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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2 : 신라의 역사 51 (제31대 신문왕) 본문
한국의 역사 152 : 신라의 역사 51 (제31대 신문왕)
제31대 신문왕
신문왕(神文王, ? ~ 692년, 재위: 681년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자는 일소(日怊). 문무왕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왕비는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이었지만, 즉위 직후에 김흠돌이 모반의 혐의로 숙청되었기 때문에 궁중을 쫓겨났다. 후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딸(신목왕후)을 맞이했다. 665년에 태자가 되었고, 681년 7월에 선왕 문무왕이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 통치의 기반을 굳혀 왕권의 강화에 노력했다. 진골 왕통의 세 번째 왕이었지만 그는 모계로는 진흥왕의 후손으로, 신문왕의 외조부 김선품은 진흥왕의 손자였다.
생애
즉위 직후에, 당나라는 아버지 문무왕의 관직과 작위인<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왕·신라왕>을 계승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즉위로부터 한 달과 지나기 전에, 왕비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과 파진찬 김흥원(金興元)등의 왕족과, 문무왕 시대 상대등인 이찬 김군관(金軍官)이 반란을 꾀했다고 해서 죽였다.
반란 진압의 2개월 후에는 왕궁 경호로서 장군 6명을 배치하고 있어, 중앙 귀족 세력의 억압과 왕권의 강화를 도모한 숙청극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683년 10월에는, 고구려의 유민을 봉한 괴뢰 정권인 보덕국의 안승에 대해서, 소판의 관직의 등급과 함께 신라 왕가와 같은 김씨 성을 하사하여 고구려 왕가와 신라 왕가와의 결합을 도모했고, 안승은 왕도 금성(경상북도 경주시)에 살게 했다.
그러나, 684년 11월에는 보덕국이 지배하는 금마저(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안승의 일족인 대문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신문왕은 보덕국을 멸해, 명실 공히 신라에 의한 반도의 통일 지배가 완성했다.
또, 687년 4월에는 아버지 문무왕, 조부 무열왕, 증조부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 김용춘), 고조부 진지왕, 및 태조대왕(太祖大王, 김씨 왕조의 시조인 13대미추이사금)의 조묘를 제사 지내는 5묘의 제도를 정비해, 유교 이념에 의한 내정의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같은 해 5월, 수조권 만을 행사할 수 있는 녹봉으로서의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2년 뒤(689년 1월)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였다.
그 외 , 국학의 설립, 중앙 관청의 정비, 지방 통치 제도의 확립 등을 완수해 692년 7월에 재위 12년에 사망했다.
가계
기타
진골왕통의 세번째 왕이었으나 그는 모계로는 실제 성골에 해당된다. 그는 부계로는 진흥왕-진지왕-문흥왕(추존)-무열왕-문무왕으로 이어졌으며, 어머니 자의왕후 김씨는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둘째아들 구륜의 아들 김선품의 장녀(長女)이다. 문무왕과 자의왕후는 7촌 고모-조카간이 된다. 따라서 그는 부계, 모계 모두 왕족인 성골이었다.
제31대 신문왕 실록
(?~ 서기 692년, 재위기간 : 서기 681년 7월~ 692년 7월, 11년)
1. 이어지는 내란과 신문왕의 조직 정비
신문왕은 문무왕의 둘째 아들이며, 자의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정명이며 문무왕 5년 태자에 책봉되어,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정명에겐 원래 형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문무왕과 자의왕후의 장남 소명태자이다. 그는 문무왕이 태자시절에 낳은 아들이었고,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자 곧 태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665년에 병을 얻어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둘째인 정명이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곧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김흠돌이었다. 흠돌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로서 화랑도의 거두였으며,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이모인 문명왕후의 후광을 입은 그는 가야파 출신을 왕후로 세우기 위해 문무왕이 태자 시절 자의부인이 태자비에 책봉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런 경향은 자의부인이 왕후가 된 뒤에도 이어졌다. 문무왕은 그런 흠돌을 다독거리기 위해 그의 딸을 자신의 아들인 정명의 태자비로 맞아들여야만 했다. 문무왕의 그런 무마책 덕분에 흠돌의 태도는 다소 누그러졌다.
