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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4 : 신라의 역사 23 (제16대 흘해왕) 본문
한국의 역사 124 : 신라의 역사 23 (제16대 흘해왕)
제16대 흘해왕
흘해 이사금(訖解泥師今, 250년경 ~356년, 재위 310년~356년)은 신라의 16대 왕이다. 성은 석씨로 내해 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 우로(于老), 어머니는 조분 이사금의 딸 명원(命元)부인이다.
태어난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 의하면, 석우로가 죽은 249년 혹은 253년에 갓난아기였다.
다음해인 312년 왜왕이 혼례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317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죄수들을 심사해 석방하였고,
이듬해 318년에는 지난해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에 백성을 부려 노역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329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는데, 이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344년 음력 2월 왜왕이 다시 공주와의 혼례를 청하자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345년 음력 2월 왜왕이 국교를 끊는다는 사신을 보내고,
346년 크게 군사를 내어 금성을 포위했다. 신라군은 금성에서 농성하며 왜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왜군의 퇴각 시점에 맞춰 기병을 내어 격퇴하였다.
가계
- 아버지 : 각간 우로(于老)
- 어머니 : 명원부인(命元夫人) - 조분 이사금의 딸.
- 왕후 : ?
- 딸 : ? - 왜왕이 그녀를 혼례를 청하자, 흘해왕은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참고
제16대 흘해왕 실록
( ? ~서기 356년, 재위 서기 310년 6월~ 356년 4월, 45년 10개월)
1. 흘해와의 백성 사랑과 위태로운 대왜국 관계
흘해왕은 내해왕의 태자였던 석우로의 후손이다. 삼국사기는 그가 석우로와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 소생이라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석우로가 사망한 해는 249년이고, 흘해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61년 뒤인 310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흘해의 즉위 과정에 대해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기 논의 한 결과 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면서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라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흘해는 왕위에 오를 당시 10대 소년이었다. 따라서 흘해는 석우로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나 증손자쯤 되어야 정상이다.
왕위에 오른 흘해는 급리를 아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재위 3년(312년)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의 신붓감을 요청하자 급리의 딸을 보냈다.
이때 왜국에서 신라의 왕녀를 요구한 것은 일종의 결혼 동맹을 맺고자 한 것으로 일방적으로 왕녀를 요구한 것을 보면 당시 신라가 왜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즉 신라는 왜에 화친을 맺기는 했으나, 대등한 입장이 아니라 저자세에서 맺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흘해왕에게 공주가 있었다면, 왜는 필시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흘해가 어렸기 때문에 시집보낼 만한 딸이 없었다. 그래서 재상직을 수행하고 있던 급리의 딸을 보냈던 것이다.
어쨌던 급리의 딸이 왜로 간 덕분에 왜와 신라는 결혼동맹 형태의 화친을 맺어 한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와 화친 관계는 그로부터 32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재위 35년(344년) 2월에 왜가 다시 청혼을 해 왔다. 이번에는 홀해왕의 딸을 요구했으나 흘해왕은 딸이 이미 출가하였기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이듬해 2월에 왜왕은 화친을 파기하고 절교한다는 글을 보내왔고, 이로써 신라와 왜의 위태로운 화친은 끝나고 말았다.
절교를 선언한 왜왕은 이듬해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 왔다. 왜군은 일단 풍도(포항 앞바다 목출도)를 장악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이어 서라벌로 치고 들어와 순식간에 금성을 포위했다. 흘해왕이 군사를 보내 접전을 벌이려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적병은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해 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흘해왕은 강세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문을 닫고 수성전을 펼쳤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왜군은 식량이 떨어지자, 결국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흘해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병을 내보내 왜병을 뒤를 후렸다. 그 결과 퇴각하던 왜병의 상당수가 신라군의 칼날에 목이 달아났다.
이 싸움 이후, 왜군은 더 이상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였으나 신라 사회는 여전히 왜군의 침입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왜와는 화친과 전쟁을 반복하는 관계였지만, 백제와는 여전히 화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337년에 비류왕에게 사신을 보내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46년간 흘해왕의 치세는 이러한 외교 관계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나머지는 천재지변에 관한 것들이다.
재위 4년 7월 가믐이 들었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자, 흘해왕은 지방에 관리를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5년 2월에는 궁궐를 증수하다가 비가 오지 않으므로 이를 중단했다. 8년 봄과 여름에는 가믐이 들었는데,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많은 사람을 석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흘해왕의 정치적 소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재위 9년 2월에 내린 조서는 그의 통치관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믐으로 농사의 피해가 많았다. 이제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돌아 바야흐로 농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노역시키는 일을 모두 중단하라."
이 말 속에는 홀해왕의 백성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느 왕 같으면 가믐이 있던 해에만 부역을 금지시켰을 터인데, 흘해왕은 그 이듬해까지 부역을 중단시켜 풍작을 지원하였다. 이는 그가 농민 입장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내릴 수 없는 조서이다.
그렇듯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던 흘해왕은 재위 47년(356년) 4월 생을 마감하였다. 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능과 가족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왜왕이 딸을 요구했을 때, 이미 시집갔다며 보내지 않았던 점을 보아 딸을 한 명 정도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들은 없었다.
2. 벽골제에 관한 짧은 소고
흘해왕은 재위 21년에 "벽골제에 물을 대기 시작했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보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사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논란이 많다. 벽골제는 전북 김제에 있는 것인데, 신라가 그곳에 물을 댔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이 기록은 백제본기에 들어갈 것이 편자들이 실수로 신라본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삼국사기 편자들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여 내린 결론이다. 삼국사기는 김부식 주도하에 열 명의 학자들이 편찬하여 왕에게 올린 책이다. 말하자면 삼국사기는 김부식 개인의 사업이 아니라 국책사업이었다. 그런데 이런 터무니 없는 실수를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벽골제'를 무조건 김제의 '벽골제'라고 단정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당시 신라에는 김제의 벽골제와 맞먹는 크기의 저수지가 세 개나 있었는데, 제천의 '의림지', 상주의 '공검지', 밀양의 '수산제'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서기 1세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보수 과정을 거쳤는데, 그때마다 이름이 변했다. 특히 제천의 의림지는 진흥왕 때에 우륵이 처음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 700년 후 고려의 박의림이 다시 쌓았다고 해서, 지금 의림지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저수지는 우륵이 처음 쌓은게 아니라 보수했다고 해야 맞다. 따라서 의림지는 박의림이 보수하기 이전에 우륵의 이름을 따서 우륵지라고 불렸을 확률이 높고, 그 이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김제의 벽골제도 처음부터 그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원성왕 6년(790년)에 전주 사람들을 동원하여 벽골제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김제의 벽골제도 처음에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다가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 벽골제라는 이름으로 고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주의 공검지도 쌓은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공검이 어느 시대의 사람이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이 이름도 중수 과정을 거치면서 개칭되었을 확률이 높다.
밀양의 수산제는 그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산을 지킨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사람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 아니라, 이 저수지에 대한 주민들의 관념이나 기능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김제의 벽골제 역시 '푸른 뼈'라는 이름의 의미로 볼 때,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그 물의 색깔에서 따온 듯하다.
이렇게 볼 때, 흘해왕 21년 기사에 등장하는 벽골제는 반드시 김제의 벽골제를 지칭하는 것으로만 볼 수 없으며 당시 신라 땅에 있었던 가장 큰 저수지로 알려진 공검지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주사록에 따르면 공검지는 제방 길이가 860보였고, 너비가 800보였으며, 둘레가 22리(약 9킬로미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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