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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3 : 신라의 역사 12 (제5대 파사왕)

두바퀴인생 2011. 1. 1. 04:06

 

 

 

한국의 역사 113 : 신라의 역사 12 (제5대 파사왕)

 

제5대 파사왕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112년, 재위 80년~112년) 또는 파사왕(婆娑王)은 신라의 제5대 왕이다.

 

 

생애

은 박씨이며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이다. 왕비는 허루 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인데 본래 유리왕의 맏아들 일성(逸聖)이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라 해, 파사와 일성 사이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투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81년 봄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이어서, 파사 이사금은 민생을 살피고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으로 군비를 가다듬는 등 체제정비에 나섰다. 

 

 즉 81년 음력 3월 주, 군을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구휼하며 교수형 및 참수형이 아니면 모두 용서하였다. 82년 봄 음력 1월에 영(令)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 특히 군사들에 대한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가다듬었다는 것은 사로국의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가 정비되어 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로국의 힘은 경주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84년 봄 음력 2월에 명선(明宣)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으로 삼았다. 신라의 17관등은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법흥왕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나 파사이사금 시기에도 이찬이나 파진찬 등의 관직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름 음력 5월에 고타군주(古抒郡主)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 남신현(南新縣)에서 보리줄기가 가지를 쳤다. 크게 풍년이 들어 여행하는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고타군은 지금의 안동지방을 일컫는데 이 지역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사이사금 시기에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타군에 있던 반(半)독자적인 권력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연맹 속의 일원으로서, 맹주국인 사로국에 특이한 생산물이나 조장 등을 바치는 일종의 납을 바침으로써 사로국에 충성을 서약하거나 동맹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남신현은 경주 남쪽의 어떤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타군의 군주가 바쳤다고 하는 청우는 크고 튼튼하게 잘 자란 소를 의미한다. 한편, 이 내용을 농업생산력이 곧 국력이던 당시에 우수한 종자를 배포함으로써 그것을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85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였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은 걸로 보아 곧 격퇴된 것으로 생각된다.

 

87년 음력 7월가소성마두성을 쌓았다. 문헌 사료나 고고학 자료 등을 검토한 결과 마두성은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대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당시 거창군은 가야의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하므로, 가조면 일대에 성을 쌓았던 시기는 파사이사금 시기가 아니라 한참 후대의 일이라고 해석되거나, 파사이사금 시기에 마두성을 쌓은 것이 틀림없다고 인정한다면, 마두성을 거창지역의 성이 아니라 경주 인근에 쌓았던 작은 성이라고 해석된다.

 

90년 음력 7월에 사자(使者) 10명을 나누어 파견하여 주주(州主)와 군주(郡主)를 감찰하여, 공무에 힘쓰지 않거나 밭과 들을 크게 황폐하게 한 자의 관직을 강등시키거나 파면하였다.

 

93년 정월에 윤량(允良)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啓其)를 파진찬으로 삼았다.

 

음력 2월에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을 몸소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 주었다.

 

94년 가야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였으나 아찬 길원(吉元)에게 기병 1천기를 보내 쫓게 하였다.

 

96년 음력 9월 가야군이 다시 습격해 왔으나 이때 왕이 5천기를 거느리고 친정, 대승을 거두었다.

 

97년 정월에 가야를 치러 하였으나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용서하였다.

 

102년 음력 8월, 음즙벌국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금관가야수로왕(首露王)에게 맡겼다. 수로가 판결을 내 땅을 음즙벌국에 귀속되게 하였다. 파사이사금이 진한 6부에 명해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게 하였는데, 모두 이찬을 보내 접대하게 했으나 한기부(漢祇部)만이 하급 관리를 보내 수로가 노하여 종을 시켜 한기부주 보제(保濟)를 죽이게 했다. 보제를 죽인 종 탐하리(耽下里)는 음즙벌의 왕 타추간(타鄒干)의 집에 숨었다. 파사이사금이 노해 음즙벌국을 치니 타추간이 항복하고, 실직(悉直), 압독(押督)의 두 왕도 항복하였다.

 

104년 음력 7월 실직이 배반하여 토벌하고 그 무리를 남쪽으로 옮겼다. 105년 백제와 화친했고, 106년 음력 8월 마두성주에 명해 가야를 치게 하였다.

