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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5 : 신라의 역사 34 (제24대 진흥왕)

두바퀴인생 2011. 1. 24. 02:08

 

 

한국의 역사 135 : 신라의 역사 34 (제24대 진흥왕)

 

제24대 진흥왕

진흥왕(眞興王, 534년~576년, 재위: 540년~576년)은 신라의 제24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 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의 아들이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생애

 

 

7세에 법흥왕의 양위로 왕이 되었는데, 즉위 당시에는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고 팔관회를 두었다. 가야 사람인 우륵이 신라에 악을 보급하였다. 553년, 황룡사를 창건했다.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았는데, 이에 백제 성왕이 분하게 여겨 쳐들어온 것을 크게 격파하였다. 562년,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568년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으며, 572년에 다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576년, 원화(源花) 제도를 만들어 남모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花郞)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576년(진흥왕 37년), 43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참고로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

551년 나제 동맹 신라,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을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이후 백제 성왕은 다시 신라을 공격하다가, 신라 병사에게 참수되었고,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가계

 

참고

 

 

제24대 진흥왕 실록 

(서기 534 ~ 576년, 재위 서기 540년 7월~ 576년 8월,  36년 1개월)

 

1. 불법의 전도사 진흥왕과 신라의 무서운 성장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이며,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삼맥종이다. 534년에 태어났으며, 일곱 살이 되던 540년 7월 법흥왕이 죽자 모후 지소의 섭정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법흥왕은 정비 보도부인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고, 후비 옥진궁주와 보과부인에게서 각각 비대와 모랑을 얻었다. 법흥왕은 이 두사람 중에서 비대를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비대의 외조부인 위화랑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대는 위화랑의 딸 옥진궁주에게서 태어났는데, 옥진은 소지왕의 왕비 선혜와 묘심이 사통하여 낳은 오도의 딸이다. 묘심은 골품이 없던 자라 옥진 또한 골품이 없었다. 위화랑은 그런 사실을 피력하여 법흥왕의 뜻을 꺽었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비대의 왕위 계승을 앞장서서 반대한 사람은 위화랑이었으나, 실제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법흥왕의 딸 지소였다. 그녀는 비록 딸이었으나,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다. 또한 또 한 명의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는 그녀의 남편인 법흥왕의 동복 아우 입종이었다. 따라서 설사 지소가 여자라는 이유로 왕위를 잇지 못하더라도 그녀와 입종 사이에서 태어난 삼맥종에게 왕위를 계승할 명분은 충분했다. 지소는 그런 명분을 바탕으로 공평무사한 성격이었던 위화랑을 충동질하였고, 결국 왕위는 그녀의 아들 삼맥종이 차지했다.

 

진흥왕이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한 사람은 지소태후였다. 따라서 진흥왕 재위 초기 10여 년은 지소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섭정에 오른 지소태후는 즉위와 동시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각 문무관들의 직위를 한 급씩 올려주는 선심책을 구사했다. 그리고 곧 실시한 정책이 인재양성책이었다.

 

당시 신라 사회는 명망 있는 귀족 출신의 남녀들이 휘하에 여러 젊은 남자들을 거느리는 사조직이 유행했다. 지소태후는 이런 형태의 조직을 공인하여 인재 양성을 위한 공적인 국가 조직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선화와 원화 제도였다.

 

선화제도는 왕족 출신 남자를 선화로 삼아 그 아래에 여러 낭도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며, 원화는 왕족 출신 여자를 원화로 삼아 그 아래에 여러 낭도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속한 낭도들은 대개 귀족의 자제들이었는데, 지소태후는 이들 낭도들을 키워 조정의 재목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원화제도 내부에서 알력이 생겨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원화는 폐지되었고, 그 아래 있던 낭도들은 흩어지거나 선화에 합쳐졌는데, 이것이 화랑제도의 시초이다. 화랑의 원래 이름은 풍월이었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다. 그런데 초대 풍월주가 위화랑이었던 까닦에 우두머리를 화랑이라 부르고, 그 무리를 화랑도라고 칭했다.