그런데 태자 정명이 흠돌의 딸을 총애하지 않자, 흠돌은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과 모의하여 야명부인 소생의 인명을 왕으로 세우고 반란을 획책했다. 문무왕의 임종이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자의왕후는 혹 흠돌이 반란을 획책할지 모른다는 판단 아래 북원에 있던 김오기를 불러들여 호성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호성장군은 대궐의 군무를 책임지는 장수였는데, 당시 호성장군은 흠돌의 매형 진공이 임명되어 있었다. 그는 호성장군의 직위를 제왕이 임종을 앞 둔 위기시에 오기에게 넘겨주지 못하겠다며 버티고 있었고, 진공과 흠돌은 문무왕이 죽기만 하면 바로 군대를 일으켜 정명을 내쫓고 인명을 왕으로 세운다는 계획을 이미 세워두고 있었다.
진공이 그렇게 버티자, 오기는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문무왕은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진공은 그것을 비밀에 부치고 은밀히 궁밖의 군대를 불러들여 인명이 머물고 있던 야명궁과 상대등 군관의 집을 호위하며 난을 획책했다.
낭두로 있던 오기의 심복 한 사람이 그 사실을 알려 줬고, 오기는 순지, 개원, 당원, 원수, 용원 등과 더불어 은밀히 사병을 모아 입궐했다. 그리고 흠돌의 편에 서 있던 시위대의 대감들을 모두 파면해 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흠돌이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대궐을 포위했다. 하지만 이미 오기의 전갈을 받은 서불한 진복이 수군을 이끌고 와서 반란군 흠돌의 포위망를 깨뜨렸다. 그리고 도성 밖에 대병력이 와 있다고 외쳐 반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흠돌은 상대등 군관과 각간 진복이 문무왕의 밀조를 받아 인명을 즉위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군관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고, 진복은 이미 포위망을 뚫고 진압군이 들어온 터라 흠돌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반군은 내부적으로 패가 갈리어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흠돌은 당황하여 포위를 풀고 달아나려 했다. 오기와 진복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공격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 흠돌과 진공, 흥원 등이 사로잡혀 처형됨으로써 흠돌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때가 신문왕 즉위년 8월이었으니, 불과 즉위 한 달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즉위 초부터 한 차례 곤욕을 치른 신문왕은 반란에 화랑도의 낭도들이 대거 가담한 죄를 물어 화랑도를 폐지하고, 그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예속시켰다. 당시 화랑도의 풍월주 자리를 흠돌의 조카 신공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흠돌의 반란에 화랑도의 낭도들이 대거 가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지방의 화랑 조직은 그대로 유지시켰는데, 이것이 점차 성장하여 화랑도를 부활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풍월주 제도는 사라지고, 국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중앙의 조직이 병부와 연결되어 있어서 과거와 같은 독자적인 형태는 이루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김대문은 풍월주 제도가 유지되던 제32세 풍월주 신광까지만 <화랑세기>에 기록하고 있다.
신문왕은 즉위 초에 한 차례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이 혼란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홈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정적들을 대거 척결할 수 있었고, 그것은 왕권 강화로 이어졌다.
우선 시위대의 시위감을 없애고, 그 대신 장군 6명을 배치하여 왕이 직접 장군들을 통하여 호위 업무를 지시하는 체계를 세웠다. 위화부령 두 명을 임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관리 선발과 추천을 맡게 함으로써 왕이 직접 인사권에 관여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또 국학을 세워 국가 주도로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지방 귀족득의 힘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문왕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지방의 반란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서 683년 10월 당시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여 와 있던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인 보덕왕 안승을 도성으로 불러들이고, 소판 벼슬을 내렸다. 또 김씨 성을 하사하고 집과 땅을 내려 다독였다.
신문왕은 신라 조정의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될 것으로 판단하고 옛 백제 지역인 금마저(익산)에 머물고 있던 안승을 반란의 불씨를 없애기 위해 도성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신문왕의 그런 의도는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금마저에 머물고 있던 안승의 조카 대문이 병력을 일으켰다. 다행히 대문은 반란 초기에 붙잡혀 처형되었는데,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고구려 유민들이 금마저 관리를 죽이고 주변을 장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신문왕은 토벌대를 보내 그들을 진압하고, 주모자를 처형하고 나머지 그곳에 살던 고구려 유민들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살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에 한층 박차를 가하여 685년에 완산주를 설치하고 총관을 파견하였다. 또 거열주를 분리하여 청주를 설치하였고, 이후 사비주를 낮춰 군으로 강등시켰으며, 웅천군을 주로 높혔고, 발라주를 군으로 강등하였으며, 무진군을 주로 높였고, 일선주를 폐지하고, 사벌주를 둠으로써 9주를 확립하였다. 남원을 소경으로 삼아 5소경 제도도 확립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통일 시대의 지방 조직 정비를 완성하고 9주 5소경을 정착시켰다.
