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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9 : 신라의 역사 28 (제19대 눌지왕 2) 본문
한국의 역사 129 : 신라의 역사 28 (제19대 눌지왕 2)
2. 뒤엉키는 국제 관계와 눌지왕의 자구책
눌지왕은 내물왕의 장남이며, 보반(또는 내례희)부인 소생이다. 내물왕이 죽을 당시 그는 너무 어렸으므로 실성이 왕위를 이었다. 실성왕은 눌지를 사위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려 했다가 눌지가 성장하여 덕망이 높자,시기하고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눌지는 오히려 상황을 반전시켜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그 때가 417년 5월이었다.
왕위에 오른 눌지가 가장 먼저 서두런 일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 있는 아우들을 귀환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삽라군 태수 박제상으로 하여금 복호와 미사흔을 데려오도록 했다. 박제상은 뛰어난 화술로 고구려 장수왕을 설득하여 418년 정월에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복호를 귀환시켰고, 그해 가을에는 왜에 가 있던 미사흔을 탈출시켰다. 하지만 박제상은 미사흔의 안전을 의해 함께 도주하지 않아 왜인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복호가 귀환한 뒤, 신라의 눌지왕이 고구려를 섬기는 자세를 보이지 않아 양국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미사흔을 탈출한 이후 왜는 인질을 빼돌린 신라를 응징하겠다며 전쟁을 선포했다. 왜는 수군을 보내 신라 해안 마을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
이렇듯 인질 문제로 신라는 점점 고립되는 지경에 내몰렸고 거기다 420년에는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믐에 시달렸고, 7월에는 때 이른 서리가 내려 곡식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탓에 큰 흉년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 중에는 자식을 팔아먹는 자도 생겼다.
눌지왕은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고 국고를 풀어 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혹독한 흉년의 여파는 그 후로도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다행히 423년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가까스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눌지왕은 그해 4월에 노인들은 대거 남당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면서 자기가 직접 음식을 집어주면서, 곡식과 비단을 하사해 백성들의 마음을 달랬다.
또한 소원해진 고구려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424년 2월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재개했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왕은 예전 같지가 않았는데, 눌지왕을 별로 신임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가 왜군의 노략질은 계속되었고 급기야 431년 4월에는 대군을 동원하여 서라벌을 공격해 왔다. 왜군은 금성 외성인 명활산성을 포위하고 압박하였으나, 신라군이 산성을 의지하여 수성전으로 일관하자,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렇게 가까스로 왜군을 막아냈으나, 그해 7월에 또다시 때이른 서리가 내려 곡식을 망쳤고 백성들은 기근으로 굶주렸다. 곡식이 귀해지자 백성들은 초목근피로 연명하였고 그 후로도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렇게 모든 분야에서 악재가 계속되자 눌지왕은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백제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었다. 당시 백제는 비유왕 시대로 427년 구이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 과정에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태후는 왜인 여자로 난정을 펼쳐 정국으 혼란스럽게 한 죄로 왜국으로 내쫓았다. 그러자 그녀와 놀아나며 정사를 농단하던 왜인 목만치도 왜로 달아났다. 팔수태후는 왜왕 응신천황의 딸이었으며, 목만치는 왜인 출신으로 임나의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비유왕이 등장 한 이후 백제와 왜, 그리고 임나의 관계는 크게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백제는 고구려와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기에 왜, 임나와 등졌다는 것은 곧 국제 사회에서 외톨이로 남게 되었다는 뜻이다. 백제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눌지왕은 비유왕의 화친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러한 동병상련은 동맹 관계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양국은 서로 화친 의사를 확인하자, 433년 7월에 비유왕이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눌지왕은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눌지왕이 화친을 흔쾌히 받아들이자 기분이 좋아진 비유왕이 이듬해 2월 명마 두 필을 선물로 보내왔다. 이어 9월에는 흰 매를 보내왔다. 이에 10월에는 눌지왕이 백제에 황금과 명주로 답례를 했다. 이로써 백제와 신라 양국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급기야 군사 동맹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야말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었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고구려와 왜에는 큰 충격이었다. 고구려는 신라를 지렛대로 삼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남진 정책을 강화하려 하였고, 왜는 백제와 돈독한 관계를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무역 도시인 임나의 상권을 보호하려 하였다. 하지만 백제가 신라와 동맹을 맺으면서 고구려는 남진 정책에 치명타를 입었고, 왜는 임나의 상권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토지는 척박한데 인구는 많아 항상 식량 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왜는 가야에서 많은 곡식을 수입해야만 했다. 국제무역도시인 임나(아라가야로 함안에서 섬진강에 이른는 지역)는 바로 그 곡식을 수입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따라서 임나의 상권이 위협받는 다는 것은 바로 왜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된다는 뜻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왜왕 응신천황은 백제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비유왕 즉위 초기에 50여 명에 이르는 사신단을 파견하여 백제 달래기에 나섰다. 그러나 비유왕은 오히려 신라에 화친의 손길을 뻗어 왜국 조정의 애를 태웠다. 어차피 왜는 임나의 상권 때문에 백제와 등을 질 수 없는 처지였고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비유왕은 왜에 메달리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국제관계가 미묘하게 얽혀가고 있던 와중에도 왜는 신라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440년 왜인들이 신라의 남쪽 병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대거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6월에는 다시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노략질을 일삼는 왜인들은 왜국의 정식 군대가 아닌 이른바 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해적들이었다. 이들 해적들은 신라인들에게 도적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왜인들에겐 상인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신라인들의 마을을 습격하여 물건을 빠았고 백성들을 잡아갔는데, 그들이 빼았은 물건과 잡아간 백성들은 다시 왜인들에게 팔려 갔다. 왜구들이 틈만 보이면 신라를 노략질 한 것은 근본적으로 장사할 물건을 노획하고 노비로 팔아먹을 사람을 잡아가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들의 노략질은 왜국의 승인 아래 이뤄지고 있었다. 그뿐아니라 해적과 왜군은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 해적들은 왜국 군대의 하부조직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구는 백제인들을 대상으로 노략질은 하지 않았다. 백제는 왜와 오랜 우방이었고, 또한 임나의 상권에도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던 까닭에 왜국 조정은 이들이 백제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다.
