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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2 : 신라의 역사 21 (제14대 유례왕)

두바퀴인생 2011. 1. 10. 13:30

 

 

 

한국의 역사 122 : 신라의 역사 21 (제14대 유례왕)

 

제14대 유례왕

유례이사금(儒禮泥師今, ?~298년, 재위 284년~298년)은 신라의 14대 임금이다. 아버지는 조분 이사금이며, 어머니는 나음(奈音) 갈문왕의 딸 박씨이다.

 

286년 백제와 화친했다.

 

287년에는 인들이 일례부(一禮部)를 쳐 일천 명의 주민을 잡아갔다.

 

289년 음력 6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돌자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고 전쟁 준비를 했는데, 이 해 왜인이 쳐들어 오지는 않았다.

 

292년 음력 6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 사도성(沙道城)을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大谷)으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다.

 

293년 음력 2월에는 사도성을 다시 개축하고, 주민 80여 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294년 여름 왜가 다시 쳐들어와 장봉성(長峰城)을 쳤으나 격퇴되었다.

 

295년 이사금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왜인이 계속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다. 백제와 계획을 세워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자 서불한 홍권(弘權)이 신라군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며 백제를 믿을 수 없다 하여 반대하여 왜 정벌 계획은 취소되었다.

 

296년 이서고국(伊西古國), 혹은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이때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나 이서국군을 쳐부순 뒤 사라졌는데, 이후 미추 이사금이 묻힌 죽장릉(竹長陵)에 수만개의 대나무 잎이 쌓인 것을 보고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님이 하늘나라 병사들을 보내 도우셨다" 라고 하였다.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14대 유례왕 실록 

( ? ~서기 298년, 재위 서기 284년 10월~ 298년 12월,  14년 2개월)

 

1. 유례왕의 즉위 배경

유례(또는 유리)왕은 제11대 조분왕의 장남이며, 갈문왕 나음의 딸 박씨 소생이다. 삼국사기는 박씨가 유례왕을 잉태한 배경에 대해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임신이 되었다'는 자소 설화적인 형태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박씨가 조분왕과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간하여 아이를 밴 것을 미화한 내용일 것이다. 즉 유례왕은 시집가지 않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고 할 수 있다.

 

조분왕이 박씨와 상간한 것은 재위 말기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분왕 사망 당시 유례왕은 기껏해야 돌이 갓 지난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조분왕이 죽은 뒤 첨해가 14년, 미추가 23년 재위했으니, 유례왕은 조분왕 사망 당시인 247년부터 37년이 지난 후 왕위에 오른 것으로 그때 그의 나이는 약 40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미추왕이 유례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하지만 그 내막을 전혀 추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례는 조분왕의 아들이고, 미추는 유례의 매형이다. 미추는 조분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그의 왕비 광명부인을 대신한 것이다. 따라서 왕위 계승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은 광명부인이 쥐고 있었다. 만약 미추왕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광명부인은 당연히 자기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러면 왕위 계승권은 사위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그녀의 사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삼국사기는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들이 미추왕의 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전혀 없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72년 후에나 왕위에 올라 46년간 머물렀다. 만약 내물왕의 부인이 미추왕의 딸이라면 내물은 청년 시절 팔순 노파와 결혼한 꼴이 된다. 실성왕은 미추왕 사망 시점으로부터 118년 후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의 딸과 결혼하였다면 무덤 속의 시신과 결혼한 것이나 진배없다.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을 미추왕의 딸로 기록해 놓은 것은 모두 왕위를 잇는데 명분을 얻기 위한 조작된 기록이다고 볼 수 있다. 어쨌던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들은 미추왕의 딸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미추왕에게 딸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이 미추왕의 딸들이라고 우긴 것을 보면 미추왕에겐 적어도 두 명 이상의 딸들이 있었던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딸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삼국사기는 왕비들의 출신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신라 사회는 혈통에 따라 관직의 품계가 결정되는 제도를 둘 정도로 혈통을 중요시 했다. 특히 혈통의 순수성을 중요시 하던 신라 왕실은 모계 혈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왕비의 신분을 반드시 밝혀 놓았다. 이전 왕들 중에서 남해, 벌휴, 첨해왕 등 세 왕의 왕비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들은 나름대로 모두 이유가 있다.

 

남해왕은 건국 초기로 골품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가 왕족과 혼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왕비의 출신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벌휴왕 또한 왕족과 결혼하지 않았고, 첨해왕은 미추왕에 의해 가족이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에 왕비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례왕과 흘해왕의 왕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유례왕은 조분왕의 아들이고, 갈문왕 박나음의 외손자였으므로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이니 당연히 왕족과 혼인하였을 것이다. 흘해왕 또한 내해왕의 후손이요,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의 피를 받았으니 당연히 왕족과 혼인하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 왕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는 조분왕의 장남인 유례, 내해왕의 태자였던 석우로와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아마도 흘해의 아버지로 추정)  등 두 사람이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이들은 미추왕의 딸들이 이들과 결혼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의 부인으로 기록되어야 할 미추왕의 딸들이 엉뚱하게도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긴엔 모종의 속임수가 도사리고 있는데, 말하자면 내물왕과 실성왕이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등극 명분을 세우기 위해 백성들이 신앙처럼 섬기고 있던 미추왕의 사위로 위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추왕의 진짜 사위는 유례왕과 흘해왕의 아버지였을 가능성이 짙다. 결국 유례왕은 조분왕의 아들이자 미추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셈이다. 

