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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0 : 신라의 역사 19 (제12대 첨해왕) 본문
한국의 역사 120 : 신라의 역사 19 (제12대 첨해왕)
제12대 첨해왕
첨해이사금(沾解泥師今, ?~261년, 재위 247년~261년)은 신라의 12번째 임금이며,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이다.
재위 원년에 사벌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우로를 파견해 이를 평정하고 사벌국을 폐지해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이는 신라 역사상 첫 주(州)의 설치 사례이다.
249년에는 서불한 석우로의 실언으로 왜가 쳐들어와 우로를 죽였다.
238년 음력 9월 백제가 쳐들어와 일벌찬 익종(翊宗)을 보내 괴곡(槐谷) 서쪽에서 맞아 싸우게 했으나 패배하였다. 그대로 음력 10월에 봉산성(烽山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242년과 243년 연달아 가뭄과 홍수를 맞아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244년 음력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에 음력 3월에 백제가 화친을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12대 첨해왕 실록
( ? ~서기 261년, 재위 서기 247년 5월~ 261년 12월, 14년 7개월)
왕권을 탈취한 첨해왕과 흔들리는 신라 조정
첨해왕은 석골정의 차남이며, 옥모부인 김씨 소생이다. 조분왕의 동복 아우인 그가 왕위를 이은 경위에 대해 삼국사기는 아무런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이는 그의 즉위가 조분왕의 뜻이 아님을 시사한다.
조분왕이 죽을 당시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남은 14대 왕이되는 유례이고, 차남은 제15대 기림왕의 아버지 걸숙이다. 하지만 아들은 정비 아이혜부인 소생이 아니다. 유례는 박나음의 딸 박씨 소생이고, 걸숙은 누구의 소생인지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박씨가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에 들어가 유례를 임신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박씨와 조분왕의 관게가 은밀하게 이뤄졋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따라서 유례는 적자가 아니다. 또 조분왕이 죽은 지 37년 후에 유례가 왕위에 오른 것을 볼 때, 조분왕의 사망 시점인 247년에 유례는 갓난아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걸숙은 그 어머니 출신과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 어머니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또한 걸숙의 아들 기림이 왕위에 오른 것이 조분왕의 사망 시점에서 51년 뒤인 사실을 감안하면, 걸숙 역시 247년에 갓난아이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조분왕의 아우 첨해가 왕위를 이었던 것은 바로 이들 왕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박혁거세왕 이래 아우가 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우는 첨해왕이 처음이다. 신라 사회에서는 아들이 어리면 딸을 대신하여 사위가 왕위를 잇는 것이 그간의 전통이엇다.
만약 조분왕이 별다른 유언 없이 죽었다면, 왕위는 조분왕의 맏사위이자 내해왕의 태자였던 우로에게 돌아가야 했고, 우로가 마땅치 않으면 다음 서열은 둘째 사위인 미추였다. 그런데 왕위는 엉뚱하게도 계승권자와는 거리가 가장 먼 첨해에게 돌아갔다. 말하자면 첨해가 힘으로 왕위를 장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일은 후에 첨해가 갑자기 병사하고, 조분왕의 둘째 사위인 미추가 왕위에 오른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첨해왕은 가장 먼저 자신의 친부 골정의 권위를 세우는 일부터 하였다. 즉위와 동시에 골정을 갈문왕으로 추봉하였는데, 이는 그가 조분왕 재위 동안에도 줄곧 이 일을 추진해 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분왕은 내해왕의 사위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쉽사리 골정을 갈문왕으로 추봉할 수가 없었다. 첨해는 이 점이 늘 불만이었고 그가 즉위와 동시에 골정을 세신갈문왕으로 추봉함으로써 자기가 벌휴왕의 적손임을 노골적으로 과시했을 것이다.
그는 외교 관계에서도 조분왕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영토분쟁을 겪고 있던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고, 왜와도 역시 화친 관계를 맺었다. 이런 일들은 그의 즉위와 동시에 추진되었고, 바로 이듬해에 매듭지어졌다. 첨해왕은 고구려와 왜에 대해 화친을 맺을 때 다소 저자세로 임하였는데, 당시 국정을 맡고 있던 석우로는 이런 점이 못마땅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왜왕을 모독하는 욕설을 쏟아냈다.
