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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1 : 신라의 역사 20 (제13대 미추왕) 본문
한국의 역사 121 : 신라의 역사 20 (제13대 미추왕)
제13대 미추왕
미추이사금(味鄒泥師今, ? ~284년, 재위 262년~284년)은 신라의 13번째 임금이며, 김씨로 임금이 된 첫째이다.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김알지의 6대손으로 어머니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 박씨(朴氏)이며, 아버지는 김알지의 5대손(세한-아도-수류-욱보-) 구도(仇道)이다. 비는 석씨 광명부인(昔氏光明夫人)이다.
262년 첨해 이사금이 죽은 후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266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했으나 성주 직선(直宣)이 2백 기를 몰고 격퇴하였다.
272년 음력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였으나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278년 음력 10월에는 백제가 귀곡성(槐谷城)을 공격했으나 역시 격퇴했다.
미추이사금은 또한 농업과 민생에도 깊이 관심을 기울여,
264년 가난한 자들을 위문, 구제하였고 268년 신하들을 각지로 보내 민중들의 불만사항을 수렴했고, 272년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금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76년에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이사금이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 하여 거부하였다.
281년 음력 9월 양산(楊山) 서쪽에서 병사를 시찰했다.
283년 음력 9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음력 10월에 괴곡성을 포위,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다.
설화
유례 이사금 때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해 신라군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을 무찔렀다. 전투가 끝난 후 미추왕릉을 보니 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어 그것이 미추왕이 보낸 군사들인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혜공왕 15년 4월에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미추왕릉 쪽으로 불어갔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김유신의 혼령이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변함없는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군신이 저의 공렬(功烈)을 잊음이라,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쓰지 않겠습니다.” 이에 미추왕의 혼령은 대의가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였더니 김유신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 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수록되어 있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13대 미추왕 실록
( ? ~서기 284년, 재위 서기 261년 12월~ 284년 10월, 22년 10개월)
1. 미추왕의 즉위 과정과 계보
미추왕은 미조 또는 미고라고 불렸으며, 김알지의 5대손 김구도의 아들이며, 갈문왕 이칠의 딸 박씨 소생이다.
삼국사기는 미추의 계보에 대해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다."라고 쓰고 있다.
또 미추의 왕위 계승에 대해 "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백성들이 미추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는 점이다. 백성들이 추대하였다는 것은 미추가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추가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했다면 당연히 첨해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첨해의 아들이 없었다면 그의 사위 중 누군가 왕위를 계승했어야 했다. 그런데 조분왕의 둘째 사위인 미추가 왕위를 이었다는 것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첨해왕 실록에서 이미 밝혔듯이 미추왕의 왕위 계승은 결코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첨해왕은 조분왕의 큰사위인 석우로에게 돌아갈 왕위를 탈취하여 왕좌에 오른 인물이다. 그래서 첨해왕 입장에서는 살아있는 석우로가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결국 첨해왕은 궁리 끝에 우로가 왜왕을 모독한 발언을 핑계 삼아 그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이 사건으로 첨해왕은 석씨와 박씨 왕실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게 된다. 왜장에 의해 신라 땅에서 재상 격인 우로가 살해되었는데도 첨해왕이 고의로 방치한 사건은 급기야 반정의 소용돌이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첨해왕의 치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는다.
첨해왕 7년 4월,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는 기사는 당시의 정권 다툼과 반정의 기운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용은 항상 왕을 표현하였고 대궐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왕이 될 만한 인물이 출현했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는 것은 첨해왕의 힘에 눌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첨해왕과 그 정적들의 다툼은 그 후로 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261년 12월 28일 첨해왕이 급사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살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첨해왕이 죽은 후,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미추왕이다. 그는 알지의 후예로 그때까지 왕족이 아닌 김씨 성을 가진 귀족 신분이었지만, 아내 광명부인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 광명부인 석씨는 조분왕의 둘째 딸로 조분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서 미추에게 힘을 실어준 세력은 당연히 석씨 왕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백성들의 신앙이 된 성군 미추왕
첨해왕을 제거하긴 했으나, 미추왕의 왕위 계승은 그리 쉽지 않았다. 비록 첨해왕은 비명에 갔지만, 그의 추종 세력들이 미추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바람에 미추는 바로 즉위하지 못하다가 262년 초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곳곳에서 첨해왕 세력들이 난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금성의 일부가 불탔고 많은 민가가 피해를 입었다.
미추왕 재위 2년(263년) 정월에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첨해왕파를 제거하고 조정을 안정시켰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왕위 계승과 관련된 내란은 261년말까지 약 1년간 지속되다가 미추왕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뜻이다.
가까스로 정적들을 제거한 미추왕은 263년 2월에 시조묘 제사를 올리고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음을 천명했다. 관례대로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자기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했다.
264년 2월엔 직접 동쪽 지방을 순행하며 백성들과 함께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에는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찿아 위로하고 구제함으로써 험악해진 민심을 달래기도 하였다.
미추왕이 이처럼 내정의 안정에 전념을 쏟고 있던 266년 8월, 백제가 봉산성(경북 영주 근방)을 급습해 왔다. 하지만 그곳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워 백제군을 격퇴시켰다. 이는 백제군이 신라군의 방어 능력을 시험해 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미추왕은 백제군을 물리친 직선을 일길찬으로 특진시키고, 병졸들에게도 후한 상을 내려 사기를 돋우었다.
미추왕은 국정안정책을 신하들과 토론하고 그 토론장에서 도출된 결정을 직접 정책에 적용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268년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 놓고 자신의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경연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왕와 신하가 같이 정치 및 법제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합의된 일을 실천에 옮기는 혁신적인 정책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또 각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조사해 오도록 함으로써 민심과 민생의 안정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추왕은 272년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을 모두 없애라'는 특명을 내리고 지방 귀족이나 관아에서 사사로이 백성을 부역게 동원하여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금하였다.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노동력을 함부로 착취하지 않고 식량을 생산하는 농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은 궁궐을 신축하는 일도 신하들의 주청이 있었지만 한마디로 거부하였다.
이렇듯 철저하게 백성들의 입장에서 모든 정책을 추진하자 미추왕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이 강해져 민심은 물론, 정치, 경제, 군사 전반에 걸쳐 매우 안정되었다.
당시 백제의 고이왕은 호시탐탐 신라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공격해 왔지만, 미추왕은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았다. 274년 백제가 침공하였으나, 신라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했고, 278년에도 신라의 전초 기지인 괴곡성(충북 괴산 지역)을 포위하였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백제의 침입이 계속되자, 미추왕은 양산에서 대대적인 군대를 사열하여 위용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백제는 283년 9월에 다시 변경을 침략하였고, 10월에는 다시 괴곡성을 포위하였으나 일길찬 양질을 보내 백제군을 격퇴시켰다.
백제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미추왕은 노구를 이끌고 284년 2월에 변경 지방 순행길에 올라 그곳을 지키는 군졸과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는 그해 10월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아마 험한 변경 지역을 순행하다가 병을 얻은 탓인 듯하다.
미추왕은 즉위 초부터 일관되게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달래는 일을 왕의 제일 소임으로 생각하였고 정책도 일관되게 집중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신뢰는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심지어 그가 죽고 난 뒤에도 백성들은 그의 신령이 나라를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정도였다. 미추왕도 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능은 대릉이다. 대릉은 죽장릉 또는 죽현릉이라고도 하는데, 흥륜사 동쪽에 마련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추왕의 왕비는 조분왕의 차녀 광명부인 석씨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또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기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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