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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4 : 신라의 역사 13 (제6대 지마왕) 본문
한국의 역사 114 : 신라의 역사 13 (제6대 지마왕)
제6대 지마왕
지마이사금(祗摩泥師今, ?~134년, 재위 112년~134년) 또는 지마왕(祗摩王)은 신라의 제6대 왕이다. 성은 박(朴)으로서 파사왕(婆娑王)의 적자이며, 어머니는 사성부인(史省夫人), 왕후는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의 딸인 애례부인(愛禮夫人 金氏) 김씨이다.
치세
즉위 4년인 115년 음력 2월 가야(伽耶)가 남쪽 변경을 공격하자 음력 7월 가야 친정에 나서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는데, 가야인들의 복병에 걸려 패하고 간신히 퇴각하였다. 이듬해 음력 8월 다시 1만 병사를 거느리고 가야 정벌에 나서 공성전을 벌였으나 결국 다시 물러났다. 이후 지마 이사금은 가야정벌을 포기했다.
즉위 10년인 121년 음력 4월 왜(倭)의 침입을 받았는데, 이때의 여파가 심했는지 이듬해 음력 4월 수도 주민들이 왜의 침입이 다시 있는 게 아닌가 루머가 퍼져, 이찬 익종 등에게 시켜 수습하였다. 이듬해인 123년 왜와 강화하였다.
즉위 14년인 125년 음력 1월과 음력 7월에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 이에 지마 이사금이 백제의 기루왕에게 원군을 청해 백제가 다섯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파사 이사금 26년 (105년) 화친한 이후 지마, 일성 이사금 2대동안 평화적이었다.
가계
경주 박씨 족보에 나오는 계보
동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제6대 지마왕 실록
( ? ~서기 134년, 재위 서기 112년 10월~ 134년 8월, 21년 10개월)
1. 외교 능력을 시험받는 지마왕과 복잡한 국제 관계
지마(혹은 지미)왕은 파사왕의 적자로 사성부인 김씨 소생이다. 일찍이 태자에 책봉되어쓰며, 112년 10월 부왕 파사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파사왕이 알지계와 탈해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탓에 즉위 초기에 제왕으로서의 위상 정립에 애를 먹은 것에 비해 지마왕은 별다른 잡음 없이 순탄하게 왕좌에 올랐다. 그래서 지마왕 대의 정치는 비교적 안정되어 권력 다툼이나 지방 세력의 도전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국제 관계는 복잡하게 돌아가 외교 능력이 매우 중시되던 시대였다.
왕위에 오른 지마왕은 즉위 이듬해인 113년 2월에 대대적으로 조정을 개편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옥권을 파진찬으로, 심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삼았다. 이들의 성씨를 생략하고 이름만 언급한 것은 이들 모두 박씨 성을 가진 왕족들이며 대부분 지마왕의 형제 또는 사촌들이었을 것이다.
그해 3월에 백제의 기루왕이 사신을 보내왔는데, 이는 파사왕 27년 (106년)에 신라와 백제 사이에 이뤄진 화의 조약을 확인하는 조치였다.
백제와 이렇게 화친 조약 관계에 있었지만, 가야와는 여전히 적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가야는 파사왕 29년(108년)에 비지국, 초팔국, 다벌국 등을 신라에 빼앗긴 이래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114년 3월에 쏟아진 우박과 홍수로 신라가 곤경에 처하지, 115년 2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 남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지마왕은 보복으로 그해 7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야를 공격하여 황산하(경남 양산시 원동면 앞 낙동강)를 건너다가 숲 속에 매복하고 있던 가야군에 순식간에 포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긴 했지만 신라 병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더구나 지마왕은 왕위에 오른 후 첯 출전이었다.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야를 응징하여 위상을 높이려던 그는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돌아온 셈이었다.
지마왕은 그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이듬해 8월에 다시 군대 1만을 동원하여 가야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신라군의 위세에 놀란 가야군은 수성전으로 일관하며 장기전으로 돌입하였다. 가야성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신라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가을 장마비가 내리면서 장마가 오자 신라군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찰수하였다.