 

지소태후는 541년 3월에 박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겼는데, 이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조치였다. 신라는 전통적으로 귀족 협의체인 화백회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 왔다. 그런데 병권을 병부에 일임하고 병부령에게 그 권한을 맡겼다는 것은 왕이 화백회의를 거치지 않고 군대를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의도는 이미 법흥왕이 재위 4년(517년)에 병부를 설치하면서 드러낸 것이지만 병부만 설치 했을 뿐 그 장관은 임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일종의 행정상의 편의를 위한 조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병부를 설치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병권은 화백회의 의장이자 조정 재상인 상대등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지소태후가 병부령을 임명하고 그에게 중앙과 지방의 병권을 일임함으로써 상대등 및 화백회의는 병권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병부를 직접 부리는 왕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편, 지소태후는 불교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는데, 544년 2월에는 흥륜사를 준공하여 신라 불교의 중심지로 삼았고, 3월에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합법화하였다.  또한 중국 남조에 부처님 사리를 요청했는데, 549년 봄에 양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승 각덕을 보내 불사리를 가져왔다. 지소태후는 진흥왕과 함께 백관들을 거느리고 나가 그들을 흥륜사 앞 길에서  맞이하였다. 또 565년 9월에는 남조의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왔는데, 그때 불경 1천 7백여 권이 유입되었다.

 

이후 신라 불교는 날로 성장하여 566년에는 지원사와 실제사 두 절을 지었고, 황룡사도 준공하였다. 진흥왕은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그 터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궁궐을 고쳐 절을 짓게 했다. 이 절이 바로 황룡사다. 이후 13년 동안 공사를 지속하여 566년에야 준공하였다. 573년에는 전쟁에 나가 전사한 사졸들을 위하여 지방에 있는 모든 절에서 7일 동안 팔관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리고 574년에는 황룡사에 장륙상을 주조했는데, 거기에 소요된 구리의 중량이 무려 3만 5천 근이고, 도금한 중량이 1만 1백 98푼이나 되었다. 576년 안흥법사가 중국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서역 승려 비마라 등 두명의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승만경>과 석가 진신사리를 바치기도 하였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시라 불교의 발전은 이렇게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여긴엔 지소태후의 각별한 노력이 있었고, 진흥왕이 그녀를 이어 심혈을 기울인 결과였다. 진흥왕은 어린 시절부터 지소태후와 더불어 불교를 가까이 했고, 자라면서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재위 만년에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었으며, 법운이라는 법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비 사도부인이 승려가 되어 영흥사에서 지낼 정도였으니, 신라 왕실에서 불교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지는 잘 알 수 있다.

 

신라 불교의 발전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지소태후였다. 신라 불교는 이렇듯 왕과 왕실이 이끌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국불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소태후는 역사서 편찬에도 호의적이었다. 545년 7월 이찬 이사부가 국사 편찬을 강력하게 권고하자, 태후는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것이 신라 국사 편찬의 효시가 되었다.

 

신라가 화랑과 불교로써 국력을 다지고 있는 동안, 국제 관계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특히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관계는 이해 관계의 변화에 따라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법흥왕 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조금씩 뒤틀리고 있었는데, 원인은 가야였다. 백제가 임나지역 일부를 장악하여 백제와 가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신라는 어부지리로 가야를 병합하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가야의 왕족 및 귀족들이 대거 신라로 귀부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야 백성들을 의식하여 백제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신라와 백제는 점차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고, 백제는 무령왕을 거쳐 성왕이 즉위했다.

 

성왕은 대단히 현실적인 인물이라 함부로 신라를 자극하지 않았다. 고구려에 등을 지고 있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런 기조에서 성왕은 신라에 541년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이미 백제와 신라는 백제 동성왕 이후 화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가야 문제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법흥왕이 죽자 , 성왕은 그러한 미묘한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친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가야를 이미 장악한 마당에 더 이상 가야 왕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자, 백제의 화친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선뜻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성왕이 회친의 덕을 본 것은 548년 2월 고구려가 동예(한반도 낙랑) 지역 주민들을 앞세워 백제의 독산성(경기 포천)을 공격했을 때였다. 독산성은 한강 이북의 전진기지로 백제에겐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다.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공격으로 독산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성왕은 바로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소태후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장군 주령에게 병력 3천을 주어 백제를 돕도록 했다. 졸지에 뒤에서 적을 맞은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여 많은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

 

이 사건 이후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은 기세를 올려 고구려군을 몰아붙였다. 그래서 550년 정월에는 백제가 한성을 되찿았고,다시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시키는 쾌거를 거뒀다. 그러자 고구려의 양원왕은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이렇듯 양쪽 군대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피로감을 더해가자, 지소는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양쪽 군대를 모두 공격하게 하여 금형과 도살 두 성을 차지하고, 병력 1천을 주둔시켜 버렸다.

