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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2 : 신라의 역사 31 (제21대 소지왕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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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2 : 신라의 역사 31 (제21대 소지왕 2)

두바퀴인생 2011. 1. 21. 04:11

 

 

한국의 역사 132 : 신라의 역사 31 (제21대 소지왕 2)

 

 

소지왕 실록 계속

즉위 10년 만에 제자리를 찿은 소지왕은 그해 2월 일선군에 행차하여 홀아비,과부,고아,자식없는 노인 등을 찿아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했다. 일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와 군의 죄수들 가운데 사형수를 제외하고 모든 죄수를 석방하는 사면조치도 내렸다. 이듬해 정월에는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농촌으로 돌려보내는 행사도 거행했다.

 

소지왕이 민심 안정책에 주력하고 있을 즈음인 489년 9월 고구려가 다시 북쪽 변경을 침범해 왔다. 고구려 군대는 과현(강원 회양)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이내 남하하여 10월에는 호산성(강원 김화)를 점령했다.

 

이 사건으로 소지왕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는데, 호산성을 빼앗김으로써 비열성(함경 안변) 등 함경도 영토가 고립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소지왕은 비라성을 다시 쌓아 호산성 회복을 노렸는데, 그 무렵 신라 내부에서는 은밀히 반란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반란 시도는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재위 14년 492년에는 가믐이 들자 소지왕은 자신이 부덕하여 그렇다며 음식을 줄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493년 백제 동성왕이 혼인을 요청해 오자,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 결혼동맹으로 발전시켰다.

 

백제와 동맹으로 소지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찿고자 했다. 그래서 장군 실죽으로 하여금 고구려 지역을 선제 공격하도록 했다. 실죽은 북방으로 진격하여 대동강을 건너고 다시 살수(청천강)으로 북상했다. 그러자 살수벌에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군에게 밀려 퇴각하였고, 결국 견아성(충북 일대)까지 쫓겨 내려와 포위되었다. 그러나 백제 동성왕이 병력 3천을 보내  신라군을 돕자,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돌아가던 고구려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의 치양성(황해도 연백 배천)을 포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지왕이 장군 덕지를 시켜 고구려군의 뒤를 쳤다. 신라군의 급습을 받고 고구려군의 대오가 무너지면서 치양성의 백제군까지 가세하자, 고구려군은 괴멸되고 말았다.

 

신라군 덕분에 치양성의 위기를 모면하자, 동성왕은 소지왕에게 사신을 보내 사례했다. 또 이듬해는 가야 왕이 꼬리가 다섯 자나 되는 흰 꿩을 보내와 소지왕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그해 3월 소지왕은 궁실을 증수하는 등 위상 강화에 매진하였는데, 불행히도 그해 5월 큰비가 내려 알천이 넘쳐 민가 2백 호가 잠기거나 떠내려 가는 재난이 일어났다. 또 7월에는 고구려가 우산성(강원 춘천)을 공격해 왔다. 하지만 장군 실죽이 출동하여 니하에서 물리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497년 4월엔 왜인들이 변경을 침입해 와 민심을 흔들어 놓더니, 7월에는 가믐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 흉작을 예고했다. 소지왕은 전국 지방관들에게 능력있는 인재를 천거토록 하여 정면으로 난관을 돌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가운데 8월 고구려가 다시 우산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500년 3월에는 왜군이 장봉진 (경북 포항 근처)을 공략하여 점령해 버렸다. 그야말로 남북에서 적군이 한꺼번에 몰려온 셈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4월에는 폭풍이 일어 너무가 뽑혀 나가고 곡식을 해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거기다 귀족 사이에서  반란 세력이 왕을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그쯤 되자 소지왕도 무력감을 드러냈다. 그 무렵, 소지왕은 벽화라는 한 여인에게 빠져 있었는데, 정사를 제쳐두고 자주 그녀의 집으로 행차하곤 하였다. 그리고 기여코 그녀를 임신시켰다. 사람들은 그 일을 두고 말이 많았고, 소지왕으 그녀를 입궁시켜 후궁으로 삼았다. 하지만 소지왕으 벽화가 궁에 들어온 지 두 달만인 500년 11월 생을 마감하였다.

 

소지왕도 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마립간 칭호를 사용하였다.

 

소지왕은 부인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 둘이며 후비는 여럿 있었다. 선혜부인은 후에 법흥왕의 왕비가 되는 보도부인을 낳았으며, 벽화부인은 아들을 하나 낳았다, 하지만 벽화부인 아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선혜부인은 딸이 둘 있었는데, 법흥왕의 왕비가 되는 보도와 둘째 오도이다. 보도는 소지왕과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오도는 선혜부인이 소지왕 몰래 중인 묘심이라는 인물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당시 신라 왕실에서는 왕비가 사통했다고 해서 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적으로 매우 자유분망하였던 신라 왕실에서 왕비가 사통하여 아이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사통하여 얻은 아이라도 대개 그 아이는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또한 당시의 풍습이었다. 선혜와 묘심이 사통하여 낳은 오도는 후에 화랑의 시조가 되는 위화랑과 사통하여 딸을 낳는데, 그 딸이 법흥왕의 애첩 옥진궁주이다. 옥진은 원래 영실이라는 인물에게 시집을 갔으나 법흥왕이 그녀를 총애하여 애첩으로 삼았다. 그녀와 법흥왕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비대인데, 나중에 이 비대의 왕위 계승권 문제를 놓고 신라 왕실이 큰 혼란을 벌이게 된다.

 

이처럼 당시 신라 사회는 남녀 관계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자유분망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