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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7 : 신라의 역사 16 (제9대 벌휴왕) 본문
한국의 역사 117 : 신라의 역사 16 (제9대 벌휴왕)
제9대 벌휴왕
벌휴이사금(伐休泥師今, ?~196년, 재위 184년~196년)은 신라의 제9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7번째 왕이다.
탈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只珍內禮) 부인이다.
아달라 이사금이 자식이 없어 박씨 왕조가 일시적으로 끊기고 석씨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 하니 이는 신라 사회에 2세기 말까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시사한다.
185년 음력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해 소문국(召文國)을 치게 하였다.
187년 음력 2월 백제가 공격,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가 파진찬 구도에게 명해 군사를 내 막게 하였다.
이듬해인 188년 음력 7월 구도가 백제군과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189년 음력 8월 백제가 다시 공격해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했다. 구도가 5백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패배, 이사금은 벌휴의 벼슬을 깎고 설지를 그 자리에 앉혔다.
192년 왜인 1천여 명이 기아를 피해 대규모로 신라에 도망왔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9대 벌휴왕 실록
( ? ~서기 196년, 재위 서기 184년 3월~ 196년 4월, 12년 1개월)
1. 벌휴의 등극 과정
신라사에서 벌휴왕의 등극은 어린 왕의 등장보다도 갑작스럽고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정치적 사건이다. 비록 그가 탈해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탈해가 죽은 지 백 년도 더 된 시점이었기에 탈해의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단순히 탈해왕의 후손이라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그는 탈해왕의 적자에게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의 아버지 구추는 탈해왕이 만년에 낳은 아들이라고 하지만, 누구의 소생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런 벌휴가 도대체 어떤 경로로 왕위에 올랐을까? 사실, 이 일에 아달라왕의 부인 내례부인이 깊숙히 관련되어 있다. 그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벌휴의 즉위는 그저 수수께끼 정도로 인식되기 쉽다.
벌휴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매는 아달라왕의 왕비 내례부인과 통정하고 있었다. 내례부인은 지마왕의 딸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막대하였고, 그녀의 후광에 힘입어 아달라왕은 즉위 초에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례부인이 이매와 상간하여 아이를 잉태하면서부터 아달라왕과 내례부인 사이에는 크게 벌어진 듯하다. 당시 신라 왕실에선 왕비가 왕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경우가 가끔 있었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사자라고 했다. 당시 왕비는 남편인 왕이 죽고 난 뒤에 다른 남자와 관계하였다. 그러나 내례부인은 남편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이매의 자식을 잉태한 것이다. 아달라왕은 이 일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내례부인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함부로 내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대신 이매를 죽인 듯하다.
아달아왕이 이매를 죽이자, 내례부인은 이매의 아버지 벌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아달라왕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아달라왕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달라왕과 벌휴의 싸움은 10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아달라왕 21년부터 31년 사이가 여기에 해당된다. 삼국사기는 이 10년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는데 이는 벌휴가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것을 감추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내례부인과 벌휴가 공모하여 아달라왕을 제거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제10대 왕 내해왕이 벌휴의 차남 이매와 내례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사실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내해왕의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 임금(벌휴)의 태자 골정과 차남 이매가 먼자 죽었고, 장손이 아직 어렸으므로 이매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내해왕 즉위는 아달라왕이 죽은 지 12년 이후의 일이다. 만약 그의 어머니 내례부인이 아달라왕이 죽은 뒤에 이매와 통정하여 내해왕을 낳았다면, 내해는 즉위 당시 기껏해야 열두 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소년이어야 한다. 그런데 내해가 왕위에 오른 것은 골정의 아들이 장손이기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내해왕은 이미 성장한 상태였으며, 당시 성년의 나이는 열다섯 살 이상이었다는 뜻이다. 이는 내례부인과 이매의 상간이 아달라왕 재위시에 이뤄진 일이었음을 증명한다.