 

하지만 성왕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신라의 이런 행동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신라와 감정 싸움을 벌일 여지가 었었던 것이다. 백제와 신라 연합군은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몰아붙였다. 그래서 결국 백제는 고구려의 여섯 군을 차지하였고 신라는 열 개 군을 차지하는 엄청난 개가를 올렸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급습으로 신성이 포위되었고 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를 상대로 장기 전면전을 벌일 처지가 못되어 무작정 퇴각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돌궐군을 물리치는데 역량을 집중하였던 것이며 돌궐이 물러나자, 고구려는 진영을 정비하여 다시 영토 회복 작전에 나섰다.

 

이 무렵, 신라는 은밀히 고구려와 내통하였는데, 고구려군이 밀고 내려오자 신라는 그들과 함께 되레 백제를 공격하였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신라가 야비하게 창날을 돌리자, 백제는 맥없이 무너졌다. 백제가 당황해 하는 사이에 신라군은 지체없이 말을 몰아 한강 이북의 백제 땅을 장악하고 이어 한성도 차지해 버렸다.

 

그럼에도 성왕은 쉽사리 보복전을 전개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신라 왕실을 달래기 위해 자기 딸을 신라에 시집보내는 굴욕적인 조치를 취했다.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겨우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린 성왕은 비통한 심정으로 사비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복수전을 전개할 요량으로 왜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554년 5월 왜의 수군이 백제에 도착하자, 성왕은 가야의 반신라 세력까지 끌여들여 신라 공격을 준비했다. 그때 진흥왕은 이미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해 7월 성왕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공격했다. 신라에선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성왕에 맞서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야 왕자였던 김무력이 한강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병력을 이끌고 백제군을 측면에서 공격하였다.

 

당시 백제 선봉은 태자 위덕이 이끌고 있었다. 성왕은 김무혁이 합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덕이 위축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직접 선봉대에 합류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격려할 요량으로 친위군 50기만 이끌고 밤중에 위덕에게 달려갔다. 신라에선 이미 성왕이 선봉대에 합류할 것을 예상하고 삼년산군의 비장 고간 도도로 하여금 이동로 길목에 복병을 매복시켰다. 성왕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급히 달려가다가 도도의 복병에게 포위되어 잡히게 되었고 도도는 바로 성왕의 목을 쳤다.

 

성왕이 죽자 백제군은 사기가 떨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뒤를 후린 신라군은 약 3만의 백제 병력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백제는 엄청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성왕이 죽은 지 3개월 만에 고구려의 급습을 받아 옛 도읍인 웅진성이 포위되는 지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그런 백제를 바라보면서 불구경하였고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확보한 영토에 주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였다. 555년 9월 비사벌(경남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고(나중에 대야주로 변경), 그해 10월에는 진흥왕이 직접 북한산을 순행하여 순수비를 설치하고 국경을 정하였다. 이듬해 7월에는 비열홀주(함경도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파견하였다. 557년에는 국원(청주)을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고 사찬 기종을 군주로 파견하였다. 또 신주로 삼았던 한강 이북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558년 2월에는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는 사이 이를 갈고 있던 백제는 가야의 잔존 세력을 부추겨 신라를 협공했다. 562년에 신라 변경을 침략하였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가야 왕 도설지가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군에 역공을 당해 1천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으며 가야 반란 세력은 신라 장수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끄는 군사 5천이 공격하자 스스로 겁을 먹고 항복하거나 흩어져 버렸다.

 

진흥왕 대엔 신라 영토가 크게 넓어져 가야 땅을 모두 병합하였고, 옛 동예 땅은 물론 옥저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 결과 신라의 영토는 북으로는 함북의 마운령까지 이르러 한반도 땅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진흥왕은 정치와 문화, 국력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기고 말년에 여색에 빠져 과도하게 기를 소모한 탓인지 576년 8월 마흔 세살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2. 진흥왕의 가족들

진흥왕은 김입종과 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부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고, 사통하여 딸을 하나 얻었다. 그의 정비는 사도부인이며, 후비로 숙명궁주, 백제 성왕의 딸인 소비 부여씨, 가야 이뇌왕의 딸 월화궁주 김씨기 잇다. 사도황후는 동륜태자와 구륜왕자를 낳았으며, 숙명궁주는 금륜(진지왕)을 낳았다. 또 금진과 사통하여 난성공주를 낳았다. 월화궁주는 제17세 풍월주인 염장의 아버지 천주를 낳았다. 하지만 소비 부여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김입종

