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118 : 신라의 역사 17 (제10대 내해왕)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18 : 신라의 역사 17 (제10대 내해왕)

두바퀴인생 2011. 1. 6. 05:06

 

 

 

한국의 역사 118 : 신라의 역사 17 (제10대 내해왕)

 

제10대 내해왕

내해이사금(奈解泥師今, ? ~230년, 재위 196년~230년)은 신라의 제10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8번째 왕이다.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내례(內禮)부인이며, 비는 석씨로 조분 이사금의 누이이다. 벌휴 이사금의 태자인 골정(骨正)과 이매(伊買)가 먼저 죽고, 골정의 아들(조분 이사금)이 어려 이매의 아들 내해가 왕이 되었다.

 

199년 음력 7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201년 음력 2월 가야와 화친을 요청하였다. 203년 음력 10월에는 말갈의 공격을 받았다.

207년 왕자 이음(利音), 혹은 내음(奈音)을 이벌찬으로 임명했다. 208년 음력 2월 가 국경을 침범하자 이음을 보내 막게 하였다.

 

209년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략하고자 해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해 진한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였다. 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여를 구해냈다. 212년 가야의 왕자를 볼모로 받았다.

 

214년 음력 7월 백제가 요거성(腰車城)을 공격, 요거성주 설부(薛夫)를 죽이자, 이음을 보내 6천여 병사로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였다.

 

218년 백제가 다시 공격해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이사금이 친정하여 격퇴하였다.

 

220년 왕자이자 이벌찬인 이음이 죽어 충훤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222년 음력 10월 백제가 우두주(牛頭州)를 공격, 충훤이 막았으나 웅곡(熊谷)에서 적에 피해 홀로 도망치니, 이사금이 충훤을 강등시키고 연진을 새 이벌찬으로 삼았다.

 

연진은 224년 음력 7월 봉산(烽山) 아래에서 백제와 싸워 승리하고 1천기를 죽이고 사로잡은 뒤 음력 8월 봉산에 성을 쌓았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10대 내해왕 실록 

( ? ~서기 230년, 재위 서기 196년 4월~ 230년 3월,  33년 11개월)

 

난세의 정치인 내해왕과 신라 조정의 안정

내해왕은 벌휴왕의 차남 석이매의 아들이며, 아달라왕의 왕비 내례부인 소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내례부인이 그를 잉태한 것은 아달라왕 21년(174년)경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그가 왕위에 오른 196년에 그는 20대 초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경위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벌휴왕의 태자 골정이 먼저 죽었고, 태자의 장남 조분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친모인 내례부인의 영향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마왕의 딸인 그녀는 지마왕이 죽었을 당시 첫 번째 왕위 계승권자였으나, 나이가 어린 데다 여자였기 때문에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일성왕의 태자인 아달라와 결혼함으로써 정치적 지분을 확보했다. 그러나 석이매와 통정하여 내해를 잉태한 사건으로 아달라왕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벌휴와 힘을 합쳐 아달라왕을 제거했다. 그 후 벌휴왕이 즉위했으나 왕실은 여전히 박씨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내례부인은 박씨 왕실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벌휴왕 재위시에도 그녀의 영향력은 막강하였으며 벌휴왕 이후의 왕위 계승권에 대해서도 깊숙히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씨 왕실에서는 비록 석씨 성을 쓴다하더라도 박씨 왕실의 피가 섞인 인물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그 결과로 내례부인의 피가 섞인 내해왕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판단된다.

 

내해왕은 이처럼 복잡한 권력 함수 관계 속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뛰어난 감각으로 박씨 왕실을 다독이는 한편, 석씨 왕실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 신라 사회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운 좋게도 내해왕이 즉위하던 196년엔 정월에서 4월까지 촉촉한 단비가 이어졌다. 신라 땅은 지형적으로 봄 가믐이 심한 지역인데, 풍작을 예고하는 봄비가 내렸다는 것은 길조였다. 더구나 내해왕이 즉위하던 날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경축하였다고 한다.

 

재위 3년 4월에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는 기사도 보인다. 신라 박씨 왕실의 시조인 박혁거세마저 그의 즉위를 기꺼워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곧 박씨 왕실이 내해왕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비록 출발은 평탄하였으나 치세는 즉위 초부터 전쟁과 천재가 일어나 난관이 지속되었다.

 