 

108년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쳐 병합했다.

 

자연재해

  • 즉위 14년(93년) 음력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 즉위 17년(96년) 음력 7월에 폭풍이 일어났다.
  • 즉위 19년(98년) 음력 4월에 가뭄이 들었다.
  • 즉위 21년(100년)
    • 음력 7월에 우박이 내려 날아다니던 새가 죽었다.
    • 음력 10월에 서울(경주)에 지진이 일어나 민가가 쓰러지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 즉위 23년(104년) 음력 1월에 뭇 별들의 운석이 비오듯이 떨어졌으나 땅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 즉위 24년(105년) 음력 2월에 눈이 세 자나 왔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제5대 파사왕 실록 

( ? ~서기 112년, 재위 서기 80년 8월~ 112년 10월,  32년 2개월)

 

1. 현명한 군주 파사왕과 신라의 영역 확대

파사왕은 유리왕의 차남이며, 후비 소생의 서자이다. 서기 80년 8월에 탈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삼국사기에서는 파사왕을 유리의 아우 나로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어느 것이 더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는 탈해가 죽었을 때 신하들이 유리왕의 태자 일성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으나, 누군가 일성이 적자이긴 하지만 파사만큼 총명하지 못하다 하여 신하들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유리왕의 적자도 아니었고, 전 왕 탈해의 자식도 아닌 그가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탈해의 세력이 그를 지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탈해 집권기의 유력한 정치 집단의 하나인 김알지 세력의 지지도 필수적이었다. 파사왕의 왕비 사성부인의 성은 김씨 인데, 허루갈문왕의 딸이다. 허루갈문왕이 김씨라는 것은 그가 김알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파사왕은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왕위에 오른 셈이다. 이런 사실은 당시 탈해 세력의 핵심 인물이 김알지였다는 것과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이 김알지라는 것을 시사한다. 즉 그는 탈해왕 말기에 재상 격인 대보로서 장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후광에 힘입어 탈해의 아들 구추와 유리왕의 적자 일성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사왕은 다른 세력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까닭에 정치적 입지가 약하여 왕권이 미약했다. 그런 이유로 6부의 귀족들과 주변 소국 군주들에 대한 영향력도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즉위 초 그의 정책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데 집중되었다.

 

삼국사기는 그의 생활 태도에 대해 "절도 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꼈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칭송했다." 고 적고 있다. 파사왕은 스스로 검소한 삶의 모범을 보이며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즉위 이듬해 2월에는 몸소 주와 군을 순행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함으로써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다. 이를 기반으로 재위 3년 3월에는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농사를 장려하고 군대를 강화한다는 것은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파사왕은 불과 즉위 2년 만에 왕권을 장악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였다.

 

덕분에 재위 5년(서기 84년)에는 보리 농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와 '보리 한가닥에 여러 가닥이 생기는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고 삼국사기에 적고 있다. 파사왕의 농업장려 정책으로 보리를 개량하였고 그 시험 무대가 바로 남신현이었다. 이 정책의 성공으로 신라 사회는 주식인 보리 생산을 크게 증대시키게 되었다.

 

보리 개량 사업에 성공한 파사왕은 재위 11년(서기 90년) 7월에 전국 각 주와 군에 열 명의 감사를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조사하고, 공무에 성실하지 못하거나 농토를 개간하지 않고 황폐한 상태로 방치한 자가 있으면 직급을 내리거나 사직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저 농업장려정책으로 비치지만, 파사왕의 궁극적인 목표는 보리 개량과 농업 진흥을 수단으로 삼아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적 성과는 국방 분야에도 드러났다. 재위 6년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자, 파사왕은 재위 8년 7월에 가소성(경남 거창지역)과 마두성(경남 청도지역)을 신축하여 재침에 대비했다. 이 두 성을 신축한 것은 백제와 가야의 침입에 대비하고 동시에 그들 두 나라를 침입할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소성에서 소백산맥의 육십령만 넘으면 바로 백제 땅이었고, 마두성에서 낙동강만 건너면 가야의 중심지인 대야(경남 합천)을 공격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마두성 신축에 위기를 느낀 가야는 마침내 파사왕 재위 15년(94년) 2월에 마두성을 공격하자, 파사왕은 아찬 길원에게 병력 1천을 주어 가야군을 패퇴시켰다. 그리고 그해 8월 알천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함으로써 가야를 압박하였다.

