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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3 : 신라의 역사 32 (제22대 지증왕)

두바퀴인생 2011. 1. 22. 02:28

 

 

한국의 역사 133 : 신라의 역사 32 (제22대 지증왕)

 

제22대 지증왕

신라 지증왕(智證王, 437년~514년, 재위: 500년~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왕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

 

생애

마립간의 칭호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금이다.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대로, 지도로, 혹은 지철로라고 한다.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이며 소지 마립간의 재종 아우이다. 부인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이며, 소지 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어 64세에 왕위를 이었다. 514년 죽은 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이때 이후로 신라의 시호법이 시작되었다. 지증왕은 사탁부(沙啄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른 배경은 그의 장남 원종(元宗, 뒤에 법흥왕으로 즉위)이 소지 마립간의 사위인 점이 작용했다. 소지 마립간은 사위인 원종을 염두해 두고 자신의 사촌들을 제치고, 6촌이자 사돈인 그를 왕위 계승자로 내정했던 것이다.

 

502년 순장을 금하고,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503년에 국호를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등에서 “신라”(新羅)로 통일하였다.

 

504년 음력 4월 상복법을 제정하고, 음력 9월에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509년에는 시사(市肆, 혹은 시전)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었다.

 

512년 실직주(悉直州)의 군주이자 이찬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체구가 커서 배우자가 없었던 지증왕에게는 알맞은 배우자가 없었는데 사신을 보내 신라 국내를 수소문하던 중 연제부인(延帝夫人)을 발견하여 배우자로 삼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가계

 

참고

 

 제22대 지증왕 실록

(서기 437~514년, 재위: 서기 500년 11월~ 514년 7월, 13년 8개월)

 

철저한 실천주의자 지증왕과 신라 사회의 제도화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이며, 갈문왕 습보의 아들로서 조생부인 김씨 소생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 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라고 하였다. 갈문왕 습보는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의 아들이다. 또한 조생부인이 눌지왕의 딸이므로 지증왕은 소지왕의 6촌 아우가 된다.

 

500년에 소지왕이 죽었을 때, 지대로의 나이는 예순넷이었다. 따라서 지대로는 서기 437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소지왕이 죽을 당시 지대로는 이미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어 있었다. 당시 신라에는 부군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는 왕이 태자를 얻지 못했을 경우 그 자리를 대신할 인물을 선정하는 제도였다. 말하자면 부군은 왕의 아들이 아니면서 태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왕위 계승권자였다.

 

지증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몇 가지 중요한 정책을 실시했다.

재위 3년인 502년에는 순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순장은 당시로서는 전통적인 풍습이었고, 신분의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례 절차였다. 하지만 이것은 산 사람을 죽은 사람과 같이 묻어 버리는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그럼에도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순장으로 무덤 속에 갇히는 노비의 수로써 신분을 구분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이를 금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 순장했다. 하지만 지증왕은 왕실과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이 풍습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는 또 주주와 군주에게 일일이 명령하여 농사를 권장하도록 지시했다.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가는 경작법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농사법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

 

재위 4년에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증왕의 군주의 칭호도 국제화의 흐름에 맞춰 왕으로 변경하였다. 그때까지 신라는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 등 족장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을 군주의 칭호로 사용했는데, 이때부터 국제어인 왕으로 확정하였다.

 

재위 5년엔 상복법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시행했다. 그때까지 신라는 지방마다 풍습이 달라 상례의 절차가 일원화되지 않아 상복도 제각각이었다. 그때문에 왕실의 상례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상례 절차를 통일하였던 것이다.

 

재위 6년 봄에는 전국의 주와 군의 경계를 확정하고 군의 수령을 군주로 삼아 군주라는 용어로 통일하였고, 처음으로 군주의 칭호를 쓴 사람은 울릉도를 복속시킨 것으로 유명한 박이사부(혹은 태종)였다. 지증왕은 실직주를 설치하고 그를 초대 실직 군주로 삼았다.

 

그해 11월 석빙고를 관리하는 소관부서를 설치하고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으며, 석빙고가 처음 설치된 것은 제3대 유리왕 때였으나, 그 이후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증왕은 석빙고를 관장하는 부서를 따로 두고 운영하게 하였다.

 

이때 지증왕은 선박의 이용에 관한 법을 만들어 그 운영 방식을 제도화하기도 하였다. 이때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해운업이 하나의 제도 속으로 편입된 것이다.

