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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2 : 신라의 역사 11 (제4대 탈해왕 3) 본문
한국의 역사 112 : 신라의 역사 11 (제4대 탈해왕 3)
김씨 왕실의 시조 김알지의 정체
신라는 박.석.김 세 성씨에 의해 왕조가 유지되었다. 총 56명의 신라와 왕 중에서 박씨가 10명, 석씨가 8명, 김씨가 38명이다. 초기 8대까지는 탈해왕을 제외하고 모두가 박씨이며, 제9대부터 제16대까지는 미추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씨이다. 그리고 제17대부터 제52대까지는 모두 김씨이고. 제53대부터 제55대까지는 다시 박씨이며,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은 김씨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 왕조는 시조 박혁거세부터 제8대 아달라왕까지 240년 동안은 박씨의 시대, 제9대 벌휴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172년 동안은 석씨의 시대, 제17대 내물왕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 556년 동안은 김씨의 시대, 그리고 멸망기에 해당하는 제53대 신덕왕부터 제55대 경애왕까지 15년 동안은 다시 박씨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후백제의 왕 견훤이 세운 왕이었으므로, 이때는 이미 신라의 왕권이 무너진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수치상으로 나타나듯이 신라 왕조 992년 중에서 김씨 왕조가 지배한 세월은 절반이 훨씬 넘는다. 더구나 신라의 전성기는 모두 김씨 왕들에 의해서 구가되었다. 이렇듯 신라 왕조의 역사에서 김씨 왕실이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신라사에서 김씨 왕실의 시조인 김알지라는 인물이 중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김알지는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인물이었던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김알지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탈해이사금 9년 (서기 65년) 봄 3월 기사>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숲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그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그곳 나무가지에 금빛이 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자 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자태와 요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말했다.
"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준 아들이 아니겟는가?"
왕이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그의 이름을 알지라 하였는데, 그가 금빛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국호로 하였다.
<미추이사금 즉위년 기사>
미추왕의 조상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았다.
<삼국유사, 탈해왕 시대 김알지 편>
영평 3년 경신년(서기 60년) 8월 4일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동리로 갔더니 시림 속에서 환하게 밝은 빛이 나는 것이 보였다. 보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웠는데 황금궤짝이 나무가지에 걸려 있었다. 궤짝이 빛을 뿜고 흰 닭이 나무 아래서 울므로 이 사연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이 숲으로 거동하여 궤짝을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있다가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옛 사적과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알지라고 이름을 지으니 알지는 우리 나라 말로 어린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뒤를 따르며 기뻐서 뛰며 너울너울 춤을 우었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그는 파사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황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으니 알지가 열한을 낳고, 열한이 아도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았으니 미추가 왕위에 올랐는데, 신라의 김씨가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상기 기록에 나타나듯 두 사서의 내용이 다른 부분이 많다. 알지가 시림의 숲 나뭇가지에 거린 황금상자에서 나왔다는 신화적인 요소는 별차이가 없지만, 사실적인 요소들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쪽이 더 신빙성이 있는가?
우선 닭 우는 소리는 당시 민가에서 흔한 일인데, 그것을 부각시킨 점이 어슬프다. 호공이 길을 가다가 빛을 보고 시림 숲을 찿아갔다는 서술장치가 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던지, 알지를 신비화시키기 위해 꾸민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알지가 태어난 년도는 두 기록이 5년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탈해왕 재위 때라는 것은 두 기록이 일치하는 만큼 문제될 것은 없다. 그래서 두 기록을 존중하여 60년에서 65년 사이에 알지가 신라 땅에 온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가장 큰 쟁점은 알지를 대보로 임명했는지 아니면 태자로 임명했는지 여부이다. 이 부분은 대보로 임명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탈해왕이 아들도 아닌 양자를, 그것도 자신의 성씨를 받지도 않은 사람을 태자로 책봉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탈해왕 스스로도 남해왕의 양자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해왕의 장녀인 아효부인의 남편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위는 왕위에 오를 수 있어도 양자는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는 신라사 전체를 통해서 일정하게 적용되고 있는 일종의 관습법 같은 것이다.
