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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1 : 신라의 역사 10 (제4대 탈해왕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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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1 : 신라의 역사 10 (제4대 탈해왕 2)

두바퀴인생 2010. 12. 30. 03:05

 

 

 

 

한국의 역사 111 : 신라의 역사 10 (제4대 탈해왕 2)

 

 

 

2. 탈해왕의 홀로서기와 끝없는 백제의 침략

 

탈해왕은 왜국 출신 호공의 도움으로 신라 귀족 사회에 진출하였고, 서기 8년에는 남해왕의 장녀 이효와 결혼함으로써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2년 뒤 10년에는 재상격인 대보에 임명되어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을 도맡아 보았다. 24년에 남해왕이 죽자, 유리왕이 그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왕을 능가하였고, 권력 또한 막강했다. 그 때문에 유리왕 재위시의 국정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유리왕은 재위 20년부터 왕권까지 탈해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아마도 가야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야 국조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변한의 9개국을 연합하여 가야국을 세웠다. 그때까지 변한의 소국들은 신라국을 섬기고 있었는데, 가야의 성립으로 판도가 크게 바뀔 형국이었다. 그러나 유리왕은 가야의 성립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왕권을 탈해에게 내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가락국기'엔 김수로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간 사람은 유리왕이 아니라 탈해이며, 또 김수로에게 '네가 너의 왕위를 빼았기 위해 일부러 왔다.'고 말한 사람도 탈해였다. 이는 탈해가 가야의 건국을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며, 실제로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탈해는 가야 건국 시점에 이미 왕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다음 해인 43년에 유리왕을 물러앉게 하고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2세였다.(삼국사기에는 유리왕이 죽은 서기 57년을 탈해왕 즉위 연대로 삼았으나,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탈해왕이 왕권을 행사한기 시작한 43년을 즉위 연대로 삼았다. 유리왕은 탈해왕 즉위 이후에도 14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삼국사기는 43년부터 57년까지 유리왕 치세를 거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왕을 기준으로 해야할 지 모호하였기 때문에 누락시켰을 것이다.)

 

탈해가 대보로 있던 시기의 한반도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삼한의 맹주였던 마한은 서기 8년(온조왕 26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도성이 무너지고 마한 왕실은 북쪽 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의탁했다. 이후 마한 잔여 세력은 원산성과 금현성에 병력을 집결하고 1년 동안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결국 백제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한의 저항은 곳곳에서 군대를 일으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같은 형국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서기 16년에는 마한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봉기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북쪽으로 달아난 마한 왕조는 서기 34년에 말갈군과 함께 마한의 도성이었던 마수성을 공격하여 장악하였고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이 일로 백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마한 부흥군은 기세를 올렸다.

 

이렇듯 백제와 마한 부흥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던 즈음 김수로는 변한의 9개국을 연합하여 가야국을 세웠고, 이로 인해 가야국과 신라 사이에도 한바탕 전쟁이 일어났다. 탈해는 가야와 전쟁을 기회로 왕권을 장악하여 유리왕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탈해왕 즉위 이후에도 백제군과 마한 부흥군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백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백제의 다루왕은 전국을 순행하면서 민심을 안정시켰고 마한 왕조에 동조하는 세력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런 가운데 부흥군은 복암성을 마지막 보루로 삼고 힘겨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백제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탈해왕은 호공을 대보로 삼아 정사를 맡기는 한편, 59년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어 사신을 교환했다. 그리고 61년 마한 부흥군 우두머리인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며 항복해 오자,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백제의 다루왕은 63년 낭자곡성을 장악한 뒤, 사신을 보내 탈해왕이 직접 자기에게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탈해왕이 이에 응하지 않자, 이때부터 백제는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해 왔다.

 

서기 64년 8월에 백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10월에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탈해왕은 기병 2천 기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물리쳤다. 66년 백제가 다시 와산성을 급습하여 함락시키고 병력 2백 명을 주둔시켰으나 신라군의 반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그러자 백제는 가야를 압박하여 신라를 협공하기 시작하였다.