두 번의 출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지마왕은 인내하며 더 이상 출병을 자제했다. 가야 역시 신라의 대군을 의식하여 함부로 신라 땅을 넘보지 못하고 왜를 부추겨 신라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당시 왜는 백제 및 가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고, 신라는 가야와 왜의 관계를 방해하는 입장이었다. 그 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왜는 가야의 요청을 받고 신라를 침공했다.
신라인들은 왜에 대한 두려움은 대단하였는데, 남쪽과 동쪽이 바다를 끼고 있는 신라의 입장에서 왜의 침략은 언제던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또한 그들의 약탈은 잔인하고 무자비하여 신라인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다.
재위 9년(120년) 3월에 서라벌에 전염병이 돌자 신라 사회가 어수선해졌고, 왜병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로 인해 민심이 흔들리자 지마왕은 조정을 대폭 개편하고 대증산성을 쌓아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해 4월 소문만 무성하던 왜병의 침입이 현실로 나타났다. 왜군은 바다를 타고 동쪽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그러나 신라의 선방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듬해 4월에 또다시 왜병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백성들이 피난 보따리를 싸서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지마왕은 관리들을 각 고을에 파견하여 왜병의 침입은 헛소문이라며 민심을 다독거렸다. 덕분에 민심은 어느정도 가라 앉았으나 여전히 왜군의 침입에 대한 염려는 여전하였다.
그렇듯 난리에 대한 근심으로 온 나라가 한바탕 혼란을 겪고 있는데, 그해 7월에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여물지도 않은 곡식을 완전히 망쳐 놓았다. 그로 인해 큰 흉년이 들었고 전국은 온통 도둑으로 들끓었다.
그런 가운데 지마왕은 중대한 결심을 해야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왜병이 쳐들어 온다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왜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재위 12년(123년) 3월에 지마왕은 마침내 왜와 화친을 맺는데 성공하였는데, 당시의 신라 국내의 위태로운 상황을 고려할 때 아마 굴욕적인 저자세로 왜에 화친을 맺은 것으로 판단된다.
덕분에 왜군의 침입에 대한 염려는 수구러들었지만 우환은 그치지 않았는데, 북쪽의 말갈이 크게 번성하여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말갈은 원래 흑룡강,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고구려가 번성하자 흑룡강, 송화강 유역의 말갈은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말갈족은 남쪽으로 밀려 내려온 상태였다. 고구려가 한반도 동북 지역의 동옥저와 낙랑(동예)을 병합하자 말갈은 더욱 위축되어 반도 서쪽의 백제와 떠오르는 신흥국인 신라의 영토 확장 정책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자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구려에는 머리를 숙이는 반면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상태였다.
지마왕 14년(125년) 장월, 말갈이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 북쪽 변경을 공격해 왔다. 갑작스런 말갈의 기습으로 신라는 관리와 백성들의 피해가 컸으며 말갈은 그 여세를 몰아 7월에는 대령책을 돌파하고 니하를 도하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다.
위기를 느낀 지마왕은 급히 백제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백제는 다섯 장수를 파견하여 신라군과 같이 방어전에 나서자 말갈은 스스로 물러났다. 신라는 말갈과 처음 상대하는 전투였고 말갈군에 대해서 전혀 그들의 전술이나 전략에 생소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는 건국 초기부터 말갈과 대적하면서 성장하였고, 누차에 걸쳐 말갈을 격파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백제 장수 중에서 말갈군 공략에 전공이 있는 뛰어난 장수를 선발하여 보냈던 것이며 신라군을 지휘하여 말갈군을 격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말갈군의 격퇴로 신라 사회는 다시 안정을 되찿고, 이후 지마왕의 치세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재위 18년 가을,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조정을 일부 개편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듯 지마왕의 말년은 무난히 흘러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재위 17년에 동쪽 지방에 큰 지진이 발생하였고, 29년 5월에는 큰 홍수가 나서 민가가 대거 물에 잠기고, 21년 2월에는 궁궐에 불이 나 남문이 불타는 등 천재지변이나 화재로 재난이 계속되었다. 그가 죽던 23년 봄과 여름에는 심한 가믐으로 흉년이 들었고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던 즈음 지마왕은 134년 8월에 생을 마감했다. 칭호는 이사금을 썼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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