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107 : 신라의 역사 6 (제1대 박혁거세왕 2) 본문
한국의 역사 107 : 신라의 역사 6 (제1대 박혁거세왕 2)
제1대 박혁거세왕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기원전 69년~기원후 4년, 재위: 기원전 57년~기원후 4년) 또는 혁거세 왕(赫居世王)은 신라의 초대 군주이자, 박씨(朴氏)의 시조(始祖)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그가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한편로 일연은 선도산 성모로 불리는 사소부인(娑蘇夫人)이 그를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赫居世란 표기는 한자 음과 뜻을 합친 표기로서, 赫은 뜻인 "밝"에 가까운 음으로 읽으며, 世는 세상을 뜻하는 고유어 "누리","뉘"에 가깝게 읽는다. 비슷한 음을 딴 다른 표기로 弗矩內(불구내)가 있으며, 결국 본디 이름은 밝아누리(세상을 밝히다)에 가깝다.
삶
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History of Korea-576.png](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6/History_of_Korea-576.png/300px-History_of_Korea-576.png)
576년 신라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경주
정치체제
군주제
성립
기원전 57년
멸망
935년
초대 군주
박혁거세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최후 군주
경순왕
927년 ~ 935년
성립 이전
진한
해체 이후
고려
![History of Korea-576.png](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6/History_of_Korea-576.png/300px-History_of_Korea-576.png)
576년 신라 전성기 때의 지도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927년 ~ 935년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각기 자기 자녀들과 함께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모두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모두가 안일하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때,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은 더 잘 보기 위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말이 누었던 장소로 일제히 몰려가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보고있으니 갑자기 깨져버렸다.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하며, 아기를 동천(東泉)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혁거세는 자라다가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갑자년(기원전 57년) 음력 4월에 즉위,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며,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해 마한 왕이 분노해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
사망
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그 나눠진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 이렇게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래서 무덤들을 가리켜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박씨 족보와의 차이
적어도 신라 박씨 족보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존 사서는 박혁거세가 13세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박씨 선원세계보에 나오는 그의 둘째 아들 박특(朴忒)은 신라 개국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박씨 관련 보학 자료들이 조선 중기 또는 후기 이전에 소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다 신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계
동시대 부여, 고구려, 백제
역대 왕
상대
제2대 남해 차차웅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인 유리와 석탈해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유리가 왕이 되었다. 유리 이사금은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제외하고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제4대 임금 석탈해가 죽고 나자 석탈해의 아들은 왕위 계승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고 이전 임금이었던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인 파사가 이사금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나중에 파사 임금이 죽자 파사의 아들 지마가 제6대 이사금으로 즉위하고, 그 뒤를 이어서 예전에 파사에 의해 밀려났던 유리이사금의 첫째 아들 일성이 제7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초기 신라, 즉 사로국의 경우 제1순위인 태자가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그런 다음에 양보했던 그 사람이 다시 훗날 왕위에 오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보다는 성씨가 다른 세력의 수장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을 하는 등 왕권 승계의 질서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왕권승계가 아무런 갈등이나 마찰 없이 아주 평화롭게 이뤄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초기 신라의 3대 세력이었던 '박-석-김' 세력이 각각 독립적인 계보를 이어 내려오다가, 훗날 그것들을 뒤섞어서 단일 왕계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미화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박씨 왕조
