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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6 : 신라의 역사 15 (제8대 아달라왕)

두바퀴인생 2011. 1. 4. 12:02

 

 

 

한국의 역사 116 : 신라의 역사 15 (제8대 아달라왕)

 

제8대 아달라왕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 ~184년, 재위 154년~184년) 또는 아달라왕(阿達羅王)은 신라의 제8대 국왕으로,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과 지소례왕(支所禮王) 박씨의 맏아들이며, 왕후는 지마 이사금의 딸 내례부인 박씨(內禮夫人 朴氏)이다.

 

157년 음력 2월 감물현(甘勿縣)과 마산현(馬山縣)을 두었으며, 음력 3월에 장령진(長嶺鎭)에 순행했다.

 

168년 죽령(竹嶺) 길을 열었으며,

 

162년 사도성(沙道城)에 순행해 병사들을 위로했다.

 

165년 음력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했다. 아달라는 백제 개루왕에게 길선의 신병을 요구했으나 개루왕은 이를 무시, 아달라가 백제 원정을 나섰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2년 뒤인 167년 음력 7월에 백제의 역습을 받아 두 성이 무너지고 주민 천여 명을 빼앗겼는데, 음력 8월 일길찬 흥선을 시켜 군사 2만으로 이를 치고 왕이 기병 8천기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니 백제가 노략한 주민들을 반환하고 강화를 청하였다.

 

173년 음력 5월 야마타이코쿠(邪馬台国:사마대국)의 히미코(卑彌乎: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왔다.

 

신라 말기에는 그의 후손들이 3대(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에 걸쳐 왕위를 이었다.

 

가계

 

경주 박씨 족보에 나오는 인물

 

동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제8대 아달라왕 실록 

( ? ~서기 184년, 재위 서기 154년 2월~ 184년 3월,  30년 1개월)

 

1. 동분서주하는 아달라왕과 불운한 만년

아달라왕은 일성왕의 적자이며, 지소례왕의 딸 박씨 소생이다. 그는 키가 7척이었으며, 풍채가 뛰어나고 얼굴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전한다. 7척의 키라면 거인에 해당하는데, 얼굴이 기이하게 생겼다는 것으로 보아 거인들에게서 곧잘 나타나는 말단 비대증 같은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그는 계원을 이찬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하고,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대거 사면하는 등 관례에 따른 즉위 후속 절차를 마쳤다.

 

즉위 초기엔 비교적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 재위 3년(156년) 4월에는 계립령(경북 풍기에서 단양으로 통하는 조령 동쪽 20리 지점)에 길을 뚫고, 재위 4년 2월에는 감물(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충남 보령의 남포면)에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였고, 같은해 3월에는 말갈군과 대치하고 있던 장령진에 몸소 거동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하사하는 등 여유도 보였다. 재위 5년 3월에는 죽령을 개통하였다.

 

그러나 재위 7년(160년) 4월에 폭우로 인하여 알천이 넘쳐서 많은 집이 떠내려 가고, 금성 북문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달라왕의 곤욕은 시작되었다. 더구나 이듬해 7월에는 메뚜기 떼가 번창하여 곡식을 해치는 바람에 크게 흉년이 들었고, 바닷고기 떼가 육지로 올라와 죽는 이변이 생기기도 하였다. 아마도 오랜 가믐과 무더위로 해수면이 뜨거워져 바다 속에 산소가 부족하여 생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중대한 이변으로 생각하고, 제왕의 부덕으로 하늘이 진노한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아달라왕은 이 같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사도성을 찿아 병사들을 위로 하기도 하였으나, 한번 흔들린 민심은 쉽게 제자리를 찿지 못했다. 그리고 급기야 신라 사회는 우려했던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재위 11년 2월에 '서울에서 용이 나타낫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곧 반란의 전조 현상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이듬해인 165년 10월에 기어코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아찬 길선이 도모하였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실패하자 길선은 백제로 달아났다. 아달라왕은 백제 개루왕에게 서신을 보내 길선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분노한 아달라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의 성을 공격하였으나 수성전에 밀려 군량이 부족하자 철수하고 말았다.