우선 천재는 재위 3년(198년) 5월에 서라벌 서쪽 지방에 큰 비가 내려 수해를 당한 주현이 한 두 곳이 아니었고, 200년 7월에는 이른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쳤으며, 201년에는 봄부터 가믐이 닥쳐 죄가 가벼운 사람들을 석방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고, 203년에는 10월에는 복숭아와 오얏나무에서 꽃이 피더니, 전염병이 크게 돌았고, 205년 7월에는 이른 서리와 우박이 겹쳐 심대한 피해를 안겼다. 212년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믐이 들었고, 사형수를 제외하고 모둔 죄수들을 석방하였는데 이는 식량 부족을 해소하고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였다. 214년 5월에는 홍수로 민가가 유실되어 수재민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224년에도 4월에 큰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228년에도 연초부터 7월까지 무려 반 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혹독한 가믐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유랑하기 시작하였고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는 등 조치를 취하면서 왕이 직접 지방을 순행하면서 민심을 다독거리기도 하였다. 231년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민심을 뒤흔들었고, 그해 10월엔 폭설이 내려 무려 다섯 자나 쌓이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이러한 엄청난 천재는 거의 3년에 한 번씩 닥쳤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쟁마져 일어났다. 내해왕 대에는 백제와 왜, 말갈이 신라를 괴롭혔다. 199년 7월 백제가 침공한 이래, 203년에는 말갈이, 208년 4월에는 왜가 침입해 왔다. 내해왕은 차남 이음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한 뒤 왜군을 대적토록 하여 물리쳤으나, 이듬해에도 왜군의 침입이 있었다. 또 이듬해 7월에는 가야에서 반란이 일어나 가야 왕자의 요청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가야는 199년에 수로왕 체제인 본가야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199년 3월 거등왕이 즉위하면서 본가야의 지배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나머지 다섯 가야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특히 함안을 중심으로 한 남강과 섬진강 일대의 아라가야는 일찍이 왜에 진출하여 축자국(북구주)에 영토를 개척하고, 그 대가로 왜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에 따라 왜국에서는 아라가야를 임나(미미나)라는 별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본 가야의 힘이 급속도로 약화되자, 거등왕은 201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는 신라라는 보호막을 형성하여 나머지 다섯 가야의 이탈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너지기 시작한 본가야의 힘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해의 거제도, 남해도 등의 섬 지역과 해안 지역이 가야 연맹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그 결과 209년 7월 여덟 개 지역의 장수들이 연합하여 본가야의 수도인 김해를 공격하였다. 이에 거등왕은 왕자를 급히 신라에 보내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내해왕은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의 대병을 안겨 가야 내전에 개입하였다. 그 결과 반란군 장수들을 모두 죽이고, 6천 명의 포로를 잡아 신라로 압송하였다. 이로써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고 212년에는 왕자까지 신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무렵 백제의 초고왕은 신라의 강성을 염려하여 침략의 기회를 보고 있다가, 214년 7월에 신라 서쪽 전략기지인 요거성(충북 보은 지역)을 함락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그러자 내해왕은 이음에게 병력 6천을 안겨 백제의 사현성을 공략하여 점령하였다.

 

시런 가운데 초고왕이 죽자 백제는 물러났고 덕분에 신라는 이후 몇 년간 전쟁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 백제는 216년 말갈이 적현성을 침략하여 한 차례 전쟁을 치루었다. 그후 백제는 218년 신라의 장산성을 급습하여 포위하자 내해왕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장산성으로 달려가 백제군을  격퇴시켰다.

 

그런데 220년 내해왕은 전장을 누비던 차남 이음이 죽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아마 지병으로 사망한 듯하다. 그러나 내해왕은 백제군의 침입을 우려하여 슬픔을 뒤로하고 충훤을 이별찬 겸 병마사에 임명하는 한편, 양산 서쪽에서 대대적인군대를 사열하였다. 이러한 병력의 시위는 죽은 이음의 공백을 틈탄 군대의 기강해이를 막고 백제군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백제군의 노략질은 면할 수 있었으나, 또다시 2년 뒤인 222년 10월에 백제군이 우두주(경북 예천)를 공격해 왔다. 병마사 충훤이 대적했으나 웅곡에서 크게 패하여 군대를 모두 잃고 단신으로 도망쳐 왔다. 분노한 내해왕은 충훤을 우두진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연진은 224년 7월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급습하여 봉산(구례)에서 1천여 명의 백제군을 대파하였고 봉산성을 쌓아 전초기지를 형성함으로써 국경을 방비하였다.

 

내해왕 치세 동안 이렇듯 재해와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조정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가야 내전에 개입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강력하고 절도 있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내해왕은 재위 35년 3월에 죽었으며, 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는 왕위를 태자 우로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사위이자 조카이고 벌휴왕의 장손인 조분에게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마 자신의 즉위가 발휴왕의 장손이 어린 탓에 즉위한 것에 대한 미안함에 대한 보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고 오랫동안 장수하였으며 지.덕.용맹성을 골고루 갖춘 태자 우로가 즉위하였더라면 신라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내해왕의 왕비는 석씨인데, 그녀는 내해왕의 백부 골정의 딸이며 조부왕의 누나이다. 그녀에게서 2남 1녀를 얻었는데 장남은 우로, 차남은 이음이며 장녀는 조분왕의 왕비 아이혜부인이다. 

 

장남 우로는 내해왕의 태자로 내해왕이 죽으면서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유언으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그는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고 병법에도 밝아 여러 번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209년 가야 내란을 진압하였고, 조분왕 즉위 후에는 231년 이찬의 품계에 있으면서 대장군의 직위를 맡아 감문국을 토벌하였으며, 233년 7월에는 왜군의 침공을 맞아 사도(경북 영일만 일대)에서 화공으로 왜병을 전멸시켰다. 244년 재상 격인 서불한에 올라 병마사를 겸하였다. 245년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대적하다가 패배하기도 했으나 마두책에 의지하여 방어전을 전개하여 신라의 국경선을 지킬 수가 있었다. 이때 우로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찿아 다니면서 일일이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불을 피워 추위를 녹이도록 하는 등 병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용장, 덕장, 지장의 면모를 두루 갖춘 그는 재상으로서도 손색 없는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첨해왕 즉위 이후에도 서불한의 위치에 있으면서 국정을 이끌었고,  249년 4월 왜국왕을 조롱하는 말에 분노한 왜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침공하자 첨해왕이 모략으로 왜군 장수에게 사과하려간 그를 왜군 장수가 붙잡아 화형시켜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살해되는 불운한 최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