대수 | 칭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 혁거세(赫居世) | 기원전 57년 ~ 4년 | 박씨의 시조 |
2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 남해(南解) | 4년 ~ 24년 | 혁거세 거서간의 아들 |
3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 유리(儒理) | 24년 ~ 57년 | 남해 차차웅의 아들 |
석씨 왕조
대수 | 칭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4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 탈해(脫解) | 57년 ~ 80년 | 남해 차차웅의 사위이자, 석씨의 시조 |
박씨 왕조
대수 | 칭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5 |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 파사(婆娑) | 80년 ~ 112년 |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 |
6 | 지마 이사금(祗摩泥師今) | 지마(祗摩) | 112년 ~ 134년 | 파사 이사금의 아들. |
7 |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 일성(逸聖) | 134년 ~ 154년 |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
8 |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 아달라(阿達羅) | 154년 ~ 184년 | 일성 이사금의 아들. |
석씨 왕조
대수 | 칭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9 |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 벌휴(伐休) | 184년 ~ 196년 | 탈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 |
10 |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 내해(奈解) | 196년 ~ 230년 |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자 이매(伊買)의 아들. |
11 |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 조분(助賁) | 230년 ~ 247년 |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자, 아버지는 골정(骨正), 혹은 홀쟁(忽爭) 갈문왕. |
12 | 첨해 이사금(沾解) | 첨해(沾解) | 247년 ~ 261년 |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 |
김씨 왕조
대수 | 칭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3 |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 미추(味鄒) | 261년 ~ 284년 | 김알지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
석씨 왕조
대수 | 칭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4 | 유례 이사금(儒禮泥師今) | 유례(儒禮) | 284년 ~ 298년 | 조분 이사금의 아들. |
15 | 기림 이사금(基臨泥師今) | 기림(基臨) | 298년 ~ 310년 |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며, 이찬 걸숙(乞淑)의 아들. |
16 | 흘해 이사금(訖解泥師今) | 흘해(訖解) | 310년 ~ 356년 | 내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석우로(于老)의 아들. |
대수 | 칭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7 |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 내물(奈勿), 나밀(那密) | 356년 ~ 402년 | 각간 말구(末仇)의 아들. | |
18 |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 실성(實聖) | 402년 ~ 417년 |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 |
19 |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 눌지(訥祗) | 417년 ~ 458년 | 내물 마립간의 장자. | |
20 | 자비 마립간(慈悲麻立干) | 자비(慈悲) | 458년 ~ 479년 | 눌지 마립간의 장자. | |
21 |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 소지(炤知) | 479년 ~ 500년 | 자비 마립간의 장자. | |
22 |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 지증왕(智證王) | 지대로(智大路, 智度路) | 500년 ~ 514년 |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 |
23 | 법흥왕(法興王) | 원종(原宗) | 514년 ~ 540년 | 지증왕의 아들. | |
24 | 진흥왕(眞興王) | 삼맥종(彡麥宗) | 540년 ~ 576년 | 법흥왕의 조카. | |
25 | 진지왕(眞智王) | 사륜(舍輪), 금륜(金輪) | 576년 ~ 579년 | 진흥왕의 차남. | |
26 | 진평왕(眞平王) | 백정(伯淨, 白淨, 白丁) | 579년 ~ 632년 | 진흥왕의 장손이자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 |
27 | 선덕여왕(善德女王) | 덕만(德曼) | 632년 ~ 647년 | 진평왕의 장녀. | |
