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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7 : 신라의 역사 26 (제18대 실성왕) 본문
한국의 역사 127 : 신라의 역사 26 (제18대 실성왕)
제18대 실성왕
제18대 실성왕 실록
( ? ~서기 417년, 재위 서기 402년 2월~ 417년 5월, 15년 3개월)
잦은 왜란과 살해되는 실성왕
실성왕은 김대서지의 아들이며, 이리부인 석씨 소생이다. 대서지는 미추왕의 아우이므로 내물왕의 숙부가 되며, 실성왕은 내물왕의 사촌 아우이다. 내물왕은 392년에 그를 고구려로 인질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내물왕의 왕자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자들을 대신하여 보냈던 것이다.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던 그는 9년 뒤인 401년에야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402년 2월에 내물왕이 죽자, 태자 눌지가 너무 어려 그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의 거구로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고 전한다.
실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왜와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3남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냈다. 이는 내물왕이 줄곧 왜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왜와 오랫동안 화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도 아니며, 두나라의 화친은 화친 약조가 있은 지 불과 3년 뒤에 깨졌다. 왜와 신라가 화친 관계가 깨진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백제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403년 7월에 백제가 신라 변경을 침입했는데, 당시 백제는 아신왕의 태자 영을 군사적 후원을 받기 위해서 왜에 볼모로 보낸 상태였다. 따라서 백제가 신라를 침입했다면, 그기에는 왜의 동조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그 점을 문제 삼아 일방적으로 화친 관계를 폐기한 듯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실성이 미사흔을 제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인질을 매개로 화친을 맺었는데, 일방적으로 화친을 깨버리면 인질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말하자면 실성은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냄으로써 미래의 화근을 제거했다는 뜻이다.
이 사건으로 왜와 신라와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고, 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405년 4월에 신라를 다시 침략하였다. 왜군은 상륙하여 명활산성(경주 외곽 산성)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신라군에 저지당해 패퇴했다. 실성왕은 자신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했으며, 왜군은 3백여 명의 군사를 잃고 쫓겨갔다.
가까스로 왜병을 물리치자 이번에는 재해가 신라인들을 괴롭혔다. 406년 7월에는 서쪽 지역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에 큰 피해를 입혔고, 10월에는 서라벌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이 놀랐다.
신라 사회가 이처럼 어수선하자, 407년 3월에 왜군이 다시 동쪽 변경을 침략했다. 6월에는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 1백 명을 잡아갔다.
당시 왜는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신라 공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실성왕은 대마도를 정벌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408년 2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서불한 미사품이 만류했다. 미사품은 만약 대마도 정벌이 실패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을 지 모른다며 차라리 험한 지역에 요새를 설치하여 적을 막는 것이 낫다고 설파했다. 이에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포기하고 지역 요새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침을 변경했다. 대마도 정벌은 무방비 상태인 금성을 왜군이 언제 공격해 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대군을 대마도로 보낸다는 것은 무리수라고 판단한 듯하다.
신라가 의지할 수 잇는 것은 역시 고구려뿐이었다. 그래서 실성은 고구려의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412년에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다.
그런 가운데 왜는 신라 변경을 노략질하며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415년 여름 실성왕은 조만간 왜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 그해 7월 혈성벌에서 대대적인 군대를 사열하고 전쟁에 대비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왜군은 포항 앞바다의 풍도로 쳐들어 와 상륙준비를 하였다. 신라군이 풍도로 다가가 왜군과 한바탕 격전을 벌여 격퇴시켰다.
하지만 왜군의 잦은 침입으로 신라 사회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내물왕의 태자 눌지가 성장함에 따라 실성왕에게는 점점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었다. 고심 끝에 실성왕은 눌지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뒤, 고구려인을 동원하여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417년 봄에 마침내 그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는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눌지를 죽이기로 한 고구려인들이 눌지의 인물됨을 보고 눌지에게 실성왕의 음모를 알려 줬던 것이다. 이에 눌지는 고구려군을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 금성으로 잠입하였고, 결국 궁궐을 장악하고 실성왕을 죽여 버렸다.
실성왕도 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 칭호를 사용하였고,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실성왕의 왕비 아류뷰인은 미추왕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그의 부인은 아마도 내물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그는 내물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다.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도 전무하다. 아마도 실성왕이 시해될 때 모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실성왕이 내물왕의 사위였다면 왕비는 눌지왕의 친누나가 된다. 그러나 그녀의 자식들은 모두 눌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실성왕의 부인을 미추왕의 딸이라고 꾸민 것은 눌지왕이 친누나와 친조카를 죽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꾸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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