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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1 : 신라의 역사 30 (제21대 소지왕 1) 본문
한국의 역사 131 : 신라의 역사 30 (제21대 소지왕 1)
제21대 소지왕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 ~500년, 재위; 479년~500년)은 신라의 제21대 왕이다. 조지(照知) 마립간 또는 비처(毗處)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만,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佛經)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자비 마립간과 서불한 미사흔의 딸 김씨의 장자이며, 왕비 선혜부인은 이벌찬 내숙의 딸이다.
생애
이후 신라는 전쟁준비에 들어가 481년 음력 2월 마립간이 비열성에 행차, 군사를 정비했다.
음력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북쪽 변경을 침입, 호명성 및 일곱 성을 빼앗고 미질부로 진군했다.
신라는 백제와 가야에 원군을 요청, 고구려와 말갈을 막아내, 퇴각하는 것을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를 베었다.
그 후 482년 음력 5월에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다.
소지 마립간 치세에는 자연재해가 잦았는데,
480년 음력 5월 가뭄과 음력 10월의 기아,
482년 음력 2월의 폭풍 및 금성의 화재, 음력 4월의 폭우,
483년 음력 4월과 음력 7월에 홍수, 음력 11월 우레와 전염병 등이 계속 기록되어 있다.
자연재해가 계속된 직후 마립간은 오함이라는 자를 새로 이벌찬으로 삼는 등 인사 개편에 나서는 듯하였으나
484년 음력 7월 고구려가 다시 북쪽을 침공, 백제군과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크게 쳐부쉈다.
485년 음력 2월에는 구벌성을 쌓아 군사를 정비하고,
486년 정월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일선 지역의 장정 3천을 징발해 삼년산성과 굴산산성을 고쳐 쌓았다. 음력 4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고, 침입을 막아낸 음력 8월 낭산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계속된 외침과 자연재해의 수습을 끝낸 소지마립간은 나을신궁의 건설을 시작, 497년 음력 2월 끝냈다. 나을은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이 처음 태어난 곳이라 한다.
음력 3월에는 곳곳 관부에 명해 도로를 수리하게 하고 음력 7월에 월성을 보수했다. 그러나 이해 음력 10월 또다시 우레가 있었다.
488년 정월, 마립간은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음력 2월 일선군에 행차해 빈민을 구제하고, 음력 3월에 돌아오면서 지나는 주군의 죄수들을 2대 사형죄를 제하고는 용서했다.
489년 정월에는 하는 일 없는 백성들을 몰아다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실업자 대책이다.
489년 음력 9월 고구려가 북쪽을 다시 침범했고, 음력 10월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490년 음력 2월 비라성을 재건, 국방을 손보고 음력 3월에 수도에 시장을 개설,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는데 이는 역시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경제진흥책이다.
493년 음력 3월 백제의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해 음력 7월에는 해안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 왜로부터의 방비를 강화했다.
495년 음력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해 원군을 청해오자,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이에 496년 음력 7월 고구려군이 다시 신라의 우산성을 쳤는데, 장군 실죽이 나가 맞아 싸웠다.
497년 음력 4월 왜, 음력 8월에 고구려가 다시금 잇따라 침공, 고구려군이 결국 우산성을 점령했다.
500년 마립간이 날기군에 행차해 벽화부인을 아내로 얻었다. 이해 음력 11월 죽었다.
참고
가계
제21대 소지왕 실록
(?~ 서기 500년, 재위: 서기 479년 2월~ 500년 11월, 21년 9개월)
시련을 먹고 자라는 성군 소지왕과 결혼 동맹
소지왕은 비처왕이라고도 불렸으며, 자비왕의 셋째 아들로 미사흔의 딸 김씨 소생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효성스럽고 겸손하여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여 성인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479년 2월 부왕 자비가 죽자, 왕위에 오른 그는 우선 대사면령을 내리고 많은 죄수들을 석방하였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그러나 이런 선심책에도 불구하고 그는 즉위 초부터 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를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크게 두 가지 였는데, 첯째는 천재지변이고, 둘째는 고구려와 말갈 등의 침입이었다.
그의 첯 시련은 즉위 이듬해인 480년 봄부터 시작된 가믐이었다. 초봄부터 시작된 가믐은 여름까지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는 그해 10월 국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말갈이 11월 변경을 침략하였다.