"조만간 왜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왕비는 찬부(식모)로 만들 것이다."
이런 우로의 말이 왜국 사신 갈나고강의 귀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로 인해 왜와 신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고, 급기야 왜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첨해는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우로를 몰아세웠고, 결국 우로는 스스로 왜군 장수 우도주군을 찿아가 사과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왜장 우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우로를 화형시킨 뒤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삼국사기에는 우로가 왜 사신 앞에서 왜왕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그간 우로의 행적을 볼 때, 직접 면전에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내해왕과 조분왕 대의 우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치밀하고 후덕하여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인물이었다. 즉 홧김에 아무 소리나 지껄일 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왕에 대한 우로의 모독적인 발언은 신라 신하들끼리 모인 술자리 같은 장소에서 첨해왕의 친왜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한 소리였는데, 누군가 고의로 그 내용을 왜국 사신에게 흘려 우로를 궁지에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즉 249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로의 실언으로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첨해왕이 눈에 가시같으며 자신의 화친 정책에 반대하는 우로를 제거하기 위해 왜인을 끌여들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로는 첨해왕에 의해 왕위를 탈취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였기에 첨해의 즉위 자체가 큰 불만이었을 것이고, 첨해는 그런 우로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로는 다분히 고의로 왜왕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을 것이고, 첨해는 그런 발언을 빌미로 삼아 왜를 끌여들여 우로를 제거했을 것이다. 병법으로 치면 일종의 차도살인계라 할 수 있다.
우로가 비록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는 한 나라의 왕족이요 재상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장의 손에 화형을 당하는데도 첨해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는 첨해왕이 우로의 죽음을 방치하였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로를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바로 첨해왕이라는 뜻이다. 우로의 죽음으로 첨해왕은 왕실과 백성들에게 큰 원망을 들었을 것이다.
시작부터 이렇듯 삐걱거린 터라 첨해왕의 치세는 결코 평탄할 수 없었다. 정치의 불안정, 기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재위 7년 4월에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신라인들의 역사 서술법으로 볼 때 이는 반란의 흔적이 분명하다. 우로의 죽음을 방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이 첨해왕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해 5월부터 7월까지 가믐이 계속되는 바람에 흉년이 들었고, 도둑이 들끓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던 첨해왕에겐 이런 현실이 보통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255년 백제가 침범해 왔다. 첨해왕은 일길찬 익종을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익종은 괴곡 서쪽에서 싸우다가 대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신라군은 계속 밀려 봉산성이 공격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봉산성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신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가믐과 전쟁의 충격에서 좀 벗어날 때쯤인 259년에는 또 한 차례 가믐이 닥쳐 메뚜기 떼가 창궐하는 바람에 큰 흉년이 들었고, 도둑들이 다시 기승을 부렸다. 260년에는 큰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고, 불길하게도 그해 7월에는 혜성이 나타나 첨해왕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또다시 백제가 침입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첨해왕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막기 위해 261년 3월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백제의 고이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첨해왕이 죽은 것은 그해 12월 28일이다. 죽음의 원인은 기록되지 않았고,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고만 쓰여 있다. 죽은 날짜까지 기록에 남긴 것이 무슨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시 사관들은 분명히 그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기록하였을 것이나,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이 사건 전모를 삭제하고 날짜만 남겨 둔 것으로 판단된다.
그 모종의 사건이란 반정이나 독살을 의미할 것이고, 그 반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왕위를 차지한 미추왕과 그 측근들이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첨해왕은 우로를 죽음으로 내몰아 민심을 잃었고, 다시 전쟁과 재난이 이어져 권위를 잃고 말았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미추가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첨해는 살해되었을 것이고, 그의 부인과 자식들도 모두 이때 피살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가족에 대한 언급이 없다.
첨해왕은 재위 3년(249년) 7월 대궐 남쪽에 남당을 지었는데, 이는 왕이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곳이었다. 도당으로 불린 남당은 왕과 신하들이 토론을 벌였던 일종의 정치토론장인 셈인데, 이때 시작된 남당의 전통은 신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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