28 | 진덕여왕(眞德女王) | 승만(勝曼) | 647년 ~ 654년 |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國飯)의 딸. |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29 | 태종(太宗) | 무열왕(武烈王) | 춘추(春秋) | 654년 - 661년 | 진지왕의 손자이자 김용춘의 아들. |
30 | 문무왕(文武王) | 법민(法敏) | 661년 - 681년 | 태종무열왕의 장자. | |
31 | 신문왕(神文王) | 정명(政明) | 681년 - 692년 | 문무왕의 장자. | |
32 | 효소왕(孝昭王) | 이홍(理洪), 이공(理恭) | 692년 - 702년 | 신문왕의 장자. | |
33 | 성덕왕(聖德王) | 흥광(興光), 융기(隆基) | 702년 - 737년 | 신문왕의 차남. | |
34 | 효성왕(孝成王) | 승경(承慶) | 737년 - 742년 | 성덕왕의 아들. | |
35 | 경덕왕(景德王) | 헌영(憲英) | 742년 - 765년 | 성덕왕의 아들. | |
36 | 혜공왕(惠恭王) | 건운(乾運) | 765년 - 780년) | 경덕왕의 아들. |
하대(下代)
김씨 왕조
대수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37 | 선덕왕(宣德王) | 양상(良相) | 780년 - 785년 | 내물 마립간의 10대손. |
38 | 원성왕(元聖王) | 경신(敬信) | 785년 - 798년 | 내물 마립간의 12대손. |
39 | 소성왕(昭聖王) | 준옹(俊邕) | 798년 - 800년 | 원성왕의 장손. |
40 | 애장왕(哀莊王) | 청명(淸明), 중희(重熙) | 800년 - 809년 | 소성왕의 아들. |
41 | 헌덕왕(憲德王) | 언승(彦昇) | 809년 - 826년 | 소성왕의 동생. |
42 | 흥덕왕(興德王) | 수종(秀宗),수승(秀升), 경휘(景徽) | 826년 - 836년 | 소성왕의 동생. |
43 | 희강왕(僖康王) | 제륭(悌隆) | 836년 - 838년 |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
44 | 민애왕(閔哀王) | 명(明) | 838년 - 839년 | 원성왕의 손자인 김충공(金忠恭)의 아들. |
45 | 신무왕(神武王) | 우징(祐徵) | 839년 |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金均貞)의 아들. |
46 | 문성왕(文聖王) | 경응(慶膺) | 839년 - 857년 | 신무왕의 아들. |
47 | 헌안왕(憲安王) | 의정(誼靖) | 857년 - 861년 | 신무왕의 이복 동생. |
48 | 경문왕(景文王) | 응렴(膺廉) | 861년 - 875년 | 희강왕의 손자. |
49 | 헌강왕(憲康王) | 정(晸) | 875년 - 886년 | 경문왕의 장남. |
50 | 정강왕(定康王) | 황(晃) | 886년 - 887년 | 경문왕의 차남. |
51 | 진성여왕(眞聖女王) | 만(曼), 원(垣) | 887년 - 897년 | 경문왕의 딸. |
52 | 효공왕(孝恭王) | 요(嶢) | 897년 - 912년 | 헌강왕의 서자. |
박씨 왕조
대수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53 | 신덕왕(神德王) | 경휘(景暉, 景徽) | 912년 - 917년 | 아달라이사금의 후손. |
54 | 경명왕(景明王) | 승영(昇英) | 917년 - 924년 | 신덕왕의 장남. |
55 | 경애왕(景哀王) | 위응(魏膺) | 924년 - 927년 | 신덕왕의 차남. |
김씨 왕조
대수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56 | 경순왕(敬順王) | 부(傅) | 927년 - 935년 | 문성왕의 6대손 이찬(伊飡) 김효종의 아들. |
추존왕
대수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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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 문흥대왕(文興大王) | 김용춘(金龍春) | (추존) | 태종무열왕에 의해 추존됨,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
(추존) | 흥무대왕(興武大王) | 김유신(金憲貞) | (추존) | 853년에 왕으로 추존됨, 김해 김씨 중시조. |
(추존) | 개성대왕(開聖大王) | 김효방(金孝芳) | (추존) | 선덕왕에 의해 추존됨, 선덕왕의 아버지. |
(추존) | 현성대왕(玄聖大王) | 김법선(金法宣) | (추존) |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고조부. |
(추존) | 신영대왕(神英大王) | 김의관(金義寬) | (추존) |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증조부. |
(추존) | 흥평대왕(興平大王) | 김위문(金魏文) | (추존) |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조부. |
(추존) | 명덕대왕(明德大王) | 김효양(金孝讓) | (추존) | 원성왕에 의해 추존됨, 원성왕의 아버지. |
(추존) | 혜충대왕(惠忠大王) | 김인겸(金仁謙) | (추존) | 소성왕에 의해 추존됨, 소성왕의 아버지. |
(추존) | 익성대왕(翌成大王) | 김헌정(金憲貞) | (추존) | 희강왕에 의해 추존됨, 희강왕의 아버지. |
(추존) | 선강대왕(宣康大王) | 김충공(金忠恭) | (추존) | 민애왕에 의해 추존됨, 민애왕의 아버지. |
(추존) | 혜강대왕(惠康大王) | 김예영(金禮英) | (추존) | 신무왕에 의해 추존됨, 신무왕의 조부. |
(추존) | 성덕대왕(成德大王) | 김균정(金均貞) | (추존) | 신무왕에 의해 추존됨, 신무왕의 아버지. |
(추존) | 의공대왕(懿恭大王) | 김계명(金啟明) | (추존) | 경문왕에 의해 추존됨, 경문왕의 아버지. |
(추존) | 혜성대왕(惠成大王) | 김위홍(金魏弘) | (추존) | 진성여왕에 의해 추존됨, 진성여왕의 숙부. |
(추존) | 선성대왕(宣聖大王) | 박예겸(朴銳謙) | (추존) | 신덕왕에 의해 추존됨, 신덕왕의 의부. |
(추존) | 흥렴대왕(興廉大王) | 박문원(朴文元) | (추존) | 신덕왕에 의해 추존됨, 신덕왕의 생부. |
제1대 박혁거세왕 실록
(서기전 69년~서기 4년, 재위 서기전 57년 모월~서기전 4년 3월, 약 60년)
건국 시조 혁거세왕과 신라의 세력 확대
혁거세와은 진한 6부의 하나인 양산촌 출신이며, 서기전 69년에 태어났다. 열세 살이 되던 서기전 57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세력을 확대하여 진한 6부를 장악하였다.