말갈은 그동안 백제와 신라의 북진정책으로 많은 땅을 잃은 상태였다. 거기다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터전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러자 말갈은 고육지책으로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어 그들의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때 신라 변경을 침입한 것도 고구려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심한 가믐으로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신라는 소지왕이 직접 비열도(함경남도 안변)까지 행차하여 군복을 하사하는 등 변방의 군사를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과감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소지왕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은 계속 패전하였다. 고구려와 말갈군은 신라 북방 변경을 휘젓고 다니면서 호명성(강원 철원 주변)등 일곱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다시 동쪽 해안을 따라 미질부(경북 영일만 일대)까지 밀고 내려 왔다.
미질부에서 금성까지는 불과 수십 리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태가 이쯤되자 소지왕은 급히 백제 동성왕과 가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다행히 백제와 가야가 신라의 구원 요청에 군대를 파견하여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다.
신라, 백제, 가야 삼국 군대는 달아나는 고구려와 말갈군을 추격하여 니하(북한강 일원으로 추측) 서쪽에서 후미를 따라잡아 천여 명을 목을 베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겨우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물리치긴 했으나 신라의 타격은 컸다. 우선 자력으로 적을 몰아내지 못하고 백제와 가야의 지원을 받은 것에 국가 위상의 추락과 북방의 여러 성들이 차례로 함락되어 민심이 동요되고 군대의 신뢰성이 크게 실추되었다.
그런 와중에 또 한 번의 천재가 닥쳤다. 이듬해 2월 엄청난 바람이 불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이변이 일어났고, 금성 남문이 화재가 발생했다. 또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또다시 흉작을 예고했다. 소지왕은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을 방면하여 농사에 돕도록 했다.
그러나 악재는 여전했다. 5월에 왜군이 쳐들어와 해안가 민가를 계속 노략질하였고, 그런 와중인 483년 4월에는 큰 호우가 나서 많은 백성들이 수재민이 되었다. 홍수는 7월에도 다시 발생하여 신라 전역을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였다. 특히 낙동강 주변 민가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소지왕은 가을 걷이가 끝난 10월 직접 일선(경북 선산) 지방에 행차하여 수재민을 위로하고, 재해 정도에 따라 국고를 털어 지원하며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홍수의 후유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수재를 당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였고, 11월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그 화살은 소지왕에게 집중되었다. 왕이 덕이 없어 재난이 나고 전쟁이 지속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지왕은 자비왕 대에 강화된 왕권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고육지책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햇다.
484년 정월에 오함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그에게 정치와 군사 업무를 맡기고 자기는 한 발 뒤로 불러났다.
이러한 소지왕의 정치적 결단은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해 7월 고구려가 신라 변경을 통과하여 백제 땅으로 밀려들자,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모산성(충북 청원) 아래에서 힘을 합쳐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백제의 동성왕은 이 일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이듬해 5월 사신을 보내 소지왕을 예방하게 했다. 이로써 신라는 지난날 실추되었던 국가 위상을 되찿고, 군대의 사기도 크게 높였다.
이에 힘입어 소지왕은 여러 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하였고, 485년 2월에는 구벌성, 486년에는 일선 지방 장정 3천을 동원하여 삼년성과 굴산성을 개축하였다. 488년에는 도나성, 490년에는 비라성을 증수했다. 493년에는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 무렵, 소지왕은 자신의 측근인 장인 내숙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겨 왕권 회복에 한 발 다가섰다. 그해 4월 왜인들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 하였으나, 소지왕은 양산 남쪽에서 대대적인 군대를 사열하여 왜군의 기를 꺽어 놓았다.
조금씩 자신감을 되찿고 있던 소지왕은 487년 내을에 신궁을 설치했다. 내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인데, 이곳에 신궁을 세워 민심을 다잡으려 했다. 3월에는 사방에 우역(우편 및 명령 전달 역말)을 설치하고, 소관 관청으로 하여금 관도를 정비토록 지시했다.
우역 설치는 중앙과 지방을 일원화하고. 명령을 빠르게 전달하여 불의의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이는 곧 왕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재난과 전쟁에 신속하게 대처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월성을 수리하여 그곳에 대궁을 설치하여 이듬해 재위 10년 정월에 월성으로 옮겨 앉았다. 이때부터 월성에는 왕과 왕비 등이 기거하고, 금성엔 왕의 혈족들이 기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왕의 위상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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