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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8 : 신라의 역사 7 (제2대 남해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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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8 : 신라의 역사 7 (제2대 남해왕)

두바퀴인생 2010. 12. 27. 03:58

 

 

 

한국의 역사 108 : 신라의 역사 7 (제2대 남해왕)

 

 

 

제2대 남해왕

 

남해왕(南解王, BC 50년 ~ 24년) 생전의 이름은 해민(海慜) 또는 차차웅(次次雄)이다.

 

BC 50년 시조왕 8년 신미에 태어나 기원후 4년 갑자년에 즉위하였다.

 

서기 6년 병인에 시조왕의 신위를 모신 묘우(廟宇)을 건립하고 일년에 네 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서기 24년 갑신 가을 9월에 돌아가시니 나이 74세요, 재위 24년이다. 능은 시조왕릉과 같은 곳에 묘좌로 있다.

 

왕비는 김씨니 운제왕후(雲梯王后)다. 2남 1녀를 생육하였다.

 

왕비는 석씨니 아처왕후(阿妻王后)다. 이 사실이 사보에 실려있다. 왕위는 유리왕에 전해졌다.

 


 
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History of Korea-576.png
576년 신라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경주
정치체제 군주제
성립 기원전 57년
멸망 935년
초대 군주 박혁거세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최후 군주 경순왕
927년 ~ 935년
성립 이전 진한
해체 이후 고려

신라의 2대 왕으로, 박혁거세 거서간와 알영부인의 적자이다.

 

차차웅이라는 왕호에 대해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은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차차웅 혹은 자충(慈充)은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무단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그를 외경해 마침내 존귀한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고 하게 되었다." 이는 신라가 아직 샤머니즘적인 부족사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위 3년(BC 48년)에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의 묘를 세웠고, 즉위 5년(BC 46년)에 석탈해를 사위로 받아들였고, 즉위 7년(BC 44년)에는 대보(大輔)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즉위 원년에 낙랑군이 금성을 두 겹으로 에워쌌고, 즉위 11년(BC 40년)에 왜가 민가를 노략하여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는 사이 낙랑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 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고 한다.

 

즉위 16(BC 35년)년에 북명(北溟)에서 예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 차차웅에게 바쳤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그 나라 인장에는 '예왕지인'이라 한 글귀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예나 부여가 그리 멀지 않고 가까운 이름이었음을 나타낸다. - 위키 백과 <남해왕편>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역대 왕

 

상대

제2대 남해 차차웅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인 유리석탈해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유리가 왕이 되었다. 유리 이사금은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제외하고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제4대 임금 석탈해가 죽고 나자 석탈해의 아들은 왕위 계승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고 이전 임금이었던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인 파사가 이사금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나중에 파사 임금이 죽자 파사의 아들 지마가 제6대 이사금으로 즉위하고, 그 뒤를 이어서 예전에 파사에 의해 밀려났던 유리이사금의 첫째 아들 일성이 제7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초기 신라, 즉 사로국의 경우 제1순위인 태자가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그런 다음에 양보했던 그 사람이 다시 훗날 왕위에 오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보다는 성씨가 다른 세력의 수장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을 하는 등 왕권 승계의 질서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왕권승계가 아무런 갈등이나 마찰 없이 아주 평화롭게 이뤄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초기 신라의 3대 세력이었던 '박-석-김' 세력이 각각 독립적인 계보를 이어 내려오다가, 훗날 그것들을 뒤섞어서 단일 왕계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미화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박씨 왕조

대수 칭호 재위 기간 비고
1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혁거세(赫居世) 기원전 57년 ~ 4년 박씨의 시조
2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남해(南解) 4년 ~ 24년 혁거세 거서간의 아들
3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유리(儒理) 24년 ~ 57년 남해 차차웅의 아들

 

 

석씨 왕조

대수 칭호 재위 기간 비고
4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탈해(脫解) 57년 ~ 80년 남해 차차웅의 사위이자, 석씨의 시조

 

 

박씨 왕조

대수 칭호 재위 기간 비고
5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파사(婆娑) 80년 ~ 112년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
6 지마 이사금(祗摩泥師今) 지마(祗摩) 112년 ~ 134년 파사 이사금의 아들.
7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일성(逸聖) 134년 ~ 154년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8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아달라(阿達羅) 154년 ~ 184년 일성 이사금의 아들.