 

2. 전란에 휩싸인 서라벌과 유례왕의 왜국 정벌 꿈

유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국제 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최대의 경쟁자인 백제와 첨예한 대립을 지속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왜와도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왜와의 갈등은 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기야와의 관계 악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신라는 백제, 왜, 가야 삼국과 동시에 싸워야 하는 난처한 지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왜와 관계가 악화된 것은 마추왕 말기에 일어난 명원부인 사건 때문이다. 조분왕의 장녀 명원부인은 내해왕의 장남 석우로의 부인이었다. 우로는 첨해왕 3년(249년)에 왜장 우도주군에 의해 화형당하였는데, 이는 첨해왕이 꾸민 모략 때문이었다. 명원부인은 이 일로 왜국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미추왕 말년에 왜에서 사신이 오자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결국 그녀는 왜국 사신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미추왕에게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미추왕의 승낙을 받아 낸 그녀는 왜국 사신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다음, 휘하의 장사들을 시켜 남편이 당했던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그를 태워 죽였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신라와 왜국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왜국 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대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 와중에 미추왕이 죽고 유례왕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왜의 침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례왕은 즉위와 동시에 전쟁에 대비해야 했다. 그가 취한 첯 번째 조치는 백제와 화해였다. 만약 왜가 침입하였을 때 백제가 침공한다면 막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백제도 신라와 화해를 원하고 있었다. 당시 백제 고이왕이 연로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내정이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신라의 새 왕이 화친을 청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침내 유례왕 재위 3년(286년)에 금성에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백제와 화친을 성립시킴으로써 유례왕은 큰 시름을 하나 해결했지만, 여전히 왜의 침략을 염려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왜는 287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왜군은 일례군(위치 미상, 경북 선산 근처로 추정)을 급습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갔다.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선 왜군이 다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유례왕은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여 왜군의 재침에 대비했다.

 

292년 왜군이 재차 침입했다. 그해 6월에 사도성(경북 영일만 일대)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유례왕은 일길찬 대곡에게 군사를 주어 사도성을 탈환했으나 왜군은 성을 불태우고 많은 주민을 잡아 갔다.

 

그 무렵, 가야는 은근히 왜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유례왕은 그런 태도의 가야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왜군이 물러가자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를 침공했다. 신라의 느닷없는 침략으로 가야는 졸지에 전쟁에 휘말렸고 신라군은 가야의 남단 섬진강 일대 다사군(하동)까지 점령해 버렸다.(유례왕 11년(294년) 7월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 이삭을 진상했다는 기록에서 근거)

 

그러자 왜는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294년 사도성 근처 장봉성을 공격해왔다. 유례왕은 293년 점령한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상주) 주민 80여 호를 이주시켜 살도록 조치함으로써 사도성 일대를 안정시킨 바 있었다. 덕분에 사도성의 민심이 안정되어 왜군의 장봉성 공략을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장봉성 공략에 살패한 왜군은 일단 바다로 퇴각했지만, 재침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본토 공략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이 백제와 힘을 합쳐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소리를 듣고 재상직을 수행하고 있던 서불한 홍권이 만류했다. 홍권은 신라군이 수전에 약하여 왜국을 정벌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거기다 백제 또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했다.

 

유례왕은 홍권의 만류로 왜국 정벌을 포기했으나, 여전히 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가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고, 297년 정월, 신라와 경계인 이서고국(경북 청도)에 병력을 집결하고 과감하게 금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신라는 군대가 점령하였던 가야 남쪽에서 철수하여 왜의 재침에 대비하고 있던 상태였다.

 

가야군의 거센 공격에 신라군은 방어하기에도 역부족 상태였다. 당시 가야는 신라군에 비해 병력 수준이 약한 상태였으나, 당시 거센 공격의 이면에는 가야군에 왜군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던 수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어디서 온지도 알 수 없는 뜻밖의 원군이 나타났다. 원군은 귀에 대나무 잎을 꼿은 병사들로 노도와 같이 공격하여 가야군을 패퇴시켰다. 가야군이 물러간 뒤, 수만 개의 대나무 잎이 죽장릉(죽현릉, 미추왕의 능) 근방에서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미추왕이 하늘의 군대를 보내 전쟁을 도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마도 대나무 잎을 꼿은 병사들은 백제의 책계왕이 보낸 백제 군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백제는 신라와 화친 조약을 맺고 있었으니, 신라에 원군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 그래서 가야와 왜 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노골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신라군으로 변장하여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공격을 막아낸 유례왕은 죽음을 맞이했다. 재위 15년째인 298년 2월에는 경도 서라벌에서 닷새 동안이나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었다는 기사가 보이고, 그해 12월에 유례왕의 사망 기사가 보인다.

 

유례왕도 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 칭호를 사용했으며, 능과 가족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