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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6 : 신라의 약사 35 (진흥왕 시대 인물들)

두바퀴인생 2011. 1. 25. 08:19

 

 

 

한국의 역사 136 : 신라의 역사 35 (진흥왕 시대 인물들)

 

 

 

박이사부

이사부는 태종 또는 이종으로도 불렀다. 삼국사기에는 주로 향찰식 이름인 이사부를 앞세우고 태종이라고 불리었다고 쓰고 있고, 내물왕 4세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종으로 쓰고 박씨 성을 쓴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한자식 이름인 태종으로만 쓰고 있고, 성씨에 대한 언급은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내물왕의 후손이면 당연히 그의 성은 김씨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내물왕의 외손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신라에서는 외가와 친가 중에서 명분을 내세우기에 좋은 가문을 앞세웠기 때문에 내물왕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김유신이 가야 왕족이라는 사실보다도 만호태후의 외손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풍월주가 된 것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따라서 이사부의 성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박씨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사부는 지증왕 6년에 주의 장관을 군주로 삼을 때, 최초로 실직주 군주가 되었다. 그 후 지증왕은 13년에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가 정계에 거두로 등장한 것은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였다.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은 섭정인 지소태후가 모두 장악했는데, 지소태후는 이사부를 몹시 좋아했다. 그래서 지소태후는 이사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둘 사이에 사랑이 넘쳐 자식도 여럿 생겼다. 말하자면 이사부는 진흥왕의 양부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당시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유언으로 박영실을 계부로 맞아들였으나, 그녀는 영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사부를 사랑하여 그와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1남 3녀 였는데, 아들은 세종이며, 딸은 황화, 숙명,송화 등이었다. 이 중에서 숙명은 지소태후의 권고로 오빠인 진흥왕의 후비가 되었다.

 

이런 까닭에 이사부는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고, 진흥왕 2년에 초대 병부령에 임명되어 병권을 장악했으며, 11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놓고 싸우다가 지친 틈을 이용하여 두 성을 모두 장악하는 큰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참으로 영악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는 재상의 직위에 올랐고, 진흥왕 23년 9월에는 가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사다함과 같이 출전하여 평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강직하고 공평무사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학문과 역사, 병법에 두루 밝아 진흥왕 6년에는 역사서 편찬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 진흥왕 대에 군사, 문학, 학문 등 여러 방면에서 큰 치적을 남겼다.

 

정재진 판사가 쓴 장편소설 '소설 이사부'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이사부에 대해서 우산국을 정복한 신라 장군이라는 것 이상을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미실의 시아버지라는 것도, 신라 불교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과 적어도 삼촌지간이라는 것도, 병부령으로서 신라의 영토를 함경도와 한강 유역까지 넓히고 대가야를 정벌하였던 장군, 그리고 일곱 살에 즉위한 진흥왕을 모시고 신라 최고의 왕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의 오랜 연인이었다는 것도, 최초로 화랑제도를 만들고 거칠부를 통해 신라 국사를 편찬했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이사부에 대해 겨우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데도 나는 감히 그가 김유신을 넘어서는 신라 최고의 영웅이라 믿게 되었다. 비록 삼한 통일의 결실은 김유신이 수확하였으나 그 이전에 황무지를 개척해서 통일의 씨를 뿌리고 비바람 속에서 치열하게 옥토를 넓혀 간 인물은 바로 이사부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김거칠부

거칠부는 황종이라고도 불렀다. 황종은 향찰식 이름인 거칠부에 대한 한자식 이름으로 뜻은 동일하다. 내물왕 5세 후손이며. 조부는 앙숙 각간이요 아버지는 물력 이찬이다.

 

그는 젊었을 때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람했는데, 그때 고구려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구려 사정을 알고 싶어 국경을 넘었고, 법사 혜량을 찿아가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간 강론을 들었는데, 하루는 혜량이 그를 불렀다. 혜량은 그가 신라 사람임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잡힐까 염려되어 하는 소리이니 빨리 돌아가라."

 

그 말을 듣고 거칠부가 돌아갈 채비를 하자, 혜량이 몇 마디 덧붙엿다.

 

"상을 보니, 그대는 앞으로 장수가 될 것이다. 후일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내게 해를 끼치지 말라."

 

거칠부는 혜량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져 귀국하여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대아찬 벼슬에 있을 때, 이사부의 제안으로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고, 그 일을 주도했다.

 

국사 편찬이 끝나자, 그는 그 공으로 파진찬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진흥왕 12년에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전했다. 이 싸움에서 백제가 앞장서서 평양으로 진격하고, 거칠부는 고현을 포함하여 열 개 군을 빼앗았다.

 

이때 혜량이 무리를 이끌고 길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그를 알아보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말했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니 무엇으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혜량이 대답했다.

 

"지금 고구려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자네의 나라로 나를 대려 가 주게." 

 

이에 거칠부는 헤량을 말에 태워 귀국하여 진흥왕에게 배알시키니, 왕이 혜량의 도가 깊음을 알고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를열고 팔관법을 실시하였다.

 

이후 거칠부는 승진을 거듭하여 진지와 원년에는 사도태후와 미실의 천거로 상대등에 올라 국사를 도맡았다. 진지왕이 사도태후에 의해 쫓겨나고, 진평왕이 즉위한 뒤에도 그는 상대등의 위치에 있었으나 진평왕 즉위 1개월 만에 상대등이 노리부로 교체된 것으로 보아, 이 때 노환으로 죽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