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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39 : 신라의 역사 38 (제26대 진평왕 2) 본문
한국의 역사 139 : 신라의 역사 38 (제26대 진평왕 2)
제26대 진평왕실록
(서기 567~632년, 재위기간: 서기 579년 7월~632년 정월,52년 6개월)
1. 난국에 휘둘리는 진평왕과 신라의 위축
진평왕은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동륜태자의 아들이며, 입종의 딸 만호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백정이다. 567년에 태어 났으며 572년에 아버지 동륜태자가 죽자, 할머니 사도태후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579년 7월에 사도태후가 진지왕을 폐하자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 겨우 열세 살이었다.
진평왕의 왕위 계승은 전적으로 사도태후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진흥왕이 죽을 무렵, 권력은 왕비인 사도부인과 진흥왕의 애첩 미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진흥왕이 죽자 왕의 죽음을 숨기고 금륜(진지왕)을 불러 자기들에게 충성한다면 왕위를 넘겨 주겠다는 제의를 하였고, 금륜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금륜은 사도태후의 말을 잘 듣지 않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새도태후는 자기의 오빠인 이찬 노리부와 미실의 남편 세종으로 하여금 반정을 도모토록 하여 진지왕을 제거하고 손자 백정을 왕위에 앉혔다.
진평왕(백정)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사도태후가 왕권을 장악하여 오빠인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으며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병권을 맡겼다.
국정을 맡은 노리부는 행정 조직을 개편하여 권력 분립을 시도했다. 581년엔 위화부를 설치하여 인사에 관한 행정을 맡겼고, 583년에는 선부서를 설치하여 대감과 제감 한 명씩 두고 병부에 속해 있던 선박과 항해에 관한 업무를 이관하여 관장토록 하였고, 584년에는 주부령을 임명하여 납세와 부역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으며, 승부령을 임명하여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587년에는 두 명의 예부령을 임명하여 교육, 의례, 외교에 관한 일을 맡겼다. 이로써 신라 조정은 병부를 시작으로 위화부, 산조부, 조부,승부, 예부 등을 설치함으로써 조정 6부의 조직 기반을 형성하였다. 박노리부는 588년 12월에 생을 마감하자 이찬 수을부가 상대등에 임명되어 국정을 도맡았다.
그 무렵, 중국 대륙은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는데, 북주의 외척 양견이 우문 선비의 왕실을 멸하고 수나라를 세웠고, 이어 589년에 남진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했다. 통일 후에도 지방에서 반란이 잇달았으나 양견은 이를 모두 진압하고 정국을 안정시켜 중국 대륙은 빠른 속도로 변모하였다.
이에 진평왕은 594년에 수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596년에는 승려 담육을 보내 수나라 불교를 연구토록 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바쳤다.
이렇듯 신라가 수나라와의 관계에 공을 들인 것은 진흥왕 대에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 양국과 관계가 크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공격시에는 수나라에 의지할 요량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신라는 수나라 양견의 호전성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속셈이었다. 수나라 양견은 호시탐탐 고구려를 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은밀히 수륙군 30만을 양성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그 첩보를 입수한 고구려는 말갈병 1만을 앞세워 598년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하였다. 이에 분노한 양견은 그해 6월 병력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장마 중에 고구려 맹장 강이식 장군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고구려 영양왕은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양견에게 화친을 요청했다. 고구려의 화친 제의를 받은 양견은 못이기는 척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양견은 고구려 정벌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속내를 읽은 백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다면 스스로 향도가 되어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 양견은 백제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그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분노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에 한반도 삼국은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간파한 진평왕은 즉시 대나마 상군을 수나라에 보내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고구려를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구사했다.
그러는 사이 갑자기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왔다. 백제 무왕은 내정의 안정을 도모한 다음 백성들의 단결을 도모하고자 신라에 잃은 옛 영토를 되찿고자 했다. 이에 백제는 602년 8월 아막성(충북 음성 일대)을 공격하였다.
