권은 사도태후와 미실이 장악하였다. 사도태후는 세간에 명망이 있던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세워 내정을 맡기고, 이사부의 아들 세종에게 외치를 맡겼다. 두 사람의 활약 덕분에 내외의 정사는 비교적 안정을 누릴 수가 있었다.

 

세종은 577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자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파하고 적군 3천 7백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 이듬해 7월에는 백제의 알야산성을 점령했다. 579년 2월에는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하기도 했다.

 

진지왕도 색욕이 대단하였는데, 단순히 궁궐의 잉첩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미모가 출중한 여자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그 대상이 민가의 아낙이던 어린 소녀든 가리지 않고 불러 관계를 요구하였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도화랑 이야기도 이와 관련이 있다. 도화랑은 사량부의 여자로 처녀 때부터 자색이 곱고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진지왕이 즉위 할 무렵에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런대도 진지왕은 그녀를 불러 관계를 요구하자 도화랑은 목숨이 달아나도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고 버텼다. 이에 진지왕은 그러면 남편이 없다면 자신과 관계하겠느냐고 하자 그렇다고 하였다. 결국 진지왕은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녀를 범하였는데, 이에 태어난 아이가 비형이라는 인물이다.

 

이렇듯 진지왕은 황음을 일삼으면서, 사도태후와 미실의 말을 듣지 않자, 그들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으로 세웠다.

 

그후 진지왕은 별궁에 유폐되어 지내다가 죽으니, 이때가 579년 7월 17일이다.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이 폐위와 동시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화랑세기>에는 폐위 후 3년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지왕은 즉위와 동시에 폐위되고 왕권은 사도태후의 섭정으로 유지되었다는 뜻이 된다. 어느 기록이 더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다.

 

2. 진지왕의 가족들

진지왕의 정비는 지도부인 박씨다. 그녀는 아들 용수와 용춘을 낳았다. 또 도화랑과 관계하여 아들 비형을 낳았다.

 

지도부인 박씨(생몰년 미상)

지도부인은 기오공의 딸이며, 기오는 소지왕의 왕비 선혜왕후의 사자(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다. 기오는 진흥왕의 왕비 사도부인의 자매인 흥도낭주와 결혼하여 지도부인을 낳았다.

 

지도부인은 원래 진흥왕과 사도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동륜태자와 결혼하였으나, 동륜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금륜(진지왕)과 서로 사통하였다. 태자 동륜이 죽고 금륜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왕후에 오르기 전에 이미 그녀는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장남 용수다. 그리고 왕후에 오른 후에 아들을 하나 더 낳으니, 그가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이다.

 

그후 진지왕이 황음을 일삼고 국정을 도외시하여 사도태후와 미실에 의해 쫓겨나 죽자, 이번에는 신왕인 진평왕을 섬기게 되었다. 이때 진평왕은 그녀보다 함참 어린 열세 살의 소년에 불과했다.

 

용수(생물년 미상)

용수는 지도부인의 아들이다. 그녀가 동륜의 태자빈으로 있을 때 용수를 잉태하였으나, 당시 그녀는 금륜과도 관계하였기에 용수가 누구의 아들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성장한 뒤에 천화공주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진평왕과 그의 왕비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천명공주(선덕여왕의 언니)와 결혼하면서 그는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이때 첯 부인이었던 천화공주는 아우 용춘에게 재가하였다.

 

      

 

원래 천명공주는 용수의 아우 용춘을 좋아했는데, 마야부인이 딸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해 용수와 그녀를 결혼시켰다. 그래서 천명은 용수와 결혼 후에도 늘 용춘에게 마음을 뒀다.

 

용수가 그런 천명의 속내를 읽고 부마의 자리를 용춘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용춘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용수는 천명이 자기에게 마음이 없음을 알고, 늘 병을 핑계로 용춘에게 천명공주와 가까이 지내도록 했다. 한편, 천명의 마음을 안 마야왕후는 어느 날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용춘을 불러, 천명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천명과 용수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원해 졌다. 결국 용수는 죽음이 임박하자 그의 아우 용춘에게 천명과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들 춘추를 부탁한다. 용춘은 용수의 유언을 받아들여 천명을 아내로 맞이하고, 춘추를 아들로 삼는다.

 

용춘(578~647년)

용춘은 578년(진지왕 3년)에 진지왕과 지도부인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진지왕이 죽은 뒤, 지도부인이 신왕인 진평왕을 섬겼기 때문에 그는 진평왕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랐다. 진평왕은 그런 용춘을 불쌍히 여겨 아끼고 총애하였다.

 

그는 성장하여 소년이 되었을 때, 화랑의 제8대 풍월주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  서출 동생이 비형과 낭도를 모았고,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의 양보에 힘입어 제13대 풍월주 자리에 올랐다.

 

 

 

 

풍월주에 오른 뒤에 그는 화랑의 인재 등용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골품에 관계없이 인재를 뽑았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 일자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골품이란 것은 왕의 신위를 구분하는 것이다. 낭도에게 골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의 원칙이다."

 

그의 이런 가치관은 스승 문노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풍월주로 있던 시절에는 평민 출신의 낭도들 중에 낭두의 지위에 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또 그는 풍월주에서 물러난 뒤에 조정에 등용되자, 평민 출신의 낭도들을 여러 명 등용하기도 했다.

