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128 : 신라의 역사 27 (제19대 눌지왕 1)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28 : 신라의 역사 27 (제19대 눌지왕 1)

두바퀴인생 2011. 1. 17. 01:41

 

 

 

 

 

한국의 역사 128 : 신라의 역사 27 (제19대 눌지왕 1)

 

제19대 눌지왕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458년, 재위 417년~458년) 또는 눌지왕(訥祗王)은 신라의 제19대 임금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초로 마립간의 칭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보반부인, 혹은 내례길포라 하며 미추 이사금의 딸이고 왕비는 실성 마립간의 딸이다.

 

생애

내물 마립간이 재위 37년인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를 보냈는데,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눌지를 해치고 동생 복호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복호와 미사흔은 418년 박제상을 시켜 돌아오게 했는데, 이 일화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424년 음력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431년 음력 4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둘러쌌으나 소득 없이 물러났다.

 

432년 봄에 기근이 발생했다.

 

433년 미사흔이 죽었는데, 임금이 서불한에 추증했다.

 

그해 음력 7월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나-제 관계가 좋아져 이듬해 434년 비유왕이 음력 2월에 말 두 필을, 음력 9월에 흰 매를 보냈고 음력 10월에 눌지가 황금과 명주를 보내 답례했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임금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 임금이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450년 음력 7월 고구려의 한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하슬라 성주 삼직이 그를 죽였다. 장수왕이 노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립간이 사죄하자 그대로 물렀다.

 

그러나 454년 음력 8월 다시 고구려가 침공했으며, 455년 음력 10월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것을 마립간이 군사를 보내 구원했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19대 눌지왕 실록 

( ? ~서기 458년, 재위 서기 417년 5월~ 458년 8월,  41년 3개월)

 

1. 실성왕의 음모와 눌지왕의 역공

눌지는 원래 내물왕의 태자였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실성에게 왕위를 양보해야 했다. 그래서 실성왕의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는데, 이는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실성왕이 진심으로 원한 일은 아니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눌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눌지를 사위로 삼은 것은 김씨 왕실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실성왕이 자기 딸을 눌지와 결혼시킨 것은 왕실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실성왕에게는 눌지가 대단히 부담스런 존재였다. 만약 내물왕 사망 당시 눌지가 성년이었다면 왕위가 실성에게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실성왕은 늘 눌지의 대리자로서 왕위에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이럴 경우, 신라 사회에선 선왕의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탈해왕은 남해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후에 유리왕의 후손인 파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미추왕도 조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었다가 조분왕의 태자인 유례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마찬가지로 실성왕도 당연히 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성왕은 내물왕의 자식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가 않았다. 더구나 성년이 다 된 눌지는 덕망이 있고 기상이 높아, 군자의 기풍을 갖추었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은근히 눌지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던 실성왕에겐 그런 말들이 귀에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눌지를 제거해 버려야 겠다고 생각한 실성왕은 결국 자객을 시켜 눌지를 죽이기로 했다. 내물왕의 세 아들 중 복호와 미사흔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 있는 상황이라 눌지 하나만 죽이면 왕위는 자연스럽게 자기 아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실성왕은 눌지를 죽일 방도를 연구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자기가 고구려에 인질로 있던 때 알고 지내던 고구려인을 은밀히 불렀다.

"내가 구실을 만들어 고구려 군대를 청하고, 눌지로 하여금 그대를 맞이하게 할 터이니, 도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눌지를 보거든 무조건 죽여 버리시요."

 

마침내 실성왕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고구려에 군대를 청했고, 눌지로 하여금 마중나가도록 했다. 눌지는 실성왕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고구려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떠나, 마침내 고구려 군대와 만났다. 군대를 이끌고 온 고구려인은 바로 실성왕의 사주를 받은 자였다. 하지만 막상 눌지를 대면하게 된 고구려인은 눌지의 기상과 인덕을 알아보고 눌지에게 실성왕의 음모를 털어 놓았다.

"그대의 국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라고 하였으나, 이제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일 수가 없소이다."

 

그 말을 듣고 눌지는 분개하였고, 그는 고구려인을 설득하여 자신과 함께 금성으로 가서 실성왕을 제거하자고 하였다. 고구려인들은 눌지의 제의를 받아들여 금성으로 군대를 몰아, 실성왕을 제거하고 눌지를 왕위에 앉힌 뒤에 고구려로 돌아갔다. 고구려 군대를 이용하여 눌지를 제거하려 했던 실성왕은 되레 그 고구려 군대에 목숨을 잃었으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눌지에게는 병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비록 실성왕이 자기를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치더라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 군대의 힘을 빌려 실성왕을 제거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실성왕 재위시에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입장이었다. 이런 관계는 내물왕 때인 392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보내고, 이어 400년 신라 땅을 거의 장악한 왜군을 광개토왕이 군대 5만을 보내 쫓아내고 구원한 이후부터 지속되었다. 말하자면 이때 고구려는 신라의 상국이었던 것이다.

 

실성왕은 바로 그 상국 고구려 군대를 끌여들여 눌지를 제거하려 했다.  실성왕이 어떤 구실로 고구려 군대를 끌여들인지는 몰라도 왕이 직접 고구려 군대를 끌여들이고, 그 군대를 영접하기 위해 왕위 계권자인 눌지를 보낸 것을 보면, 당시 고구려가 신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군대가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운 뒤에 돌아가는 사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