백제 장군 해수의 급습을 받은 신라는 기병 수천을 내세워 대응하면서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에 성을 쌓고 역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신라의 거센 역공이 이어지자, 무왕은 병력 4만을 장군 해수에게 주어 신라가 새로 쌓은 네 개의 성을 공격했다. 신라는 장수 건품과 무은을 앞세워 백제군을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의 매복에 걸려 무은이 말에서 떨어지자 그의 아들 귀산이 소장 추항과 함께 뛰어들어 무은의 목숨을 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전사했다. 그 모습을 본 신라군이 사기가 올라 백제군을 공격하자 백제군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백제군이 불러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밀고 내려왔다. 603년 8월, 고구려는 장군 고승을 앞세워 북한산성을 공격해 왔다. 스물 일곱의 나이로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 성장한 진평왕이 직접 군대 1만을 이끌고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쳐 위상을 떨쳤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를 홀로 상대하기가 힘겨운 진평왕은 귀환과 동시에 대나마 만세와 혜문을 수나라에 사절로 보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도록 하고 수나라를 도와 고구려를 협공하려 하였다. 또 605년 8월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진평왕의 의도는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당시 수나라 양견이 아들 양광(양제)에게 살해되어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양광은 부왕 양견에 비해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인물이었으며 섣불리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권을 장악한 뒤, 낙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대운하 공사를 하는 등 일단 내치에 힘쓰며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고구려도 그런 수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당장에 양광이 고구려를 침공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런 시기를 틈타 신라를 공격하였고 백제 또한 무왕이 병력을 증강하여 신라 공격의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처지에 놓이자, 진평왕은 608년에 중국 사정에 밝은 승려 원광을 시켜 수나라에 청병의 글을 쓰게 하였는데,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의 강력한 요구를 물리치지 못했다.
그 무렵, 양광은 누차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고구려가 받아들이지 않자, 침략을 결심하고 있던터에 신라왕의 청병하는 글을 보자 한층 힘을 얻게 된다.
신라가 수나라에 청병하는 글을 보냈다는 소식에 접한 고구려 영양왕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변경 지역에서 8천 명의 주민을 포로로 잡아갔다. 두 달 뒤에는 다시 우명산성(함경남도 안변 근처)을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다급해진 진평왕은 611년에 다시 군대를 청하는 글을 수나라에 보냈으며 당시 양광은 고구려 침공군을 점검중에 있었다. 양광은 그해 4월 지금의 북경 지역인 탁군에 집결시킨 뒤, 612년 정월에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선방으로 몇 달 지나지 않아 처참한 모습으로 퇴각해야 했다. 그러나 양광의 고구려 공격은 그 이후로도 3년간 계속 이어졌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수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에 돌입하자 먼저 움직인 쪽은 백제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을 염려하여 신라를 치지 못하였는데, 전쟁이 시작되자 신라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611년 7월에 신라의 가잠성(충북 괴산)을 포위하였으며 가잠의 현령 찬덕이 백 일 동안 싸우며 버텼으나, 백제의 총공세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613년 수나라가 양현감의 난으로 흔들리자, 고구려는 전쟁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찿고 있었고 백제도 신라를 공격하다가는 고구려의 침공에 뒷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병력 동원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616년 10월에 백제는 신라의 모산성(전북 남원)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라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전초전이었기에 오래가지 않았다.
그 무렵, 중국 수나라는 618년에 양광이 농민군에 살해되고, 태원의 귀족 이연이 반란군을 장악하여 당나라를 건국했다. 당의 건국으로 고구려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진평왕은 북한산주 군주 변품에게 가잠성 수복 명령을 내렸다. 이때 가잠성 공격에서 가잠성 전 성주 찬덕의 아들 해론이 참전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가잠성 전투에서 패배한 진평왕은 잠시 전쟁을 접고 당 고조 이연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국교를 맺었다.
당나라를 의식한 고구려와 백제는 한동안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당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고, 당 고조는 삼국이 서로 싸우지 말 것을 희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이연의 취지를 안 고구려와 백제는 함부로 묵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623년 백제가 신라의 늑노현을 공격함으로써 5년간의 침묵이 깨졌다. 624년 10월에는 백제가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여섯 성에 대해서 대대적인 파상공세를 펼쳐 신라 장군 눌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봉잠, 앵잠, 기현의 세 성이 함락되었다.