 

 

석씨 왕조

대수 칭호 재위 기간 비고
9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벌휴(伐休) 184년 ~ 196년 탈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
10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내해(奈解) 196년 ~ 230년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자 이매(伊買)의 아들.
11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조분(助賁) 230년 ~ 247년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자, 아버지는 골정(骨正), 혹은 홀쟁(忽爭) 갈문왕.
12 첨해 이사금(沾解) 첨해(沾解) 247년 ~ 261년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

 

 

김씨 왕조

대수 칭호 재위 기간 비고
13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미추(味鄒) 261년 ~ 284년 김알지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석씨 왕조

대수 칭호 재위 기간 비고
14 유례 이사금(儒禮泥師今) 유례(儒禮) 284년 ~ 298년 조분 이사금의 아들.
15 기림 이사금(基臨泥師今) 기림(基臨) 298년 ~ 310년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며, 이찬 걸숙(乞淑)의 아들.
16 흘해 이사금(訖解泥師今) 흘해(訖解) 310년 ~ 356년 내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석우로(于老)의 아들.

 

 

 

김씨 왕조

대수 칭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7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내물(奈勿), 나밀(那密) 356년 ~ 402년 각간 말구(末仇)의 아들.
18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실성(實聖) 402년 ~ 417년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19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눌지(訥祗) 417년 ~ 458년 내물 마립간의 장자.
20 자비 마립간(慈悲麻立干) 자비(慈悲) 458년 ~ 479년 눌지 마립간의 장자.
21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소지(炤知) 479년 ~ 500년 자비 마립간의 장자.
22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지증왕(智證王) 지대로(智大路, 智度路) 500년 ~ 514년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
23 법흥왕(法興王) 원종(原宗) 514년 ~ 540년 지증왕의 아들.
24 진흥왕(眞興王) 삼맥종(彡麥宗) 540년 ~ 576년 법흥왕의 조카.
25 진지왕(眞智王) 사륜(舍輪), 금륜(金輪) 576년 ~ 579년 진흥왕의 차남.
26 진평왕(眞平王) 백정(伯淨, 白淨, 白丁) 579년 ~ 632년 진흥왕의 장손이자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27 선덕여왕(善德女王) 덕만(德曼) 632년 ~ 647년 진평왕의 장녀.
28 진덕여왕(眞德女王) 승만(勝曼) 647년 ~ 654년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國飯)의 딸.

 

중대(中代)

김씨 왕조

대수 묘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29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춘추(春秋) 654년 - 661년 진지왕의 손자이자 김용춘의 아들.
30 문무왕(文武王) 법민(法敏) 661년 - 681년 태종무열왕의 장자.
31 신문왕(神文王) 정명(政明) 681년 - 692년 문무왕의 장자.
32 효소왕(孝昭王) 이홍(理洪), 이공(理恭) 692년 - 702년 신문왕의 장자.
33 성덕왕(聖德王) 흥광(興光), 융기(隆基) 702년 - 737년 신문왕의 차남.
34 효성왕(孝成王) 승경(承慶) 737년 - 742년 성덕왕의 아들.
35 경덕왕(景德王) 헌영(憲英) 742년 - 765년 성덕왕의 아들.
36 혜공왕(惠恭王) 건운(乾運) 765년 - 780년) 경덕왕의 아들.

 

하대(下代)

김씨 왕조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37 선덕왕(宣德王) 양상(良相) 780년 - 785년 내물 마립간의 10대손.
38 원성왕(元聖王) 경신(敬信) 785년 - 798년 내물 마립간의 12대손.
39 소성왕(昭聖王) 준옹(俊邕) 798년 - 800년 원성왕의 장손.
40 애장왕(哀莊王) 청명(淸明), 중희(重熙) 800년 - 809년 소성왕의 아들.
41 헌덕왕(憲德王) 언승(彦昇) 809년 - 826년 소성왕의 동생.
42 흥덕왕(興德王) 수종(秀宗),수승(秀升), 경휘(景徽) 826년 - 836년 소성왕의 동생.
43 희강왕(僖康王) 제륭(悌隆) 836년 - 838년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44 민애왕(閔哀王) 명(明) 838년 - 839년 원성왕의 손자인 김충공(金忠恭)의 아들.
45 신무왕(神武王) 우징(祐徵) 839년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金均貞)의 아들.
46 문성왕(文聖王) 경응(慶膺) 839년 - 857년 신무왕의 아들.
47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 857년 - 861년 신무왕의 이복 동생.
48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 861년 - 875년 희강왕의 손자.
49 헌강왕(憲康王) 정(晸) 875년 - 886년 경문왕의 장남.
50 정강왕(定康王) 황(晃) 886년 - 887년 경문왕의 차남.
51 진성여왕(眞聖女王) 만(曼), 원(垣) 887년 - 897년 경문왕의 딸.
52 효공왕(孝恭王) 요(嶢) 897년 - 912년 헌강왕의 서자.

