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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5 : 신라의 역사 14 (제7대 일성왕) 본문
한국의 역사 115 : 신라의 역사 14 (제7대 일성왕)
제7대 일성왕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154년, 재위 134년~154년) 또는 일성왕(逸聖王)은 신라의 제7대 국왕으로,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이라고도 하며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부인이다.
즉위 4년 137년과 즉위 6년인 139년에 말갈이 침입해 이듬해인 140년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세웠다.
142년 말갈 공격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좌절되었다.
124년 음력 10월 압독이 반란해 군사를 내어 토벌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제7대 일성왕 실록
( ? ~서기 154년, 재위 서기 134년 8월~ 154년 2월, 19년 6개월)
1. 망명객의 한을 품고 여든 살에 왕위에 오른 천일창
유리왕의 적장자인 일성왕은 유리왕이 죽은 후 77년이나 지난 뒤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그는 유리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거나 그 후대의 자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여러 곳에서 일성왕을 유리왕의 아들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일성왕이 유리왕이 만년에 낳은 장자가 확실하다면 그는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오른 셈이다.
이렇게 늦게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즉위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일성왕은 유리왕이 죽을 당시 태자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기껏해야 젖먹이 아이에 불과하였고, 조정과 왕권은 모두 그의 고모부인 탈해가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위는 탈해가 차지하였고, 그는 그저 유리왕의 적장자라는 신분에 만족해야 했다.
탈해가 적자를 얻지 못하다가 만년에 후비의 몸에서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그가 제9대 벌휴왕의 아버지다. 그렇게 어렵사리 아들을 얻긴 했지만, 탈해는 구추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었다. 탈해왕이 죽을 당시에 구추는 일성이 그랬던 것처럼 한낱 젖먹이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권을 상실했던 것이다. 따라서 왕위 계승의 제1순위는 당연히 일성의 차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성은 제왕의 꿈을 접어야 했다.어처구니 없게도 왕위는 그의 동생 파사에게로 돌아갔다. 신하들이 일성이 적장자이긴 하나 파사만큼 총명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의 왕위 계승권을 앗아갔던 것이다.
일성을 제치고 파사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파사의 부인 사성부인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손녀였기 때문이었다.
왕위를 놓친 일성은 절망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결국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그의 망명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수인천황 3년(서기93년) 3월 기사에 나온다.
'수인천황 3년 봄 3월, 신라 왕자 천일창이 내귀하였다.... 처음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에 정박하여 육속읍에 있었다. 그러자 천황이 사람을 보내 천일창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천일창이 "저는 신라국 왕자입니다.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아우 지고(파사)에게 주고 왔습니다."라고 답하였다....천황이 천일창을 불러 "심마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 두 읍을 줄 테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하였다. 천일창이 "만일 천은을 내리시어 신이 원하는 곳을 주신다면, 신이 직접 제국을 돌아다녀 보고 살 곳을 정하겠으니, 신의 마음에 드는 곳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천황이 이를 허락하였고 천일창은 토도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북쪽인 근강국의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을 거쳐 서쪽인 단마국에 가서 거주지를 정하고 살았다. 근강국 경촌 골짜기의 도기쟁이들은 천일창을 따라온 자들이다. 천일창은 단마국의 출도 사람 태이의 딸 마다오에게 장가를 들어 단마제조를 낳았다. 제조는 단마일유저를 낳았다. 일유저는 청언을 낳았고 청언은 전도간수를 낳았다.'
일본 서기에 등장하는 이 천일창이라는 인물을 일성왕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본의 수인천황 3년은 일본서기 기년으로는 서기전 27년이다. 만약 일본서기의 기년대로 천일창이 왜에 건너간 것이 서기전 27년이라면, 이때 신라는 박혁거세왕 31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일창이 왜에 건너간 것은 서기전 27년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일본서기의 연도는 인덕천황 시대 이전의 것에 대해서는 2갑자 더한 연도로 계산한다. 이는 일본서기의 연도가 삼국사기의 연도와 정확하게 120년의 차이가 난다. 그런 현상은 응신, 인덕천황 대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인덕천황 이전의 기년에 2갑자를 더해서 연도를 환산하게 된 것이다.
일본서기에 이처럼 120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는 것은 일본서기 편자들이 고의로 여왕들의 비중을 약화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은폐하고 조작한 결과이다.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할 때, 고대 일본의 본주 지역은 서기 170년대부터 410년대까지 약 200여 년은 비미호 계통의 혈족들이 다스렸기 때문에 본주 대부분을 여왕국이라 불렀다. 그런데 일본서기가 쓰여질 당시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대거 왜곡되어 비미호 계통의 통치시대는 축소 은페되었고 60갑자의 간지만 억지로 맞춰 놓은 형태가 되었다. 그 결과로 일본서기의 연대는 120년의 오차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기년으로 서기전 27년은 서기 93년으로 보아야 하며, 이때는 신라 파사왕 14년에 해당한다. 실지로 파사왕은 형인 일성왕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으므로 일본서기에서 천일창이 왕위를 아우에게 주고 왔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즉 천일창이 왕위를 양보한 아우는 파사왕이며. 파사왕에겐 형이라곤 일성왕밖에 없으므로 천일창이 곧 일성왕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일창은 왜 왜국으로 망명했을까? 일본서기는 그의 망명 배경에 대해서 단지 '일본에 성황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는 형식적인 말 이외에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다. 그의 망명 이유는 삼국사기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그의 망명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태자로 태어났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던 그는 천우신조로 탈해왕이 왕위를 넘겨 줄 마땅한 후계자를 얻지 못한 덕분에 다시 한번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부각된다. 그런데 그야말로 승계를 목전에 두고 이복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야 하는 불행한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적장자인 그를 제치고 왕위에 오른 파사왕과 그를 추대한 신하들에겐 천일창이란 존재가 너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가급적 정치 일선에 나서지 말아야 했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사왕이 다시 후계자를 정할 즈음에 그의 존재는 또 한 번 골칫거리로 인식되었을 터이고, 그런 상황은 천일창의 목숨마저 위협했을 것이다.