진평왕은 625년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당나라에 조회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자주 신라를 침공한다며 고구려를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이연은 고구려에 주사자를 보내 신라와 화친할 것을 권고했다.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온건주의자인 영류왕은 이연의 권고를 받아들여 신라 공격을 자제함으로써 진평왕은 일단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당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을 누그려 뜨린 진평왕은 백제에 빼앗긴 성들을 되찿으려 했다. 그러나 백제가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해 왔다. 626년 월에 백제군이 주재성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를 죽이고 함락했다. 그러자 신라는 고허성을 쌓아 방비했다. 백제군은 다시 627년 7월에 장군 사걸을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 두 성을 점령하고, 남녀 3백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다시 가잠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총력전을 펼쳤고, 628년에 가까스로 되찿았다. 그후 다시 백제군이 가잠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신라군의 반격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가잠성 회복에 힘을 얻은 신라는 629년 과감하게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태자 책봉 문제로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살해한 뒤 아버지 이연을 폐위시키고 황제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이세민은 강력한 통일 정책으로 내정을 수습하고, 북방의 돌궐과 고구려에도 압박을 가하였는데, 고구려에 대해서 신라와 백제와 화친하고 당에 조공하라는 압박이었다.
이렇듯 당나라의 팽창으로 고구려가 한반도 쪽으로 눈을 돌리기가 힘들게 되자, 진평왕은 김용춘과 김서현을 시켜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토록 했다. 그때 부장으로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이 함께 출전하여 크게 공을 세우고 낭비성 함락을 주도했다.
하지만 신라는 오랜 전쟁으로 유랑민이 늘어나고 농토는 크게 줄어 굶주린 백성들이 많아졌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먹는 자들도 속출하였다. 이는 자연히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조정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631년 5월에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도모했는데, 다행히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진평왕은 그들을 진압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칠숙이 먼저 붙잡혀 처형되고 그의 구족이 함께 처형되었다.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주하였으나, 처자가 보고싶어 나뭇군으로 옷을 바꿔 입고 몰래 집으로 돌아오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이후 국정이 한층 더 어려워지자 진평왕은 당에 대한 의존도를 강화했는데, 절색의 미인 두 사람을 당 태종에게 보내 아부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책사 위징의 권고를 받은 당태종 이세민은 그 여자들을 신라로 돌려 보냈다.
그렇듯 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색공 외교까지 펼치던 진평왕은 이듬해인 632년 정월에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진평왕의 가족들
진평왕의 부인은 정비 마야부인과 후비 승만부인, 후궁으로 이화랑의 두 딸 화명과 옥명 등 네 명이다. 마야부인은 천명과 덕만 두 딸을 낳았으며, 승만부인은 아들을 하나 낳았으나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화명과 옥명도 자녀를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마야부인 김씨(생몰년 미상)
마야부인은 갈문왕 복승의 딸이다. 그녀는 천명과 덕만 두 딸을 낳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진평왕이 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에 그녀 또한 어린 나이에 그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승만부인(생몰년 미상)
승만부인은 누구의 딸인지 기록이 없다. <화랑세기>에 그녀가 마야부인이 죽은 후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고,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일찍 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천명공주(생몰년 미상)
천명은 진평왕의 맏딸이며 , 마야부인 소생으로 선덕왕의 동복 언니이다. 장성하여 진지왕의 맏아들 김용수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그녀는 용수의 동생 용춘을 좋아하였다. 용수가 그녀의 내심을 알고 용춘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용춘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야왕비가 그 사실을 알고, 천명과 용춘이 관계하도록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후에 용수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천명을 맏아줄 것을 이야기 하자 용춘은 그때서야 천명과 그녀의 아들 춘추를 받아들여 부인과 아들로 삼았다.
천명은 원래 왕위 계승권자지만, 진평왕이 덕만공주를 총애하여 그녀에게 양보하도록 했다. 그래서 천명은 덕만의 입장을 고려하여 왕궁에서 물러나 살면서 노년에는 산궁을 지어 놓고 김용춘과 조용히 살면서 여생을 마쳤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덕만공주
선덕왕 실록에서 별도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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