 

 

박씨 왕조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53 신덕왕(神德王) 경휘(景暉, 景徽) 912년 - 917년 아달라이사금의 후손.
54 경명왕(景明王) 승영(昇英) 917년 - 924년 신덕왕의 장남.
55 경애왕(景哀王) 위응(魏膺) 924년 - 927년 신덕왕의 차남.

 

 

김씨 왕조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56 경순왕(敬順王) 부(傅) 927년 - 935년 문성왕의 6대손 이찬(伊飡) 김효종의 아들.

 

추존왕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추존) 문흥대왕(文興大王) 김용춘(金龍春) (추존) 태종무열왕에 의해 추존됨,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추존)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憲貞) (추존) 853년에 왕으로 추존됨, 김해 김씨 중시조.
(추존) 개성대왕(開聖大王) 김효방(金孝芳) (추존) 선덕왕에 의해 추존됨, 선덕왕의 아버지.
(추존) 현성대왕(玄聖大王) 김법선(金法宣) (추존)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고조부.
(추존) 신영대왕(神英大王) 김의관(金義寬) (추존)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증조부.
(추존) 흥평대왕(興平大王) 김위문(金魏文) (추존)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조부.
(추존) 명덕대왕(明德大王) 김효양(金孝讓) (추존)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아버지.
(추존) 혜충대왕(惠忠大王) 김인겸(金仁謙) (추존) 소성왕에 의해 추존됨, 소성왕의 아버지.
(추존) 익성대왕(翌成大王) 김헌정(金憲貞) (추존) 희강왕에 의해 추존됨, 희강왕의 아버지.
(추존) 선강대왕(宣康大王) 김충공(金忠恭) (추존) 민애왕에 의해 추존됨, 민애왕의 아버지.
(추존) 혜강대왕(惠康大王) 김예영(金禮英) (추존) 신무왕에 의해 추존됨, 신무왕의 조부.
(추존) 성덕대왕(成德大王) 김균정(金均貞) (추존) 신무왕에 의해 추존됨, 신무왕의 아버지.
(추존) 의공대왕(懿恭大王) 김계명(金啟明) (추존) 경문왕에 의해 추존됨, 경문왕의 아버지.
(추존) 혜성대왕(惠成大王) 김위홍(金魏弘) (추존) 진성여왕에 의해 추존됨, 진성여왕의 숙부.
(추존) 선성대왕(宣聖大王) 박예겸(朴銳謙) (추존) 신덕왕에 의해 추존됨, 신덕왕의 의부.
(추존) 흥렴대왕(興廉大王) 박문원(朴文元) (추존) 신덕왕에 의해 추존됨, 신덕왕의 생부.

 

 

 

 

 

제2대 남해왕 실록 

(?~서기 24년, 재위 서기 4년 3월~ 24년 9월, 20년 6개월)

 

정국의 혼란과 남해왕의 위태로운 왕권 유지

남해왕은 혁거세왕과 알영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깊고 두터웠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태자도, 장남도 아니었던 그가 왕위에 오른 경위는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는 남해왕 자신의 입을 빌려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두 분(혁거세와 알여)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질못된 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남해왕은 혁거세왕에게 왕위를 넘겨받은 것도 아니고 왕위 계승권자도 아니었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혁거세왕과 알영이 죽자,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혁거세왕과 알영이 함께 죽고, 왕위 계승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혁거세왕 60년 9월 란이 발생하여 혁거세 부부가 참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죽은 지 7일 만에 발견되었고 여러 왕족들이 모두 같이 죽었으며 시신들도 토막 난 상태로 신분 구분이 불가하였다. 그 때문에 신하들은 다섯 기의 능을 조성하여 시신을 인장해야만 했다.