입종은 지증왕의 아들이며, 연제부인 소생으로 법흥왕의 동복 아우이다. 법흥왕의 딸이자 조카인 지소를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으며, 그녀에게서 삼맥종(진흥왕)을 얻었다. 그는 위화랑과 오도의 둘째 딸 금진과 관계하여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그가 숙흘종이다. 숙흥종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입종은 법흥왕보다 먼저 죽었다. 입종이 죽자, 법흥왕은 혼자 된 딸을 염려하여 박영실을 둘째 남편 (계부)로 삼도록 했다.

 

지소태후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공주이며, 보도부인 박씨 소생이다. 삼촌인 입종에게 시집가 삼맥종을 낳았다. 삼맥종이 입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흥왕 재위 10여 년 동안 정치는 그녀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법흥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총신인 영실공을 계부로 지정하였기에 그녀는 박영실과 부부연을 맺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영실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한 인물은 박이사부(박태종)였는데, 이사부 또한 그녀를 섬기며 관계하였다. 그녀는 이사부와 관계하여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세종이요, 딸은 황화, 숙명, 송화 궁주이다. 또 이화랑과 사통하여 만호 낭주를 낳앗다.

 

이사부는 신하의 신분으로 그녀를 섬기는 입장이엇기 때문에 비록 관계는 하였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가 낳은 아들과 딸들에게도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신하의 입장으로 대해야 했다.

 

지소태후는 이사부와 사이에서 태어난 숙명궁주를 진흥왕의 왕후로 삼길 원했다. 그래서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부인 박씨를 내쫓으려고 했지만, 진흥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햇다.

 

그럼에도 그녀는 진흥왕을 압박하여 숙명궁주와 진흥왕을 결혼시키려 했다. 진흥왕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숙명을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고, 숙명 또한 진흥왕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진흥왕은 지소태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숙명을 왕후로 받아들여야 햇다.

 

숙명이 제2왕후로 된 이후 지소태후는 정비인 사도부인을 쫓아내기 위해서 더욱 거세게 몰아세웠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진흥왕이 가로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도부인과 알력이 생겨 힘겨루기를 하는 양상이 되었다.

 

이렇듯 지소태후는 진흥왕을 압박하여 정치,인사,정책 등 여러 분야를 좌지우지하였다. 그 때문에 왕실은 지소파와 사도파로 양분되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고, 양측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지소태후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립이 진흥왕 말기까지 지속된 점으로 미루어 그녀는 꽤 오래 산 것으로 보인다.

 

사도부인 박씨

사도부인은 박영실과 선혜왕후 소생 오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곱 살이란 어린 나이로 동갑인 진흥왕에게  시집와서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동륜태자와 구륜왕자를 낳았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자신의 계부 영실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영실의 딸인 사도부인도 몹시 싫어했다. 심지어 자신과 이사부 사이에 태어난 숙명궁주를 진흥왕과 결혼시켜 사도부인을 폐하려고 하였으나 진흥왕은 그녀를 사랑하여 결코 내치지를 못하게 하였다.

 

시어머니와 대립각을 세운 상태로 사로 사사건건 시비를 걸게 되자 이는 신라 왕실의 크다란 화근이 되었다. 지소태후의 계열은 진골정통이라고 하였고 사도부인 계열을 대원신통이라고 한다. 이는 왕비를 선택할 때, 처음에는 김알지계와 박혁거세계를 구분한 것을 일컫는데 지소태후와 사도부인의 대립은 이후에도 지소계와 사도계를 구분한 것으로 바뀐 듯하다.

 

지소태후가 죽은 후 사도부인은 막강한 권력을 형성하여 정사를 좌지우지하였다. 당시 진흥왕은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사도부인이 왕을 대신하여 왕권을 행사하였다.

 

사도부인은 진흥왕이 죽은 뒤 숙명궁주의 아들 금륜(진지왕)이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미실과 힘을 합쳐 진지왕을 내쫓고 자기 소생인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으로 세웠다.

 

이렇듯 망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녀도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 그녀는 진평왕 36년 614년에 81세를 일기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