 

재위 10년 정월에는 경주에 동시장을 설치하였는데, 경주에 시장이 처음 설치된 것은 소지왕 12년이었다. 당시 소지왕은 도성에 시장을 열어 전국의 물자를 유통시키는 중심으로 삼고자 했는데, 그 규모가 날로 커져 이 시장 하나로만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물자를 다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때와서 시장을 하나 더 연 것이 동시장이다.

 

그해 3월에는 울타리와 함정을 만들어 맹수의 피해를 없애는 데 주력했다. 당시에는 곰이나 호랑이, 늑대 같은 맹수들이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았다. 지증왕은 집집마다 울타리를 치고, 산 어귀에 함정을 만들어 그 피해를 최소화 하고자 했다.

 

재위 15년 정월에는 아시촌(경남 함안)에 소경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와 이곳에 거주토록 하였다.

 

아시촌은 지금의 경남 함안 지역인데, 이곳은 원래 아라가야 땅으로 당시에는 흔히 임나로 불리었다. 임나는 함안을 중심으로 해서 남서쪽으로 섬진강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백제의 동성왕이 488년에 섬진강 주변의 임나 땅을 강제로 병합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일로 백제와 가야는 크게 대립하였고, 결국 가야는 백제와 등지고 신라에 의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어부지리로 아라가야 땅의 상당 부분을 영토로 편입하게 된다. 지증왕이 함안 지역에 소경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이주시킨 것은 그곳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여기엔 신라에 의존하여 가야를 유지시키려던 금관가야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행적적인 조치 이외에 지증왕 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 박이사부의 울릉도 복속이다. 처음 실직주 군주로 있던 박이사부는 지증왕 13년에 하슬라(강릉)주 군주가 되었다. 이때 그는 명주의 동쪽 바다에 있는 우산국이 험준한 바다와 지세를 믿고 신라에 항복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겼다. 하지만 우산국 백성들은 거칠고 사나운 기세를 가졌기에 쉽게 항복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에 박이사부는 한가지 꾀를 냈는데, 나무로 만든 험상굿은 얼굴의 맹수 모습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여러 배에 싣고 우산국 해안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너희들을 모두 밟아 죽이게 하겠다."

 

그러자 우산국 백성들이 그 소리에 겁을 먹고 곧 항복하여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때 박이사부가 만든 허수아비는 험악하게 생긴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지증왕 시대의 정책은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했다. 그는 제반 문제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여들여 제도화함으로써 국가 기강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그가 어떤 문제를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는 실천주의자였음을 알려 준다. 지증왕이 이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위 동안 비교적 천재지변이 적었고, 전쟁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 업적을 남긴 그는 재위 15년인 514년 7월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묘호는 지증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신라에 시호법이 사용되었다. 지증왕 대부터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마립간이란 칭호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지증왕의 가족 중 왕비는 연제부인, 그녀의 소생으로 원종과 입종 두 아들이 있다. 원종은 지증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법흥왕이며, 입종은 법흥왕을 이어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의 아버지다.

 

삼국유사의 연제부인을 만나게 된 과정을 기록하였는데 아래와 같다.

 

연재부인은 기형적으로 키가 큰 여인으로 사실 왕비가 될 체격 조건을 갖추지를 못햇다. 대단한 체구의 거구였던 지증왕은 생식기가 굉장히 컸던 모양이다. 그의 생식기는 1자 5치로 약 45센티미터 정도였는데, 이 때문에 웬만한 여자는 그와 관계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필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던 중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아내될 만한 여자를 물색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배필을 구하려 나갔던 사람이 모량부 동로수 나무 아래에서 엄청난 크기의 큰 똥 덩어리를 보았다. 똥덩어리가 얼마나 컸던지 북 크기만 하였는데, 개 두 마리가 서로 끝을 물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수모문하여 그 똥의 임자를 찿았다.  그러자 웬 계집아이 하나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을 재상댁 따님이 여기 와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똥이외다."

 

그래서 그는 재상집을 찿아갔다. 그리고 그 딸을 보니 키가 자그만치 7척 5치나 되었다. 요즘 수치로 하면 대략 2미터 25센티미터 정도의 엄청난 거인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지증왕은 그녀에게 수레를 보내 혼인을 청하고 궁중으로 맞아들이니, 그녀가 법흥왕의 어머니 연제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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