신라어로 표주박이라는 뜻의 박(朴)을 성씨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알에서 나왔고, 알이 표주박처럼 생긴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혁거세'를 그의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사람들이 이름을 묘호로 삼지 않았기에 '혁거세'는 이름이 아니라 묘호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헉거세'는 '불구내'라고도 하는데, 이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느 뜻이다. 아마도 혁거세는 불구내의 뜻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인 듯하다.
혁거세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실한이었는데, 이는 신라어로 왕 또는 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일설에는 그가 맨 처음 입을 열 때 스스로를 '알지거서간'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알지'는 신라어로 어린아이를 뜻하므로 알지거서간은 '어린아이 왕'이란 뜻이다.
신라인들이 왕을 거서가니라고 한 것은 아마도 마한에서 왕을 파견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거서간의 한자 의미를 풀어보면, '서쪽에 살던 왕'이란 뜻이다. 신라인들은 마한을 서한이라고 불렀는데, 서쪽에서 살던 왕은 마한에서 온 왕을 지칭한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마한에서 파견된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거서간이란 말은 마한 속국 시대의 용어라 볼 수 있다.
왕위에 오른 혁거세왕은 17세가 되던 재위 5년(서기전 53년)에 고허촌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맞아 세력을 넓혔고, 29세가 되던 재위 17년에 알영과 함께 국내 6부를 순회하며 진한 전역의 영토를 확대했다. 사기와 유사에는 6부 촌장이 헉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나 실제는 이 때에 진한 6부를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31세가 되던 재위 19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옴으로써 신라국의 영역은 더욱 확대된다. 사기에는 변한의 나라들이 모두 신라국에 항복해 온 것은 아니었다. 변한 12국 중 상당수는 향후 가야 개국에 참여하거나 백제에 복속되었기 때문에, 이때 신라에 복속해 온 나라는 기껏 2~3개국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33세가 되던 재위 21년(서기전 37년)에 서라벌에 금성을 쌓고, 6년 후인 서기전 31년에 비로소 궁실을 갖게 되는데, 아마도 이때가 실질적인 개국 시점이 될 것이다. 신라인들이 서기전 57년을 개국 시점으로 잡은 것은 서기전 37년에 개국한 고구려보다 신라가 먼저 세워진 국가임을 내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즉, 서기전 57년부터 약 16년 동안은 소국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었고, 서기전 3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대개의 국가들이 궁실을 짓고 왕을 세우는 것이 통례인바, 혁거세왕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39세가 되던 서기전 31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한 6부와 변한 일부 국가를 합쳐 한반도 동남쪽을 장악한 신라국은 이때부터 마한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간 마한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여 마한 왕실과 등을 지고, 북방으로도 세력을 확대하여 한반도 낙랑국(동예)과 국경을 맞대게 됨으로써 국경 분쟁도 잦게 된다.
그 때문에 재위 30년(서기전 28년) 4월엔 낙랑이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신라 방비가 튼튼하였고 백성들이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에 놀라 스스로 물러갔다.
이렇듯 신라의 위세는 급속히 성장하였고, 급기야 마한과 힘을 견줄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 혁거세왕은 재위 38년(서기전 20년)에 왜인 출신 신하 호공을 마한 왕에게 보냈다. 마한 왕은 신라가 수년간 조공을 바치지 않는 점을 나무라자, 호공은 되려 신라국의 힘을 과시하며 예를 갖춰 찿아 온 것만도 과분한 대접이라고 응수했다. 이에 마한 왕은 분을 참지 못하고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호공은 무사히 돌아왔다.