 

70년에 백제가 한 차례 공격을 감행해 오더니, 73년에는 왜군이 목출도를 침입하였다. 신라는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케 하였으나 우오는 크게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74년에 백제가 다시 침입해 와 가까스로 막아 냈는데, 이듬해 신라 땅에 큰 가믐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백제는 10월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탈해왕은 76년 9월 군대를 동원하여 와산성을 회복하고 그곳을 수비하던 백제 병력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77년 8월에는 백제의 사주를 받은 가야가 신라를 공격해 왔다. 탈해왕은 아찬 길문에게 군사 수천을 주어 가야군을 대적케 하였고, 양쪽 군대는 황산진(경남 양산 근처)에서 맞붙었다. 이 싸움에서 길문이 가야 병력 1천여 명을 죽이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가야의 기세를 크게 위축시켰다.

 

싸움의 양상에서 볼 수 있듯이 탈해왕 대의 전쟁은 거의 모두 백제의 침입에 따른 것이다. 당시 백제는 마한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과거 마한의 속국이었던 신라와 가야에 조공을 요구하고 백제를 상국으로 섬길 것을 강요했다. 이에 가야는 백제의 요구를 수용하였지만 신라는 거절했다. 백제의 지속적인 침입은 그 같은 신라의 태도에 대한 응징의 성격이 짙었다.

 

신라를 공격한 세력은 비단 백제만 아니었다. 바다 건너 왜도 신라를 공격해 왔는데, 이는 아마도 백제와 왜의 친교를 신라가 방해한 것 때문이었다.

 

이렇듯 탈해왕은 재위 내내 백제, 왜, 가야의 침공을 막아 내며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잦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탈해왕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국가 기강의 확립을 위해 중앙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67년에 전국의 영토를 주와 군으로 구분하였고 각 주와 군에 왕족인 박씨들을 주주와 군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는 왕족인 박씨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동시에 지방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로 판단된다.

 

같은 해 2월 '순정 이벌찬으로 정사를 맡겼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유리왕 9년에 마련된 17등급의 골품제가 이때부터 제대로 적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라의 중앙조직과 지방조직, 계급 체계 등이 제대로 마련되고 시행된 것은 탈해왕의 업적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탈해왕은 유리왕과 마찬가지로 이사금 왕호를 썼고, 서기 80년 8월 99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금성 북쪽 양정 언덕에 묻혔다. 삼국유사에는 탈해왕이 건초 4년(서기 79년)에 죽어서 소천 언덕에 장사됐다고 적혀 있다. 또 탈해의 유골에 대해서는 해골 둘레가 3자 2치, 몸뚱이 뼈 길이가 9자 7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탈해왕의 가족 사항은 자세한 기록이 없다. 왕비는 남해왕의 장녀 아효부인인데, 그녀의 생사에 대해서도 기록이 전무하다. 그녀는 남해왕 5년(서기 8년)에 탈해와 결혼하였고, 43년에 탈해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탈해왕의 자식에 대한 기록은 재9대 벌휴왕의 아버지 구추가 탈해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전부다. 그러나 구추에 대한 기록도 전하지 않는다.

 

탈해왕이 죽은 것은 서기 80년이고 벌휴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184년이다. 탈해왕이 죽은 시점부터 벌휴왕이 즉위하기까지 104년이라는 긴 공백 기간이 생기는데, 이는 구추가 탈해왕이 만년에 낳은 후궁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구추는 탈해왕의 정비인 아효부인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후궁 몸에서 태어났으며 서자이다. 그래서 탈해왕의 부인이 2명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탈해왕의 정비인 아효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

 

탈해왕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이 왕위를 잇지 못하고, 박씨인 파사왕이 즉위한 것은 당시 탈해왕에겐 대를 이을 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로왕과 가야

가야가 건국된 것은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서기 42년)이다. 이는 신라 유리왕 19년, 백제 다루왕 15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 때의 일이다.