계림의 이름도 신라의 별칭이지 국호가 아니었다. 알지가 발견된 것을 기념하여 국호를 계림으로 바꿨다는 것은 좀 비약적인 발상이다. 계림은 혁거세와 알영이 태어난 숲으로 그 이름은 건국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기록에서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김알지가 탈해왕의 양자로 키워져 대보의 관직에 올랐다는 내용뿐이다.
그렇다면 탈해왕은 왜 김알지를 양자로 받아들였으며 그를 대보로 삼았을까? 왕이 양자로 받아들이자면 필시 김알지는 이주 귀한 신분이어야 한다. 탈해가 그랬듯이 그도 어느 나라의 왕자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신분이었을까?
중국의 <수서>는 신라 왕실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달아나 신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수서>는 당나라 태종 연간인 630년에 위징 등이 편찬한 책이다. 이 무렵, 신라왕은 진평왕이었다. 그렇다면 수서의 진술은 진평왕을 포함한 김씨 왕실에 관한 내용일 수 밖에 없다.
당나라 때는 물론이고, 수나라 시절에도 진평왕은 중국에 많은 사신을 보냈다. 따라서 수서의 신라 왕실과 관련한 기록은 진평왕이 보낸 사신들이 중국에 알려 준 내용일 것이다. 당대 사신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 내용이라면 이 내용의 신뢰도는 매우 높게 취급되어야 한다. 더구나 수서가 편찬될 당시 당나라 태종 연간엔 당과 신라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편수관들은 신라에 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던 때였다.
수서의 기록대로 정말 신라의 김씨 왕실의 시조, 즉 김일지는 백제 사람일까? 어떻게 보면 김알지를 백제 사람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김알지는 백제 사람이 아니라 마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설에는 김알지가 전한 무제 시절 흉노족의 왕자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에 관련 기록이나 구체적인 유물을 찿을 수는 없다. 단지 발견된 비석 글귀 몇 자만을 가지고 단정하기에는 무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김알지가 신라에 온 때인 서기 60년에서 65년 사이의 한반도 상황을 점검해 보면, 알지가 마한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얻어 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백제 땅에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이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시기이며, 백제는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을 때이다. 마한 장수 맹소는 복암성에 부흥군을 집결하고 다각적으로 마한 왕조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서기 61년 8월에 그는 복암성을 신라에 바치고 귀순해 버린다. 이로써 서기 9년에 마한 왕조가 무너진 이래 무려 52년 동안 지속되었던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
백제가 몰락한 뒤에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사람이 부여복신, 부여풍 등의 백제 왕족들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 52년 동안 마한 왕조의 부흥운동을 이끌던 중심 세력 속에는 필시 마한 왕실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을 것이며 부흥운동의 성격상 왕족을 앞세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 한다.
그렇다면 맹소가 복암성을 신라에 바치면서 귀순했을 때, 부흥운동이 지속되던 동안 마한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인물도 함께 신라에 귀부했을 것이다. 수서의 기록대로 김알지가 백제에서 왔다면, 그는 맹소와 함께 신라에 귀부한 마한 왕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서는 왜 그를 마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백제 사람이라고 했을까? 이는 당시 마한은 이미 백제에 병합되어 망하고 없는 상태였고 마한 사람들은 모두 백제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수서가 진평왕의 조상이자 김씨 왕실의 시조 김알지를 백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김알지의 출신과 정체는 자명해진 셈이다. 김알지는 마한의 마지막 왕의 직계 후손이며 부흥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런 그가 신라에 와서 탈해왕의 양자로 취급되고, 재상 격인 대보의 벼슬까지 부여받는 등 왕족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은 것은 바로 마한 왕실을 대표하는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신라에 귀부함으로써 신라는 마한의 적통임을 자부하며 백제에 대해 마한 영토를 돌려 달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엇다. 후에 김알지의 후예인 김씨 왕실이 신라를 통치하면서 그 같은 명분은 더욱 힘을 얻어 삼한 통일을 외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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