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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6 : 신라의 역사 5(제1대 박혁거세왕 1) 본문
한국의 역사 106 : 신라의 역사 5 (제1대 박혁거세왕 1)
1. 신라인들의 정체
신라인들이 중국 대륙에서 흘러든 종족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이 내려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진한 사람들 중 일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한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곧 신라인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한(韓)편에는 진한 사람들에 대해 '옛 적에 진(秦)니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 온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언어와 풍습도 진나라 사람들과 유사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진나라 사람들은 아니었다.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서 왔다는 것으로 봐서 그들은 진에게 나라를 빼앗긴 변방 민족이었다.
진의 시황제는 서기전 221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는데, 이때 진과 함께 이른바 '전국칠웅'이라 불리던 제, 한, 조, 위,초,연 등의 땅을 모두 병합하였다. 통일 후, 시황제는 북방에서 밀려드는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때 많은 변방 민족이 부역에 동원되었다. 그 노역을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으로 흘러 든 사람들은 대부분 진의 동북방에 자리 잡은 연나라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통을 받다가,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함으로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최치원의 주장처럼 진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연나라 출신이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다른 기록에서 '조선(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조선의 유민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지>의 '한'편에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의 망명자 위만에게 공격을 받아 자리를 빠앗기자, 주위의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 땅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 왕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조선 백성들이 준왕을 따라 대거 한국으로 망명하였다는 뜻이다.
준왕은 그 뒤로 대가 끊겨 멸망했지만, 그와 함께 망명한 백성들은 그대로 한국 땅에 살았다. <삼국사기>의 조선의 유민은 바로 이때 준왕과 함께 한국에 왔던 고조선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마한이었다. 마한 왕은 연나라 망명객들이 대거 밀려오자, 동쪽 땅을 내주고 살게 했다. 그 뒤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들과 함께 망명해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동쪽 땅을 내주고 살도록 했다. 준왕이 한국에 와서 한 왕이 되었다는 <삼국지>의 기록은 준왕이 일시적으로 마한을 장악했다가 마한의 반격으로 몰락했고, 이후 마한 왕의 배려로 조선 유민들이 동쪽 지역으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인의 모태인 진한의 구성원은 크게 연나라 망명객과 고조선 망명객으로 나뉠 수 있다. 이들은 한반도 남동부 지역에 머물며 진변 24국을 이뤘다.
진한 12국의 왕은 마한 사람이었는데, 이는 진한이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는 뜻이며 진한주변에는 변한 12국이 있었는데, 변한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고 의복과 거처가 같았다. 이는 변한 사람 역시 진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연과 고조선에서 온 망명객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따라서 이들 12개국의 국왕도 마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신라는 진한과 변한 24국 중 하나였고, 원래는 사로국이라 불리는 작은 나라였다. 그러다가 마한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사로국을 중심으로 진한 6국이 힘을 모았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서라벌, 즉 신라였다.
신라는 원래 서라벌, 서나벌, 사라, 사로, 계림 등으로 불리었다. 모두 같은 명칭이나 발음만 다를 뿐이다. 계림은 탈해왕 때에 김알지를 계림에서 얻으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하고, 혁거세왕이 계정(나정)에서 태어나고 알영이 계룡의 옆구리에서 나온데서 기인한 것이라고도 한다.
국호를 신라라고 확정한 것은 지증왕 4년인 503년이며, 이는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다.
2. 혁거세의 등장과 그 배경
연의 망명객들이 진한 땅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220년경이었고, 고조선의 준왕이 한국에 망명한 것은 서기전 190년경이었다. 이후 이들 망명족들은 마한 왕의 지배를 받으며 지내다가 서기전 57년에 신라가 개국되면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였다.
신라의 개국은 박혁거세의 등장과 함께 이뤄졌다. 그런데 혁거세의 등장에 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지극히 신화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경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혁거세의 신화를 잘 분석해 보면 그의 등장 배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혁거세의 등장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뤄는데, 알천의 양산촌,돌산의 고허촌,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지촌), 무산의 대수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의 고야촌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의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우물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끓어앉아 울고 있으므로 즉시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어 보니, 그 속에서 어린이가 나왔으므로 이를 거둬 길렀다. 그의 나이 10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존경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이렇듯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는 조금 다르다.
'이때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야산 밑 나정 우물가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끓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가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시키매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밝았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고 칭호는 거실한(또는 거서간)이라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를 고허촌장 소벌공이 혼자 발견하여 키운 것이 아니라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쓰고 있는 점이 <삼국사기>와 크게 다르다. 그러나 혁거세가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삼국유사>에는 양산은 급량부의 땅이다. 즉 혁거세는 급량부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혁거세를 처음 발견하고 키운 사람이 고허촌장 소벌공이라 했다. 고허촌은 사량부 땅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유추하건데, 혁거세는 양산촌 출신으로서 고허촌의 지지를 받아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고허촌 사람들은 양산촌 출신의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을까?
삼국유사에는 알영이 사량리의 알영 우물에 나타난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쓰고 있다. 알영이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녀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꾸민 것이겠으나, 그녀가 사량리 출신인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사량리는 바로 고허촌이다. 고허촌 사람들이 급량부 출신의 혁거세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고허촌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알영이 발견된 것이 혁거세가 발견된 바로 그날이라고 쓰고 잇으나, <삼국사기>에는 알영이 왕비가 된 것은 혁거세왕 재위 5년(서기전 53년)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고허촌 사람들은 양산촌 출신의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공로로 왕비를 자기 마을에서 배출하였던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진한의 왕은 마한 왕이 지명한 마한 출신 사람만 될 수 있었고, 왕위는 세습되었다. 만약 마한 출신 왕족이 혈통이 끊기면, 다시 마한 왕이 새로운 왕을 파견하거나 지명하였다. 그런데 이때 진한 6부의 촌장들이 모여 왕으로 추대한 사람은 마한 사람이 아닌 진한 사람인 혁거세였다. 진한 출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는 것은 마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한 왕실은 진한의 이런 배신 행위에 크게 분노햇지만,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혁거세왕 38년(서기전 20년)에 신라에서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하자,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진, 변 두 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다.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어찌 이와 같은가?"
그러자 호공은 전혀 주눅 든 기색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나라에 두 성인이 출현하여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에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시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호공이 이렇게 힐난하는 듯한 대답을 하자, 마한 왕은 길길이 날뛰며 호공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호공은 무사히 신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마한 왕실의 위상이 얼마나 약화되엇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원래 마한 왕은 월지국에 머물며 본국에 속한 54국과 진한과 변한의 24국을 지배했는데, 신라가 성립될 무렵에는 진한과 변한의 24국은 물론이고 본국의 54국에도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진한과 변한의 망명족들은 바로 이런 마한의 약화를 틈타 독립을 모색하였고, 혁거세의 옹립은 바로 마한으로부터 독립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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