그런 처지에서 마치 은둔 생활을 하듯 13년을 보낸 천일창은 마침내 고국을 등질 결심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왜국으로 망명길이었을 것이다.
망명 당시 여러 도공과 노비들이 그를 따랐고, 망명객인 그의 손에 왜국 왕에게 바칠 여러 보물이 쥐어졌던 것을 볼 때, 파사왕과 신라 신하들은 그의 망명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의 망명은 거의 강제적이었거나 강압적인 눈총에 못 이겨 마지못해 선택한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던 그는 쫓겨나듯 왜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로부터 무려 40여 년을 만리 타국의 객지를 떠돌며 살아야 했다.
그 40년 세월을 대충 정리하자면 이럴 것이다.
그의 생은 그렇게 망명객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의 나이는 어느듯 여든을 향해 치달았다. 본국에서는 파사왕이 죽은 지 오래였고, 그의 아들 지마왕의 치세도 20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쯤 됐으니, 그가 왕위 따위에 미련을 지니고 있을 리도 없었다. 어쩌면 망명길에 오르던 그때, 이미 그의 제왕에 대한 꿈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근강 골짜기에서 몸을 기댄 채 그저 망명객의 한을 달래며 지내는 한낱 보잘것없는 노인으로 늙어 어느듯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낭보가 찿아들었다.
조카 지마왕이 후계자도 하나 얻지 못하고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속히 귀국하여 왕위를 이어달라는 본국 신하들의 요청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40여 년의 망명 생활은 그렇게 종결되었고, 천일창는 여든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서기 134년 8월 본국으로 돌아와 신라 제7대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그가 바로 일성왕이다.
2. 계속되는 시련과 일성왕의 노심초사
일성왕은 유리왕의 장자이나 누구의 소생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를 적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왕비의 소생인 것은 분명하지만, 유리왕의 첯 왕비인 운제부인에게서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유리왕은 만년에 일성을 얻었고, 그때 운제부인은 죽었거나 살아 있다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노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은둔 생활과 망명 생활을 거친 뒤에 여든에 가까운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일성은 즉위하자 곧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여 덕을 드러내고, 시조묘에 제사를 올려 스스로 위상을 세상에 알렸다. 조정을 새롭게 개편하기 위해 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근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또한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여 여론을 수렴하는 정치토론장으로 이용하였다.
이 무렵, 말갈이 대대적으로 국경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말갈은 재위 4년(서기 137년)에 국경을 침입하여 장령 지방의 방책 다섯 곳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이에 일성왕은 이듬해 7월 알천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고 말갈의 재침에 대비했다. 또한 10월에는 북쪽으로 순행길에 올라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올리며 영토 수호를 다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말갈의 침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42년 7월에 느닷없이 때 이른 서리가 내려 콩이 모두 얼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8월에는 말갈이 장령을 다시 침입하여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갔다. 10월에는 다시 말갈이 습격해 왔다. 하지만 이때 천둥이 심하게 올리자 스스로 물러났다.
일성왕은 143년 2월에 장령에 다시 목책을 설치하는 한편, 말갈에 대한 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45년 7월 마침내 말갈을 정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찬 웅선이 불가능하다고 반대하자 물러섰다. 하지만 말갈 정벌론은 말갈의 움직임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덕분에 이후로는 말갈의 침입은 거의 사라졌다.
일성왕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농사를 크게 장려하는 한편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45년 봄과 여름에 걸쳐 가믐이 계속되는 바람에 남쪽 지방이 흉년에 시달려 굶주리는 백성이 늘어났다. 그러자 이듬해 10월에 압독(경북 경산)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민심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일성왕은 결국 압독의 백성들을 대거 남쪽으로 옮겨 반란의 소지를 없앴다.
이렇듯 전쟁과 내란으로 여러 차례 곤란을 당하자, 일성왕은 147년 7월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전국에서 장수가 될 만한 자들을 모두 천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모집된 군사로 국방력이 크게 강화되었으나 하늘은 여전히 일성왕을 괴롭혔다 149년 11월에는 금성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숱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이듬해엔 4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가믐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151년 2월에는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이찬 웅선이 죽었고, 3월에는 때아닌 우박이 내려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153년 10월에는 궁궐에 불이나 대문이 불탔고, 혜성이 동쪽과 동북쪽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민심이 흉흉했다.
일성왕은 계속되는 시련으로 노심초사하다가 154년 2월에 백살에 가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선대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일성왕은 왕비 박씨를 비롯한 여러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었다. 왕비 박씨는 지소례왕의 딸이다. 언제 시집왔는지, 지소례왕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다. 그녀의 소생으로 제8대 왕인 아달라왕이 있다. 왜국에 있을 때 단마국 출도 사람 태이의 딸 마다오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 단마제조는 일성이 환국할 때 같이 오지 않고 왜국에 남아 살면서 후손을 퍼뜨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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