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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9 : 신라의 역사 18 (제11대 조분왕)

두바퀴인생 2011. 1. 7. 05:27

 

 

 

한국의 역사 119 : 신라의 역사 18 (제11대 조분왕)

 

제11대 조분왕

조분이사금(助賁泥師今, ? ~247년, 재위 230년~247년)은 신라의 제11대 임금이며,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骨正), 혹은 홀쟁(忽爭) 갈문왕이며, 어머니는 구도(仇道) 갈문왕의 딸 옥모(玉帽)부인이다. 내해 이사금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이다.

 

생애

230년 즉위함과 함께 연충(連忠)을 이찬에 임명, 군사를 정비한 뒤 이듬해 231년 음력 7월 이찬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해 감문국을 쳐 병합했다.

 

232년 음력 4월에는 금성을 포위하니, 이사금이 친정하여 적을 격퇴하고 1천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 음력 5월 왜가 다시 동쪽을 노략하니 음력 7월에 이찬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왜인과 싸우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236년 음력 2월에는 골벌국(骨伐國)의 아음부(阿音夫) 왕이 무리를 이끌고 와 신라에 항복하였다.

 

240년백제가, 245년 음력 10월에 고구려가 침공하였다.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고구려군에 패하고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이는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첫 번째 침공이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백제

 

 

 

 

 

 

 

 

제11대 조분왕 실록 

( ? ~서기 247년, 재위 서기 230년 3월~ 247년 5월,  17년 2개월)

 

좌충우돌하는 신라와 조분왕의 탁월한 국가 경영

조분(또는 제분)왕은 벌휴왕의 태자였던 골정의 장남이며, 옥모부인 김시 소생이다. 내해왕은 죽기 전에 태자 우로가 아닌 조카이자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넘기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자기가 조분을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남 우로를 태자로 삼은 것을 볼 때, 즉위 초부터 조분을 후계자로 생각한 것은 아닌듯하다. 내해왕은 조분을 자기 맏사위로 삼은 뒤에 꾸준히 그를 관찰하여, 조분의 인격과 능력이 능히 왕이 될만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조분은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나, 일처리에 능란하여 항상 명석한 판단을 내리는 까닭에 백성들이 경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조분이 내해의 아들들보다 여러 방면에서 뛰어났음을 말해 준다.

 

230년 3월 왕위에 오른 조분은 7월 내해왕의 태자였던 우로를 이찬에 임명하고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경북 김천시 개령) 토벌을 명령한다.

 

감문국은 원래 가야국에 속해 있다가 거등왕 때에 6가야 연맹 체제가 무너지자 신라가 지배권을 획득한 땅으로 판단된다. 감문국은 신라의 국상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토벌하였던 것이다. 감문국 뒤에는 가야가 도사리고 있었고 가야는 다시 왜에 모종의 협조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문국은 우로가 이끄는 신라군에 의해 무너졌고, 이어 조분왕은 그 땅을 속군으로 만들어 신라 땅으로 확정하였다.

 

그러자 231년 4월 왜군 수천이 금성으로 쳐들어왔다. 삼국사기는 이때 왜군이 침입한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졸지에 쳐들와 와 금성을 포위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왜국 입장에서 분명히 침략의 명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감문국 문제와 갚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임나(아라가야)를 기반으로 왜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가야는 왜의 동조 아래 감문국을 다시 가야 연맹으로 끌여들이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는 신라의 무력 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자 왜가 가야를 대신하여 신라를 침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가야는 왕자를 볼모로 신라에 보냈고 겉으로는 화친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한편에선 신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자력으로 신라의 영향력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왜를 끌여들인 것이다.