 

남해왕이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것은 이 같은 엄청난 반란의 소요돌이가 지나간 다음에 이루어졌다. 남해가 왕위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반란군을 제거하는데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에 그가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평한 것도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남해왕은 즉위하자마자, 외침으로 한 차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위년 7월에 낙랑(동예)의 군대가 쳐들어와 금성이 포위되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때 남해왕은 탄식하듯이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남해왕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는 뜻이다.

 

남해왕은 또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 왔으니, 이는 내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며 한숨을 쏟아놓기도 했다.

 

금성을 방어벽 삼아 강력하게 저항한 덕분에 가까스로 낙랑군이 물러갔으나, 그 이후에도 남해왕은 안정을 되찿지 못하고 믿고 의지할 인물을 찿고 있었다.

 

그 무렵 석탈해라는 인물이 현명하고 용맹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남해왕은 그를 불러 만나 본 뒤에 사람됨이 남다르다고 판단하고 장녀 아효를 그에게 시집보내 그를 사위로 맞아들엿다. 이후 석탈해를 대보에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전담시켰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재위 8년(서기 11년) 봄과 여름에 걸쳐 가믐이 계속되어 지독한 흉년이 들었고, 재위 11년에는 왜인 병선 백여 척이 침범하여 해변가 민가를 약탈하는 바람에 6부 장병들을 모두 보내 이를 격퇴해야만 했다. 그러자 낙랑이 그 혼란한 틈을 타고 다시 쳐들어 왔다. 낙랑군은 금성까지 밀고 내려와 알천가에 주둔하였는데, 다행히 낙랑 진영에 유성이 떨어지는 바람에 스스로 겁을 먹고 물러났다. 6부의 병력 1천으로 그 뒤를 추격하였지만, 알천가에 쌓아 둔 돌무더기 20개의 양을 보고 적군의 수가 많은 것으로 판단하여 회군했다.  재위 15년에는 가믐이 심하게 들어 흉작인데다가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백성들의 굶주림에 허덕였다. 또 재위 19년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숱한 사람들이 죽었으며, 음력 11월에도 물이 얼지 않는 기상이변까지 겹쳤다. 재위 21년 9월에 다시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려 농사를 망쳐 놓았는데, 남해왕은 그 와중에 생을 마감했다.

 

이렇듯 남해왕은 재위 내내 정치적 혼란과 재난, 그리고 전쟁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나마 석탈해가 대보의 직위에 있으면서 국정을 안정시킨 덕분에 가까스로 왕위를 유지했다.

 

남해왕의 능은 혁거세왕이 묻힌 사릉원에 마련되었다.

 

 

차차웅 의미와 해석

 

남해왕을 '거서간' 또는 '차차웅'이라 했다. 거서간은 이미 설명한 바 있어 생략하고 차차웅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겠다.

 

차차웅이라는용어에 대해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방언으로 무당이다.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 줬으며, 그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자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김대문의 이 말은 차차웅이 제정시대에 쓰이던 용어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각에서는 혁거세왕과 남해왕이 제사장을 겸한 왕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차차웅으라는 용어를 썼다고 해서 신라 초기의 왕이 제사장(무당)을 겸한 왕이었다고 보는 견해는 비약적인 발상이다.

 

엄밀히 따지면 '왕(王)'이라는 말도 제정일치 시대의 유산이다. 이 글자는 원래 짐승이나 사람을 제단에 올려놓고 불에 태우기 위한 단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때 제사를 주관하던 사람이 무당이요, 불을 댕기는 사람도 무당이었다. 따라서 왕이라는 용어는 제단에 불을 댕기는 사람, 곧 무당을 상징한다. 하지만 제정일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왕이라는 용어는 계속 사용되었다. 차차웅이라는 용어도 비록 제정일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 용어를 쓴다는 이유하나로 신라 초기를 제정일치 시대로 보는 것은 무리다.

 

차차웅의 '웅'은 단군신화의 환웅에 붙은 '웅'과 같은 의미로, 왕이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볼 때, 차차웅은 '두 번째 왕'이라는 뜻이 된다.

 

차차충은 '자충'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현재 스님을 일컫는 '중' 이라는 용어와 뜻이 같다는 주장도 있다. 즉, 승려를 지칭하는 중도 원래는 무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