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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9 : 신라의 역사 8 (제3대 유리왕)

두바퀴인생 2010. 12. 28. 14:16

 

 

 

한국의 역사 109 : 신라의 역사 8 (제3대 유리왕)

 

 

 

제3대 유리왕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57년, 재위 24년~57년) 또는 유리왕(儒理王)은 신라의 3대 왕으로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다. 박혁거세의 손자. 왕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 혹은 허루왕(許婁王)의 딸 박씨라는 설이 있지만, 일지 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삼국유사에서는 노례(弩禮), 박씨 족보에서는 치리(治理) 또는 치리(齒理)이다.

 
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History of Korea-576.png
576년 신라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경주
정치체제 군주제
성립 기원전 57년
멸망 935년
초대 군주 박혁거세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최후 군주 경순왕
927년 ~ 935년
성립 이전 진한
해체 이후 고려

생애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이사금은 방언이니 잇금을 이른다. 이전에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둘은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시험해보니 유리의 이 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다.

 

즉위 이듬해인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사면했으며, 28년(즉위 5년)에 홀아비, 과부, 고아, 늙고 병든 이들에 대한 구휼을 실시했다.

 

즉위 9년진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렸는데, 이 무렵 신라의 진한에서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나타낸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위 17등급을 정리했는데, 삼국사기에는 17등급이 전부 이때 정해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리 이사금이 그 기틀을 다지고 후에 제도를 손봐 17등급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35년(즉위 13년) 음력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당하였다.

 

37년(즉위 14년) 고구려대무신왕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낙랑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만년

40년(즉위 17년) 가을 음력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유리 이사금은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그리고, 42년(즉위 19년) 가을 음력 8월에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57년(즉위 34년) 가을 음력 9월에 유리 이사금은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유언 비슷한 말을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57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가계

 

후비

 

경주 박씨 족보에 나오는 인물

  • 동생 : 박환(朴桓)
    • 조카: 박지인(朴智仁, 각간 역임)
  • 여동생 : 박씨(朴氏) - 상장군 김명옥(金鳴玉)에게 출가

 

동시대 고구려,백제,가야

 

 

 

 

제3대 유리왕 실록 

(?~서기 57년, 재위 서기 24년 9월~ 57년 10월, 33년 1개월)

 

유리와의 덕치와 조직 정비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이며 운제부인의 소생이다. 서기 24년 9월에 남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는 그를 노래왕 또는 유례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대보 탈해가 덕망이 있다고 판단하여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다. 이는 남해왕이 자신이 죽은 뒤에 탈해와 유리 둘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탈해는 왕위를 사양하였다.

 

탈해는 훌륭하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유리와 자기의 이의 수를 헤아려 보게 하였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수가 많자, 탈해는 자기의 측근들과 함께 유리를 받들었다. 그후로 '잇자국'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정하였다고 전한다.

 

이 일은 아마도 탈해가 유리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기 위하여 일부러 꾸며 낸 행동으로 판단된다. 유리는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대보 탈해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탈해는 현명하게도 이의 수를 이용하여 유리의 권위를 세워주었던 것이다.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던 일에서 알 수 있듯이 유리왕은 겸손하고 분수를 알며 덕이 있었던 모양이다.

 

재위 5년 11월 그는 전국을 순행하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한 노파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서 왕위에 머물며 백성을 먹일 수도 없고 노인과 어린이를 이토록 극한 상황에 처하게 했으니 나의 죄로다."

 

유리왕은 자신을 책망하면서 옷을 벗어 노파를 덮어 주고, 밥을 주어 먹게 했다. 그리고 즉시 관리에게 지시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문하고, 늙고 병들어 혼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토록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웃 나라 백성들이 대거 찿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리왕은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게 되었다 하여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이 최초의 노래인 '도솔가'였다. 도솔가의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삼국유사>는 '감탄하는 구절과 사뇌격(향가의 격)을 갔췄다'고 하였다.