 

김수로의 난생설화는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데, 이 설화에서 김수로 등이 황금상자 속에 담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신비화시키기 위해서 꾸민 것이라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홉 간들이 모여 왕을 세우고, 아도간의 집에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다는 내용은 사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간이란 우두머리 또는 추장을 의미하고, 아홉 간이란 변한의 12국 중에서 신라에 예속되지 않은 9국의 추장들이 모여 추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마한 54국 중 대부분은 백제에 예속된 상태였고, 마한의 잔여 세력은 마한 왕조의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 진한의 12국은 대부분 신라에 예속된 상태이고, 변한의 일부도 신라에 조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가야를 세울 수 있는 세력은 신라나 백제에 예속되지 않은 변한의 나머지 국가들 뿐이었다. 이것이 가야 건국에 참여한 9국을 변한에 속했던 아홉 나라로 보는 이유이다. 나머지 3국은 이미 신라에 예속된 상태였다.

 

여섯 가야를 세운 왕들이 모두 아도간의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곧 그들 여섯 형제가 모두 아도간의 아들이라는 뜻이며, 가야를 세운 중심 세력은 아도간의 세력이었고 여섯 아들이 9국에 흩어져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 첫 번째 아들이 곧 '수로'였다. 수로는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뜻이라 했는데, 이 말은 수로가 아도간의 장남이라는 뜻이다. 아도간은 자신의 나라를 포함하여 변한 9국을 하나로 엮은 뒤, 장남을 첫 왕으로 세우고 나머지 다섯 아들에게 각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수로'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다'라 하기보다 '우두머리 왕'이라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당시 백제왕들은 '다루,기루,개루' 등의 묘호를 사용하였는데, 여기서 '루'는 '망루' 또는 '별'을 지칭하는 것으로 마한 말로 '왕'을 의미한다. '근개루'는 '개루왕 2세'라는 의미이며 '개로왕'을 '개루왕'으로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한에서 왕을 지칭하는 말인 '루'는 '로'로 발음되기도 하였다. 수로의 '로'도 백제 왕들의 '루'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고 '머리왕', '왕중의 왕'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수로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여섯 가야국 전체를 지배하는 대왕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왕이 158세가 되던 건안 4년(199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158세라는 세월을 살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 때문에 이 158년을 한 사람의 생애로 치부하는 것은 무리다. 즉 수로왕을 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158년이라는 기간을 수로라는 명칭을 사용하던 세월, 즉 여섯 가야가 하나로 통합되어 다스려지던 햇수로 보아야 한다.

 

이는 단군이 1908세에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하여, 단군이라는 단어를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왕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로 보고, 1908년을 단군 조선이 지속된 햇수로 보는 해석법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의 제1대 수로는 몇 살 때 왕위에 올랐을까?

 

<삼국사시> 파사왕 23년(102년)의 다음 기사는 이 물음의 군거를 마련해 준다.

'23년 가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아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러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 기사에서 '수로왕이 나이가 많아' 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일흔을 넘긴 나이였을 것이다. 파사왕 23년은 서기 102년으로 가야국이 건국된 지 60년이 되던 해이다. 이때 수로의 나이가 70대였다면 가야 개국 시점인 서기 42년에 수로는 10대의 소년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개국 당시 탈해와 싸우기 위해 직접 배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수로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변한 9국의 추장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지금까지의 추론을 정리해 보면, 아도간이 중심이 되어 모인 아홉 간은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의 수로를 왕으로 옹립하고 가야(가락,가라)를 국호로 삼아 나라를 통합.개국했다. 하지만 신라는 자신을 상국으로 모시던 변한 소국들이 결집하여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가야의 개국을 용남하지 못하고 응징하려 하였다.

 

가야가 개국 할 즈음 신라의 권력은 탈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대보 자리를 지키던 탈해가 유리왕이 왕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탈해의 강력한 주장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신라군은 수로의 반격에 밀려 응징에 실패한다.

 

이후 신라와 가야는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가야는 백제 왜 등과 우호관계를 맺고 신라에 대적한다. 이 같은 관계는 백제 동성왕과 무령왕이 가야 땅인 임나를 강제 점령할 때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