 

하지만 가야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금성을 급습한 왜군은 오히려 신라군의 반격에 밀려 병력 1천여 명을 잃고 퇴각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조분왕은 자신이 직접 출전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패퇴한  왜군은 232년 5월 다시 신라를 쳐들어 왔다. 왜의 해군은 신라의 동해안 마을을 약탈하였고, 조분왕은 우로로 하여금 왜군을 대적토록 했다. 우로는 바람과 화공을 이용하여 두 달 동안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결과 대승을 거두었다. 우로의 화공을 막아내지 못한 왜군은 전함을 모두 잃고 전 병력이 몰살하고 말았다. 이 싸움 이후 왜왕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몇 년에 걸친 왜군의 약탈로 해안가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그런 민심을 달래기 위해 234년 정월부터 조분왕은 순행길에 올라 난민들을 위로하고, 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지원하고 복구토록 하였다.

 

조분왕의 위세가 날로 더해 가자, 재위 7년(235년) 2월에 골벌국(경북 영천)의 왕 아음부가 스스로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후 조분왕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국제 관계도 원만해 졌다. 그러자 조분왕은 국토를 확장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 무렵, 백제에서는 호방한 성격의 고이왕이 즉위하여 영토 확장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고이왕은 240년 기어코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아마도 이때 고이왕이 신라 서쪽 변경을 침략한 곳은 소백산맥 서쪽에 개척한 충주 일원의 성으로 판단된다. 고이왕이 이 곳을 공격한 것은 백제 땅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조분왕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짙었다.

 

백제를 자극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한 조분왕은  북쪽으로 눈을 돌려 동예(한반도 낙랑)가 고구려에 무너진 이래 많은 지역이 주인없이 방치된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위나라의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라 한반도 변방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조분왕은 그런 현실을 십분 활용하여 북진정책을 감행하였다.

 

조분왕은 재위 15년(244년)에 석우로를 재상 격인 서불한에 임명하고 병사를 겸하게 하였는데, 다분히 호전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우로는 북진정책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진정책에 따라 신라군은 남한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245년에는 다시 북한강을 건너 칠중하(임진강)근처까지 다다랐는데, 이와 같은 행동은 고구려를 크게 자극하였다. 신라가 슬그머니 칠중하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소식을 접한 고구려 동천왕은 그해 10월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침공하자 우로가 군대를 이끌고 방어전을 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두책(경기도 포천)으로 물러나 대오를 정비하고 방어 준비에 임했다. 그 당시 겨울로 접어든 날씨로 병사들이 동상과 추위에 고생하자 우로는 직접 진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일일이 격려하고 불을 피워 추위를 피하도록 조치하였다.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랏다.

 

이렇게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고구려 진영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위나라 관구검이 평양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다급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고구려군은 일부 병력을 북쪽 전선으로 돌리는 한편 신라군도 고구려의 심기를 더이상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조분왕은 그런 와중에 245년 5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도 이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의 치세 중엔 재위 8년 메뚜기 떼와 17년 11월 지진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재해가 없었다. 심각한 가믐이나 장마에 대한 기사도 보이지 않고 백성들이 굶주림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없다. 타국과 전쟁에서 대부분 승리했다. 따라서 조분왕 치세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로인해 백성들은 석씨 왕실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조분왕의 가족은 세 부인에게서 2남 2녀를 낳았다. 왕비는 아이혜부인 석씨인데, 그녀는 내해왕의 장녀이다. 촌수로 따지면 그녀는 조분왕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녀의 소생으로 제13대 미추왕의 왕비 광명부인인 석씨와 석우로의 부인 명원부인 석씨가 있다.

 

조분왕의 둘째 부인은 갈문왕 나음의 딸 박씨이다. 그녀의 소생으로 제14대 유례왕이 있다. 그녀가 유례왕을 임신한 배경은 삼국사기에서 "그녀가 일찍이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안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임신이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그녀가 정식으로 조분왕과 혼인하지 않고 임신했음을 의미한다.

 

조분왕에겐 또 하나의 아들이 있었는데, 제15대 기림왕의 아버지 걸숙이다. 일설에는 그가 조분왕의 손자라는 말이 있으나, 아마도 만년에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걸숙의 생모가 누구인지 기록이 없다. 이는 걸숙의 생모가 왕실의 여자가 아님을 알려준다. 그녀 역시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고 조분왕의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