 

재위 9년에는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기틀을 갖췄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이씨 성을,  고허부는 사랑부로 고치고 최씨 성을, 대수부는 점량부(또는 모량부)로 고치고 손씨 성을,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정씨 성을,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치고 배씨 성을,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설씨 성을 내렸다.

 

6부를 정한 뒤에 이를 두 편으로 나누어,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 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들 두 편으로 하여금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김쌈 시합을 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을 대접하게 하였다. 이 행사를 '가베'라고 했는데 한가위, 즉 추석의 기원이 되었다.

 

가베 때에 진 편에서 한 여자가 나와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희소 희소!" 하고 외쳤다, 그런데 그 소리가 하도 슬프고 우아하여, 나중에는 이 곡에 노랫말을 붙여 '희소곡'이라 했다.

 

유리왕은 관직도 17등급으로 나누어 정부 조직을 정비했는데, 이때 확립된 관등제는 신라말기까지 이어진다. 제1등급은 이벌찬, 2등급은 이찬, 3등급은 잡찬, 4등급은 파진찬, 5등급은 대아찬, 6등급은 아찬, 7등급은 일길찬, 8등급은 사찬, 9등급은 급벌찬, 10등급은 대나미, 11등급은 나마, 12등급은 대사, 13등급은 소사, 14등급은 길사, 15등급은 대오, 16등급은 소오, 17등급은 조위라 하였다.

 

이들 17등급은 신분에 따라 오를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 있는데, 이것이 법흥왕 대에 이르면 골품제도로 정착된다.

 

이 무렵 보습(쟁기) 같은 농기구나 수레 등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고,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도 만들어졌다.

 

이렇듯 유리왕 재위 초기 10년은 비교적 안정과 평화가 지속되어 여러 문화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재위 11년 (서기 34년)부터 전쟁과 재해에 시달렸다. 재위 11년에 도성이 갈라지고, 지하수가 솟구처 오르는 지진이 있었고, 그해 6월에는 홍수가 닥쳐 민가에 큰 피해를 야기하였다. 재위 13년 8월에는 낙랑(동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타산성을 점령함으로써 전쟁 분위기에 휩싸이고, 이듬해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으로 밀고 내려와 낙랑의 난민 5천여 명이 사로국으로 밀려들었다.

 

17년 9월에는 낙랑의 화려와 불내성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맥국(동옥저를 지칭하는 듯함) 왕이 곡하의 서쪽에서 이들을 요격하여 물리쳤다. 유리왕은 맥국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들과 친교를 맺었고, 19년 8월에는 맥국의 왕이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보내오기도 했다.

 

유리왕 재위 중반은 이렇듯 여러 재앙과 전쟁에 시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삼국사기>는 그의 재위 20년부터 34년까지 말기 14년 동안 기사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재위 31년과 33년에 짧은 기사가 있으나, 천체와 기후에 관한 것일 뿐이다. 또 34년 4월에 금성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반란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34년(서기 57년) 10월 유리왕은 생을 마감한다.

 

아무래도 이 14년 공백은 탈해의 즉위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유리왕 재위 20년 이후부터 실질적인 왕권이 탈해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유리왕이 다음과 같은 말로 탈해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그 근거이다.

"탈해는 신분이 국척이요, 지위가 재상이 이르렀고, 여러 번 공을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이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하니,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말라."

 

강압에 의한 것이든 조작에 의한 것이든 유리왕이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당시 조정이 탈해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뜻이다. 정치적인 입지가 약한 유리왕의 후계자인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경우 국정의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유리왕이 스스로 탈해에게 왕위를 넘겼거나, 아니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탈해가 유리왕을 위협하여 왕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유리왕의 능은 사릉원 안에 조성되었다.

 

유리왕의 부인은 일지갈문왕의 딸 박씨다. 그녀의 성이 박씨인 것으로 보아 일지갈문왕도 박씨이며 혁거세의 아들이다. 그래서 그녀는 혁거세의 손녀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사촌지간이 되는 셈이다.

 

유리왕은 정비 박씨 이외에 여러 후비가 있엇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장남은 제7대 일성왕이며, 차남은 제5대 파사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