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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5 : 신라의 역사 24 (제17대 내물왕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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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5 : 신라의 역사 24 (제17대 내물왕 1)

두바퀴인생 2011. 1. 13. 12:21

 

 

 

한국의 역사 125 : 신라의 역사 24 (제17대 내물왕 1)

 

제17대 내물왕

경주 내물왕릉

 

364년 음력 4월 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 왔는데,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마주하게 하였다. 왜병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달려들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

 

366년 음력 3월 백제인이 와 예방하였고, 368년 봄에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373년 백제의 독산 성주가 3백 주민과 함께 투항, 이사금이 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 근초고왕이 이에 항의했으나 이사금은 주민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381년 위두(衛頭)를 보내 에 입주했다. 진나라 사람 부견(符堅)이 묻기를 "해동의 사정을 말하매 언어가 예전과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는데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중국과 동일한 현상이라, 시대가 바뀌며 말과 이름이 변하니 오늘의 말이 어찌 옛과 같겠는가?" 하였다.

 

392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다. 고구려가 강성하기 때문에 이사금은 실성을 볼모로 보냈다. 실성은 401년 신라로 돌아왔다.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는데 이사금이 거부,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

 

400년 신라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45년 10월 왕의 어마(御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조

당시에 고구려에 볼모까지 보내며 제휴하고 있던 신라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계속 열세에 있던 백제가 앙심을 품고 백제와 제휴하고 있던 가야를 부추겼다. 그러자 일찍부터 신라와 경쟁관계였던 가야가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일본의 소국들을 동원해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이미 잇단 천재지변과 의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되어 있던 신라는 남천가에서 대참패를 당하고 서라벌까지 가야군과 왜국의 연합군에게 함몰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고 이에 다급해진 이사금은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평양에 진주하고 있던 광개토태왕에게 구원을 요청해 겨우 가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덕분에 신라는 오랜 라이벌이었던 가야를 패퇴시키고 그 영역이었던 부산 일대와 낙동강 하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야의 침공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이사금은 몸져 누웠고 이 때문에 이듬해인 401년 고구려에 볼모로 왔던 실성이 귀국했다. 그로부터 7개월 후인 402년 5월에 이사금이 서거해 첨성대 서남쪽에 능이 조영되었다.

 

신라 후기에는 그의 방계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17대 내물왕 실록 

( ? ~서기 402년, 재위 서기 356년 4월~ 402년 2월,  45년 10개월)

 

1. 석씨 왕실의 몰락과 김씨 왕실의 독점

내물(또는 나밀)흘왕은 구도갈문왕의 아들 말구(또는 미구)와 휴례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말구는 미추왕의 아우인데, 유례왕 8년(291년)에 이벌찬에 임명되어 정사를 도왔던 인물이다. 그는 충직하고 지략이 뛰어났기에 유례왕이 자주 그를 찿아가서 정사에 관하여 자문을 구하였다고 한다.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경위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기는 "홀해가 죽고 아들이 없어 내물이 뒤를 이었다."라고만 쓰고 있다. 또한 왕비를 미추왕의 딸 보반부인 김씨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신뢰하기 힘들다. 미추왕이 사망한 연도는 284년이고,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356년이다. 미추왕 사망 시점에서 내물왕 즉위까지는 72년이라는 공백이 있다. 그렇다면 내물왕의 왕비가 미추왕이 사망하던 때에 태어났다 해도 356년에는 일흔세살이나 된다. 또 당시 신라 왕실의 결혼 관습 상 대개 남성이 여성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내물왕은 적어도 칠십대 중반에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다. 거기에 내물왕의 치세 기간 46년을 더하면 그는 백이십 살 가량 산 셈이 된다. 그가 120년을 살았다면 그의 자식들도 꽤 나이가 많아야 정상인데, 그의 장남 눌지는 그가 사망할 당시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니,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물왕이 죽고 난 뒤에 보반부인 소생인 눌지가 너무 어려 실성이 왕위를 잇는다. 더구나 눌지 아래로 복호나 미사흔 같은 아우들도 있었으니, 그때 보반부인의 나이는 임신이 가능한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내물왕이 사망 당시에 보반부인의 나이는 기껏해야 30대 말이나 4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보반부인이 미추왕의 딸이라면, 이때 이미 백 살을 넘긴 나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살아 있다해도 운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노파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이된다. 따라서 내물왕의 보반부인을 미추왕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조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사실, 보반부인과 내물왕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내물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이미 20대 이상의 성년이었다. 그리고 46년간 왕위에 있었으나, 사망 무렵에는 칠십이 다 된 노인이었다. 그런데 보반부인은 이때 채 사십이 안된 나이였다. 말하자면 보반부인과 내물왕은 약 서른 살 정도 차이가 나는 부부였다. 이는 보반부인이 내물왕의 첯 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미추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보반부인은 미추왕의 손녀이거나 증손녀일 수도 없다. 보반부인을 굳이 내물왕과 관련을 짓자면, 미추왕의 딸에게서 태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보반부인이 미추왕의 딸이 아니라는 것과 내물왕이 미추왕의 사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보반부인을 미추왕의 딸로 기록했을까? 이것은 내물왕의 즉위 명분을 위해 고의로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아우인 말구의 아들이다. 미추왕은 조분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말구의 아들인 내물은 왕위를 이을 어떠한 명분도 없었다.그는 전 왕의 사위도 아니었고, 직계 왕손도 아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그의 부인 보반부인을 미추왕의 딸로 둔갑시키는 것이엇다.

 

보반부인을 미추왕의 딸로 둔갑시킨 것은 즉위 이후의 일이다. 그것도 보반부인을 왕비로 맞은 이후의 발상이다. 보반부인이 내물왕보다 30년 정도 연하인 점을 감안할 때, 보반부인이 내물에게 시집온 것은 적어도 재위 20년 이후의 일이다. 내물이 일단 왕위를 차지하고 20년이나 지난 뒤에 왕위 계승의 명분을 세웠다는 말인데, 이는 내물이 순조롭게 왕위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왕위 계승의 명분이 전혀 없는 내물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힘으로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흘해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자, 신라 왕실에서는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내물과 그 지지세력이 무력을 동원하여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물과 왕위를 다툰자는 누구였을까?

내물왕 이후로 석씨 왕실은 완전히 사라진다. 내물왕에 의해 김씨 중심의 왕실이 세워지면서 석씨가 왕족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이다. 심지어 석씨 가문에서는 왕비도 배출하지 못했다. 왕을 배출하지 않은 지 오래된 박씨 가문에서 여전히 왕비들을 배출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내물왕 즉위 이후 석씨 왕실이 완전히 몰락했 버렸음을 의미한다.

 

내물과 왕권을 다투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저절로 밝혀진 셈이다. 흘해왕이 후계자 없이 죽은 뒤에 석씨와 김씨 사이에 왕권 다툼이 일어났고, 김씨가 승리하여 내물왕을 왕위에 앉힌 것이다. 그리고 석씨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박씨 세력을 외척으로 끌어 앉았다. 이로써 신라 왕실은 김씨가 독점하게 되었고, 석씨는 왕실 계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