 

위기를 느낀 가야의 김수로왕은 2년 뒤인 96년 9월에 군대를 보내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략해 왔다. 파사왕은 장세를 보내 대적하게 하였으나 패하여 전사했다. 그러자 자신이 직접 병력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가야군을 크게 무찔러 물리쳤다.

 

파사왕은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정월에 가야 정벌에 나서려 하였으나, 가야의 수로왕이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자 중지하였다. 수로왕의 화친 제의 이후, 신라와 가야는 몇 년 동안 서로 침입하지 않았다.

 

그동안 신라는 자연재해로 몇 차례 큰 어려움을 격어야 했다. 98년 봄에는 가믐이 심해 여름가지 이어졌고, 100년 7월에는 우박이 크게 쏟아져 날아가던 새가 떨어져 죽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로인해 농작물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해 10월에는 경도 서라벌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쓰러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파사왕은 그런 와중에도 왕권 확립에 박차를 가해, 이듬해 2월에는 월성을 쌓고, 7월에는 금성을 버리고 월성으로 옮겨 앉았다. 월성은 원래 탈해의 집터였는데, 이때에 와서 궁성이 조성되어 왕이 그곳에 머물기 시작했다. 101년 2월에 월성이 완성됐다면 가믐과 지진과 우박이 이어지던 기간에도 월성 신축 작업은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잦은 자연재해로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궁성 신축 작업은 민심을 흔들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주변 소국들이 기강이 해이해졌고 그런 가운데 발생한 것이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의 경계 다툼이었다. 그들은 경계를 다투다가 파사왕을 찿아와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자, 파사왕이 쉽사리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야의 수로왕이 나이가 많아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로왕을 불러 지혜를 구했다. 수로왕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은 음집벌국에 주어야 한다고 했고, 덕분에 두 지역의 경계 분쟁은 잘 해결되었다.

 

파사왕은 자신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준 수로왕에게 보답하기 위해 6부의 우두머리들로 하여금 수로왕에게 연회를 베풀도록 주선했다. 각 부의 우두머리는 이찬의 벼슬을 가진자들인데, 6부 중 5부에서는 모두 우두머리인 이찬이 참석했다. 하지만 한기부에서는 직위가 낮은 자가 우두머리를 대신하여 연회에 참석했다. 수로왕은 한기부의 이런 처사가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 판단하여 자기의 휘하 장수인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인 보제를 죽이고 가야로 돌아가 버렸다.  보제의 종이 도주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자, 수로왕의 행동을 옳게 여긴 파사왕이 타추간의 집에 사람을 보내 보제의 종을 압송하려 하였으나 타추간이 거절하였다. 파사왕이 진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타추간이 무리와 함께 항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실직(강원 삼척)과 압독(경북 경산)도 항복하니, 파사왕의 위상이 크게 격상되었다.

 

하지만 실직의 군주는 104년에 신라를 배반하였다. 파사왕은 군대를 보내 실직을 평정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대거 남쪽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106년 자신이 직접 압독에 행차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압독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렇듯 신라의 위상이 격상되자, 백제의 기루왕은 105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해 왔고, 파사왕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야와는 좋지 않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102년 수로왕이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인 이래, 파사왕은 내심으로 수로왕에 대한 무례한 행동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파사왕은 106년에 마두 성주에게 가야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마두 성주는 가야 영역인 비지국(위치 미상), 다벌국(위치 미상), 초팔국(경남 합천 초계)를 공격하여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건 이후, 가야는 위축되어 함부로 신라를 넘보지 못하였다.

 

파사왕은 아렇듯 국가 기강 학립과 영토 확장에 힘을 쏟다가 서기 112년 10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사릉원 안에 마련되었으며, 칭호는 이사금이라 하였다.

 

파사왕은 사성부인 김씨에게서 지마왕(제6대)을 얻었고 기타 사항은 언급이 없다. 지마왕이 장남이라는 기록은 없고 후대의 인물 중 박제상이 파사왕의 증손자 아도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마왕 이외에도 여러 아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성부인에 대해서는 생몰년월이 불분명하다. 다만 파사왕이 그녀와 결혼한 덕분에 탈해계와 알지계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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