 

그무렵 백제에서는 큰 변화가 생겼는데, 기루왕이 죽고 초고왕이 즉위하였으며, 초고왕은 전왕에 비해 대단히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신라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하였다. 167년 7월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주민 1천여 명을 잡아갔다.

 

이때 공격당한 두 성에 대한 구체적인 지명은 나와있지 않으나, 아달라왕이 즉위 초에 계립령과 죽령을 개통한 것으로 보아 충청도 지역에 건설한 신라 전초 기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갑작스런 백제의 공격으로 두 성이 격파당하자 , 아달라왕은 당장 일길찬 흥선에게 병력 2만을 안겨 백제 공략에 나섰다. 또한 자신도 기병 8천을 거느리고 참전하였다.

 

신라가 대병 2만 8천으로 총공세에 나서자, 백제의 초고왕은 크게 겁을 먹고 잡아갔던 주민을 돌려주며 화친을 애걸했다. 그러자 아달라왕은 일단 백제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병력을 철수하였다. 아달아왕도 대병을 거느리고 남한강을 건너는 자체가 문제였고 부교를 설치해야 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을뿐 아니라 도강 후에 철수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또 대병이 전선에 집결한 것은 도성이 텅빈 상태였고 이때 왜나 가야가 침공해 온다면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또 한강을 건너 백제 성을 무너뜨린다는 보장도 없었고 별 성과 없이 철수한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달라왕은 이러한 여러 속사정을 고려하여 화친을 받아들이고 병력을 철수하였던 것이다.

 

신라군이 화친을 받아들이고 잡혀갔던 주민들을 데리고 회군하자, 초고왕은 몹시 자존심이 상했고 속이 쓰렸던 모양이다. 애걸하다시피 화친을 하여 전쟁은 모면했지만, 제왕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뒤였기 때문이다. 마침 170년 10월 서라벌에 큰 지진이 일어나고 우박과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치자, 만회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백제의 초고왕은 병력을 보내 신라 변경을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하지만 아달라왕은 백제의 공격에 미쳐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자연재해로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172년에는 서라벌에 전염병이 돌아 민심이 혼란스러웠다.  또 174년에는 정월부터 흙비가 내리더니, 2월부터 가믐이 시작되어 우물과 샘물이 거의 모두 말라 버리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삼국사기는 이 해로부터 10년간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가, 184년 3월에 아달라왕이 죽었다는 기록만 남기고 잇다.

 

아마도 이 10년 동안 신라 사회엔 엄청난 소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굶주린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여 또 하나의 사회 불안 요인으로 적용했을 것이다.

 

왕족들 간에도 치열한 정권 다툼이 진행되어 급기야 아달라왕이 살해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심지어 왕비 내례부인 박씨마저 아달라왕을 배반하고 반란군 편을 들었던 모양이다. 내례부인은 아달아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벌휴왕의 돌째 아들 이매와 정을 통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제10대 내해왕이다. 이런 사실은 지마왕의 딸인 그녀가 아달라왕을 제거하고 벌휴왕을 앉히는 데 깊이 관여하였던 모양이다.

 

이렇듯 아달라왕의 만년은 매우 불행하였다. 그가 죽은 뒤 아들이 없었다는 것으로 봐서, 그의 자식들은 내란이 지속되던 10년 동안 모두 살해된 듯하다.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왕비마저 배반하여 그의 목에 칼을 겨누었으니 정말 참담한 말로가 아닐 수 없다.

 

아달라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내란 중에 모두 살해되었고 내례부인은 반란군 이매와 정을 통하고 아달라왕의 권위가 흔들리자 반역 무리와 제휴한 뒤, 아달라왕을 제거하는데 동참하였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