이매가 아달라왕 재위시에 죽은 것은 벌휴왕이 즉위한 과정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벌휴의 즉위는 순전히 내레부인의 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석씨 일족의 힘은 극히 미약한 상태였다는 점과 골정의 아들인 장손을 제치고 이매의 아들인 내해왕이 벌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것 등이 그 증거이다. 만약 이매가 당시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이매가 욍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즉위 당시에 여러 손자가 있을 정도로 벌휴가 늙은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때 이미 이매가 죽고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벌휴는 내례부인의 권력에 힘입어 이매 대신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로써 신라는 석씨 왕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2. 예언자 벌휴왕과 석씨 왕조의 개창
벌휴(또는 발휘)왕은 탈해왕이 만년에 낳은 아들인 각간 구추의 아들이며, 지마왕의 딸 내례부인 김씨 소생이다. 구추는 탈해가 죽었을 때, 왕위 계승권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이다. 이는 그가 정실부인 소생이 아니며, 당시에 매우 어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탈해왕의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탈해의 양자로 인식된 김알지 가문과는 각별한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김알지 가문에 장가를 들 수 있었다. 구추는 김알지 집안에 의지하여 왕족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는 벌휴에 대해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믐과 시절의 풍흉을 미리 알았다. 또한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 불렀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은 벌휴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통한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졌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해도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아들 이매가 내례부인과 관계하기 전까지는 정치와는 무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점을 쳐서 앞 일을 에언했다는 신통한 능력에 대한 기록은 그가 천기를 읽는 일에 종사하는 일관이나 종교적 일에 종사하는 무자(무당)였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잇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그의 경력은 매우 긍정적으로 이용되었던 듯하다. 예언자로 그의 명성은 그가 신이나 하늘의 이름을 내세워 백성들을 선동하고 군대를 이끄는 데 용이한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벌휴왕은 즉위 초에 주로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즉위 이듬해 정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올리고 죄수들을 사면함으로써 왕으로써 위엄을 갖추었다. 2월에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경북 의성)을 정벌하였는데, 군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런 일로 왕위를 다진 그는 186년 정월 직접 전국을 순행하면서 주와 군을 둘러보고 민정을 시찰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듬해에는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농사철에 토목 공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년 2월에 백제가 모산성(전북 남원 운봉)을 공격해 오는 바람에 신라는 다시금 전쟁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169년에 애걸하다시피 해서 신라에게 화친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했던 백제의 초고왕이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을 만화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걸어온 싸움이었다. 이에 벌휴왕은 파진찬 구도에게 군대를 주어 방어케 하였다.
신라의 선방으로 구도에게 밀린 백제군은 일단 물러났다가 189년 7월 구양성(충북 옥천 지역)을 공격해 와서 한바탕 접전을 벌였다. 첯 대결에서 백제군은 병력 5백을 잃고 퇴각하였는데 구도의 승리였다.
하지만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백제군은 190년 8월 다시 원산(경북 예천 용궁)을 함락하고, 진격하여 부곡성(경북 군위 부계)을 포위하였다. 부곡성이 무너지면 바로 서라벌 길목인 영천이었다. 위기를 느낀 구도는 자신이 직접 기병 5백을 이끌고 나가 백제군을 급습하여 패퇴시키고 있던 중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구도는 그 여세를 몰아 백제군을 와산(충북 보은 지역)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던 백제군은 와산에 이르러 말머리를 돌려 구도에게 역공을 퍼부었다. 그곳은 백제군의 함정이었다. 구도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달아났지만 기병 5백은 모두 잃은 상태였다.
그 소식을 들은 벌휴왕은 구도의 죄를 물어 부곡 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백제군은 와산에서 구도의 기병 5백을 괴멸시켰지만 한 번 호되게 당한 뒤끝이라 그 뒤로는 감히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신라 벌휴왕은 말기에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2년 3월 서라벌에 석 자가 넘게 폭설이 내려 쌓였고, 5월에는 홍수가 나서 10여 군데의 산이 무너지는 등 천재가 있었다. 196년 3월에는 큰 가믐이 들어 백성들을 괴롭혔고. 4월에는 대궐 남쪽의 거목이 벼락을 맞아 탔으며, 금성 동문도 벼락을 맞는 등 불길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벌휴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도 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재위 10년인 193년 3월에 한기부 여인이 한 번에 4남 1녀의 다섯 쌍둥이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해 6월에는 왜인 1천 여 명이 기근을 견디다 못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식량과 다른 물건이 서로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벌휴의 재위는 석씨 왕조의 시작이었고 벌휴 이후 내해-조분-첨해-유례-기림-흘해 등이 모두 석씨의 후손들이다. 13대 미추왕이 비록 김씨이긴 하지만 그도 석씨 집안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석씨 왕실의 집권은 184년부터 356년까지 172년간 지속된 셈이다.
벌휴왕의 왕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그의 부인이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듯하다. 벌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죽고 없었고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골정이고, 둘째가 이매다. 골정은 벌휴왕 즉위 이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곧 죽었고, 이매는 아달라왕 부인 내례부인과 통정하여 아들을 낳게 되어 아달라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였다. 그로인해 내례부인과 아달라왕이 반목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내례부인이 벌휴 등과 공모하여 반정을 도모하여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권력투쟁 결과 벌휴의 승리로 아달라왕은 목숨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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