신문왕은 도성을 옮기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래서 청주에 서원경을 설치하고 성곽도 쌓았다. 신문왕이 도읍을 옮기려 한 것은 아마도 경주의 지리적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요새로서는 손색이 없으나, 통일된 영토의 중심이 되기엔 알맞지 않는 곳이었다. 동남쪽으로 지나치게 지우친 까닭에 서쪽과 북쪽에 대한 통치가 원활하지 않았고, 동쪽이 바다로 왜군이 침입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우려도 있었고, 이미 백제 땅을 병합하고, 대동강 이남 지역의 고구려 땅까지 얻은 마당에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경주 도성을 유지시킬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영토의 중심지인 청주로 천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천도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아마도 서라벌에 터전을 둔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듯하다.
이렇듯 신문왕은 통일 이후의 조직 정비 작업에 주력하였고, 이는 신라의 국력 강화엥 큰 도움이 되었다.
신문간 연간엔 최치원, 강수와 더불어 신라의 3대 문장가로 알려진 설총이 활동한 시기이기도 하다. 대승 원효의 아들이자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 소생인 그는 특히 한학에 심취하여 이두(향찰)를 집대성하는 큰 공적을 남겼다.
신문왕은 기분이 울적하면 설총을 불러 고상한 담론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청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설총은 고사를 들려 주면서 왕도가 어떤 것인지 가르치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신문왕은 기꺼이 설총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왕자들에게 가르쳐 주도록 했다고 한다.
신문왕은 즉위 12년째인 692년 7월에 생을 마감했으며, 능은 낭산 동쪽에 마련되었다.
신문왕의 가족들
신문왕은 두 부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다. 첯 부인 폐비 김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둘째 신복왕후는 이홍과 흥광, 근질, 사종을 낳았다. 이홍과 흥광은 나중에 다루고 여기서는 폐비 김씨, 신목왕후, 근질, 사종에 대해서만 기술한다.
폐비 김씨
페비 김씨는 흠돌의 딸이며, 폐출되어 시호는 기록되지 않았다. 신문왕이 태자 시절에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신문왕이 그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은 김씨의 아버지 흠돌이 문명태후의 조카로서 가야파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무왕은 문명태후를 위로하고 가야파를 다독거리려고 흠돌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문왕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문왕을 몹시 원망하였는데, 그런 가운데 문무왕이 죽자, 흠돌이 신문왕을 제거하기 위해 인명 왕자를 앞세워 화랑도 낭도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흠돌이 반란에 실패하여 죽음을 당하고, 그녀 또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
신목왕후
신목왕후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이다. 그녀는 원래 신문왕의 형 소명태자와 정혼한 사이였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소명태자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자, 스스로 소명태자의 제주가 되길 원했다. 자의왕후가 이를 허락하여 그녀는 소명의 제주로서 수명궁으로 불리었다.
그 뒤 정명이 태자로 책봉되어 자의왕후와 같이 자주 소명궁을 찿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녀와 가까워져 관계를 하게 되었고,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이홍(효소왕)이다.
당시 정명은 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두고 있었기에 신목을 정비로 삼지 못했다. 단지 후궁으로 삼아 선명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선명궁이라 불렀다.
신문왕이 즉위 한 후, 흠돌의 딸이 그 아비의 반란으로 내쫓기자, 신문왕 3년인 283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근질
근질은 신문왕의 셋째 아들이며, 신목왕후 소생이다. 성덕왕 25년인 726년에 당에 조공 사절로 간기록이 있다. 이때 그는 당나라로부터 낭장 벼슬을 받았다. 그외 기록은 전혀 없다.
사종
사종은 신문왕의 넷째 아들이며, 신목왕후 소생이다. 성덕왕 27년인 728년에 당에 토산물을 바치기 위해 조공 사절로 간 기록이 있다. 그는 이때 당나라 국학에 신라 왕실 자제들을 입학시켜 줄 것을 서면으로 요청하여 승낙을 얻어냈다. 당나라에서 과의 벼슬을 받았으며, 숙위로 머물러 있었다. 그외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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