왜국 조정은 늘 왜구를 앞세워 신라 사회를 위협하였는데, 이들 해적들은 왜국 조정의 첨병 역활을 하였다. 그들은 해적들을 통해 신라의 형편을 파악한 뒤,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고, 마침내 틈이 보이면 군대를 동원하여 바로 금성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신라인들에겐 왜인들의 공격이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444년 4월, 왜는 또 한 번 대군을 동원하여 금성으로 밀려들었다. 밀물처럼 밀려든 왜군은 금성의 외곽을 포위했고, 이어 외성을 뚫고 경도로 진입하여 금성을 에워쌌다. 눌지왕은 금성 안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수성전을 펼쳤다. 왜병은 10일 동안 끈질기게 성문을 두드렸으나 결국 식량이 떨어지자 스스로 물러났다.
왜병이 퇴각하자 놀지왕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일 동안 동성 안에 갇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다. 눌지왕은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직접 퇴각하는 왜병의 뒤를 추격한 끝에 독산 근처에 이르러 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눌지왕이 크게 패하고 군사의 절반을 잃자 말을 버리고 산으로 달아났는데, 왜군이 그 사실을 알고 전 병력을 동원하여 산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다행히 그때, 짙은 안개가 산을 휘감아오면서 태양을 가려 주변이 암흑천지로 변했다. 그러자 왜장은 하늘이 신라군을 돕고 있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 바람에 눌지왕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6년 후, 450년 7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실직(강원 삼척) 벌판에서 고구려 장수 한 사람이 사냥을 하는 것을 하슬라(강릉) 성주 삼직이 습격하여 그를 죽인 사건이다.
당시 고구려는 상국이었고, 실직은 신라 땅이었다. 그런데 상국인 고구려 병사들이 신라 땅에서 마음대로 사냥을 즐기자, 이에 분개한 하슬라 성주가 고구려 장수를 살해하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장수왕은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렇게 말햇다.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어 매우 기뻐했는데, 이제 군사를 보내 우리 변경을 장수를 죽였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
이 사건 있기전부터 눌지왕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왔던 장수왕은 곧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그러자 눌지왕은 직접 고구려 군대를 영접하며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조를 했다. 고구려군은 물러갔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이미 꼬일대로 꼬인 뒤였다.
아마 이때 고구려는 필시 하슬라 성주 삼직을 고구려로 압송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측에서 삼직을 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이 직접 나서서 사과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한 듯하다.
그러나 장수왕은 눌지왕의 사과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눌지왕이 백제의 비유왕과 동맹을 맺은 자체를 고구려와 등지겠다는 처사로 판단하였다.
장수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454년 7월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 아마도 이때 고구려 군의 공격을 받은 곳은 하슬라 지역으로 판단된다. 말하자면 신라가 삼직을 넘겨주지 않자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체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에 장수왕은 이듬해 10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이쯤되자 눌지왕도 더 이상 고구려의 태도를 지켜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군대를 보내 백제를 지원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치도록 했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의 동맹은 공고해졌고, 고구려와는 적대 관계로 변해 버렸다.
이런 거대한 국제관계의 소용돌이가 전개되는 가운데 눌지왕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다. 457년 폭풍으로 나무가 뿌리채 뽑혀 나가는 일이 일어났고, 4월에는 때 아닌 서리가 내려 보리를 상하게 하였으며, 이듬해 2월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금성 남문이 무너졌다. 그런 가운데 눌지왕은 458년 8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눌지왕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 아로부인 김씨이다. 그녀 소생으로 자비왕(제20대)과 지증왕의 어머니 조생부인이 있다. 조생부인은 사촌인 김습보와 결혼하여 지증왕을 낳았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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