마한 왕은 이때 진한뿐 아니라 변한도 조공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변한의 여러 나라도 신라의 힘을 믿고 마한에 조공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라의 힘이 성장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마한은 지방자치형태인 분국 국가 체제였는데, 신라는 그와 달리 분국 10여 개를 하나로 묶은 새로운 개념의 중앙집권적 연합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고 삼한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국가의 탄생은 주변 분국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여기저기서 국가연합을 모색하는 상황이 연출하게 된다.그것은 곧 월지국 중심의 마한 왕조 체제를 붕괴시키는 역활을 했다.
이 때문에 마한 조정 내부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호공이 다녀 온 다음해 마한 왕이 갑자기 죽게 된다. 이는 마한 조정 내부에서 국가 연합을 모색하려는 세력과 분국 상태를 유지하려는 세력 간에 치열한 세력 다툼이 전개되어 그 와중에 마한 왕이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한 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신라에서는 마한을 정복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혁거세왕의 반대로 정벌론은 수그러들었지만, 그만큼 마한의 상황은 내부 분열이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헉거세왕은 남의 불행을 이용하려는 것이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정벌론을 무마시키고 조문 사절단을 보냈다. 신라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분열 상태의 마한을 공격했을 경우 마한이 다시 결집되는 상황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마한이 그처럼 분열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마한 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서기전 18년 마한 북방 지역에서 고구려에서 온 망명 세력인 온조에 의한 백제의 건국이었다. 백제의 건국은 마한 땅 전체에 세력을 확장하려던 신라에겐 대단히 위협적인 복병이 아닐 수 없었다. 백제는 이미 고구려에서 중앙집권적 형태의 국가를 경험한 나라였고 실제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던 중 이었다. 따라서 백제가 세력 확장을 도모할 경우 마한 땅은 순식간에 온조에게 잠식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국의 눈은 그기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마한 왕실의 위상이 떨어지고, 마한 분국들의 결속력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혁거세왕은 후반기 20년 동안에도 평화 정착과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하였다.
그럼에도 혁거세왕 말기에 이르러 내란이 발생하였다. 당시 혁거세왕은 일흔 두살의 나이의 노인이었다. <삼국사기>에 '금성 우물에서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고 은유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반란이 일어났다는 표현이데, 두 명의 왕은 누구를 지칭한 것일까? 한사람은 물론 혁거세왕일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혁거세왕을 제거하려는 세력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높다. 반란군은 혁거세왕을 포함하여 왕후 일영, 태자 등 왕족 대부분을 참살하고 시체를 토막 내는 등 잔학한 짓을 저지르고 왕권을 찬탈하려 하였으나 근왕파에 의해 결국 모두 진압되고, 살아남은 적자 남해왕이 근왕파와 백성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반란군의 우두머리이며 반란이 일어난 이유에 대한 기록이나 언급은 어디에도 찿을 수가 없다.
혁거세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남해왕이다. 그는 장남이 아니며 태자였다는 표현도 없다. 남해왕은 혁거세왕이 왕위를 물려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이는 혁거세왕의 태자가 죽임을 당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말하자면, 혁거세왕 재위 60년 9월에 반란이 일어나 태자는 죽고, 다른 적자인 남해만 겨우 살아남아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혁거세왕은 만년에 왕위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이듬해 3월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죽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혁거세왕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라 왕후와 함께 살해되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 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 난 몸을 다섯 능에 각각 장사하고 이름을 사릉이라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이 내용에서 혁거세왕은 시신이 동강 났으며 왕후 알영과 그를 합장하려는 것을 방해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그래서 혁거세와 알영은 합장되지 못했다. 혁거세와 알영이 반란 중에 죽었다면, 그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물론 게중에는 태자와 직계 혈족들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혁거세의 시신은 이레나 지난 다음에 발견되었고 여러 왕족들이 목이 짤리고 7일이 지난 다음에야 발견되었다면 여러 시신 중에서 딱히 혁거세의 시신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시신을 합장하자는 사람과 각기 다섯 능으로 장사하자는 의견이 상충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후자의 의견이 채택되어 다섯 능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혁거세왕의 가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부인은 알영이고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남해왕이 그와 알영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남해왕이 장남이 아닌 점과 혁거세왕 말기에 내란이 일어난 것을 볼 때, 자식은 장남, 남해왕, 일지갈무왕, 허루왕 등 여러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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