 

그무렵, 진평왕은 왕위를 둘째 딸 덕만공주(선덕왕)에게 물려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큰 딸 천명에게 그 권리를 양보하도록 권고했다. 천명이 진평왕의 제의를 수용하여 궁궐에서 물러나 생활하자, 덕만은 용춘이 자신을 보필하도록 해 달라고 진평왕에게 청했다. 진평왕은 덕만의 청을 받아들여 용춘으로 하여금 덕만을 섬기도록 했다. 용춘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진평왕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받아 들였다.

 

그러나 덕만은 용춘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했다. 용춘이 이를 핑계 삼아 궁궐에서 물러나려 하자 진평왕이 허락하였다.

 

용춘이 궁궐에서 물러나자 진평왕은 그의 형 용수로 하여금 덕만을 보필하도록 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식은 생기지 않았다.

 

진평왕이 죽은 뒤 덕만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다시 용춘을 불러 남편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식이 생기지 않자, 용춘은 불러날 것을 청하였다. 결국 선덕왕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궁궐 밖에서 살게 하였다. 용춘은 용수의 유언대로 천명을 처로 삼고 그녀의 아들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

 

용춘은 적자는 얻지 못하고 서자 다섯과 딸 다섯을 얻었다. 다섯 딸 모두 호명궁주 소생인데, 그녀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만년에 천명과 호명 양 궁주와 더불어 산궁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비형(579~?)

진지왕이 민가의 절세미인 유부녀인 도화랑과 관계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비형이다.

 

비형이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그를 궁궐로 데려다 길렀다. 그리고 열다섯 살에 집사 벼슬을 내렸다. 비형은 밤마다 궁궐을 빠져나가 귀신들과 벗하여 놀았다고 한다. 그가 벗한 귀신들 중 하나인 길달을 조정에 등용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비형이 벗한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산에 묻혀 도를 닦던 야인들이었던 것 같다.

 

비형은 이복 형 용춘과 함께 화랑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그는 용춘을 도와 낭도를 모으고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자세한 삶은 전해지지 않는다.

 

 

 

 

 

 

TV 역사 드라마의 역사 왜곡

 

아래는 얼마전 TV에서 방영된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에 대한 평이다. 역사 드라마가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며 흥미와 재미위주로 방영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한 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잘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이나 청소년들은 이 드라마 내용이 역사의 진실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혼녀인 여자 탈랜트 고현정이 미실로 나오면서 일약 스타로 부상하였다. 드라마가 재미를 더하면서 그녀의 연기가 여론을 타고 호도되기 시작하였고 그해 년말 연기 대상도 거머쥐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스타 만들기는 방송사의 PD, 작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타고난 스타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장기간 다양한 연기를 통해서 입증된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시청율이 높으면 그 연기자는 스타가 되는 현실이다. 무명의 탈랜트 수아가 명성왕후에 등장하면서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오르듯이... 그녀들이 왜 갑자기 스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만들어지는 한국의 스타들...

 


미실’이 쿠데타?… “창작 넘어 역사오도”

역사왜곡 한계 어디까지… 드라마 ‘선덕여왕’시끌
사극의 재미와 시청률을 위한 역사 왜곡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MBC TV의 인기 드라마 ‘선덕여왕’이 얼마전 ‘미실의 난’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시청률이 40%대로 솟구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드라마가 작가적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어디까지 재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역사학계는 물론 일반 시청자들 사이에서 새삼 일고 있다. 드라마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극적 장치가 필요하기는 해도 방송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지나친 허구의 부정적 영향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문제는 ‘미실의 난’이 정사와 야사를 통틀어 어디에서도 근거나 개연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지난번 방영된 ‘미실의 난’은 덕만공주(이요원)와 비(非) 성골인 김춘추(유승호)의 대권 도전에 자극받은 미실(고현정)이 쿠데타를 통해 서라벌과 왕궁을 장악하는 내용을 다뤘다.

미실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 연구자인 역사학자 이종욱 서강대 총장은 “미실은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여자가 아니다”며 "창작 드라마가 역사관과 역사의식을 완전히 오도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노년의 미실은 자신의 영달보다 자손의 출세에 매달린 것으로 ‘화랑세기’에 소개된다. 이 총장은 “선덕여왕 즉위는 아버지 진평왕이 결정했는데 드라마는 진평왕을 바보로 만들어놨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에서 진평왕은 미실에 의해 농락당하다가 쿠데타로 연금당하는 허수아비 왕으로 묘사된다.

‘화랑세기’에서 덕만의 라이벌은 미실이 아니라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수와 덕만의 계모인 승만왕후 모자이며 덕만은 용수와 타협하고 승만왕후와 권력투쟁을 벌여 승만왕후의 아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가 역사학계로부터 위작(僞作)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드라마 ‘선덕여왕’은 단순한 역사왜곡 차원을 넘어선 ‘창작’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지나친 현실정치의 반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미실의 난’에서 화백회의가 쿠데타 세력에 유린당하는 장면은 요즘의 난장판 국회를 재현했고  귀족들의 도박판은 현대 카지노를 방불케 했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문원씨는 “최근 방영 내용은 역사에 전혀 없는 허구이며 통째로 현실정치에 대한 은유로 채우고 있다”며 “단순히 현실정치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편향마저 느끼게 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씨는 “최근 학교 수업에서 역사 비중이 낮아지면서 상당수 젊은이들이 사극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 있다”며 “공공재인 지상파 방송에서의 지나친 역사 왜곡은 공영방송의 책임의식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