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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4 : 신라의 역사 53 (제33대 성덕왕) 본문
한국의 역사 154 : 신라의 역사 53 (제33대 성덕왕)
제33대 성덕왕
성덕왕(聖德王, ?~737년, 재위: 702년~737년)은 신라의 제33대 왕이다. 이름은 흥광(興光). 원래의 이름은 융기(隆基)였지만, 당의 현종과 이름이 같아서 712년에 당의 칙명에 의해서 개명을 하였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神穆王后). 왕비는 순원 이찬의 딸 소덕왕후이고, 효소왕의 동복 동생이다. 효소왕이 아들을 두지 않고 죽자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시호는 성덕(聖德)이고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생애
선왕의 죽음으로 대해 당의 측천무후로부터 위령의 사자를 받아 성덕왕은 작호를 모두 계승해<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에 책봉 되었다. 현종이 즉위 한 후 713년 10월에는,<표기장군 특진 행좌위위대장군 사지절 대도독 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이란 작위를 받았다.
721년 7월에는 발해와 신라의 국경 지대에 장성을 쌓고, 발해가 당의 등주(산동 반도)에 쳐들어갔을 때에는, 당으로부터 733년 7월에<개부이동삼사 영해군사>이란 작위를 받고 동시에 칙을 받아 발해의 남부를 공격했다. 이 출병에 대해서는 폭설이 내린 것과 진로가 협소한 적도 있고, 신라군의 대부분은 사망해 공적을 올리는 일 없이 퇴각하게 되었지만, 신라와 당나라의 사이에 세력을 늘려 온 발해에의 대항이라고 하는 이해가 되어, 당과의 친밀한 관계가 재구축 되어 735년에는 당나라로부터 정식으로 대동강 이남의 영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 당에 대해서는 빈번히 조공·하정사의 파견을 행해, 왕자·왕제를 당나라 황제의 숙위나 국학에 들어가게 하는 등 내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문물의 도입에 기여했다.
704년 3월의 「최승왕경」, 717년 9월의 「십철72제자도」등이 성덕왕대에 가져와진 것으로서 기록에 남아 있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계의 정도를 높여 722년에는 모벌군성(경상북도 경주시)을 쌓아 일본 도적의 침입을 막을 대비했다.
731년에는 일본의 전선 300척이 동부 해안에 쳐들어와 변경을 덮쳤지만 이것을 격파했다.
중앙 관료 기구에 대해서, 713년에는 예부 아래에 전사서를 창설, 714년에는 조서·상표문을 직능으로 하는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개칭, 717년에는 의박사·산박사를 창설하는 등, 섬세한 정비를 진행시켰다.
또, 신라의 중앙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에 대해서, 종래는 왕의 재위중의 퇴임이 인정받지 못했지만, 728년에는 성덕왕은 상대등 배부(裵賦)의 퇴임을 허가해, 신라에 있어서의 상대등의 최초의 해임 예가 되었다. 왕권을 지지하는 중앙집권적 관료 기구가 정비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귀족 연합의 약체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705년 10월, 706년으로 계속 흉작에 휩쓸려 아사하는 백성이 대부분 생겼다. 대기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양서가 전하고 있어 상당한 대기근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대기근 이외에도 재위중에는 종종의 천변지이가 있었다.
722년에는 왕토사상에 의거하여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했다.
재위 36년 737년 2월에 사망. 성덕왕으로 시호가 추봉되고, 사후, 당나라는<홍여소경·태자태보>의 관직과 작위가 추증되었다.
가계
- 아버지 : 신문왕
- 어머니 : 신목왕후 김씨
- 왕후 : 성정왕후(成貞王后) - 승부령(乘府令),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 엄정왕후(嚴貞王后)라고도 한다.
- 왕후 : 소덕왕후(炤德王后, ~ 724년) -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참조
제33대 성덕왕 실록
(?~ 서기 737년, 재위기간 : 서기 702년 7월~ 737년 2월, 34년 7개월)
1. 성덕왕의 민심 달래기와 이어지는 천재지변
성덕왕은 신문왕의 차남이며, 신목왕후 소생으로 효소왕의 동복 아우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다하여 재위 11년 3월에 당의 칙명에 의해 흥광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702년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이 즉위년에 가장 중점을 둔 일은 민심달래기였다. 즉위년 9월에 죄수들을 대거 사면한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문무관 전원의 관작을 한급씩 올려주고,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간이나 면제시킨 것은 이전 왕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지나친 조치였다. 그가 그렇게 민심을 얻기 위해 크나큰 모험을 한 것은 효소왕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의 친형 효소왕은 왕권을 되찿기 위해 권신들과 권력다툼을 벌이던 중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효소왕의 동복 아우인 성덕왕이 형을 죽인 권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권신들과 성덕왕이 결탁하여 효소왕을 죽였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당시 민심은 성덕왕을 외면하였을 것이고, 성덕왕은 돌아선 민심을 다시 돌려 놓기 위해 조세를 1년간이나 면제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던 성덕왕은 이 조치 덕분에 관리와 백성들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했고, 그것은 곧 정치적 안정으로 이어졌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안정되었다. 당에서는 효소왕의 칭호를 그대로 내려 왕위 계승을 인정했고, 일본에서는 이례적으로 204명이나 되는 사신을 보내 그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재위 3년인 704년에 승부령 소판 김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왕실의 기강을 다잡았고, 당에는 꾸준히 견당사를 파견하여 그들의 선진문물을 수입했다. 또한 왕실과 귀족 자재들을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켜 학문을 배워오는 일도 병행했다. 때때로 조공 사절을 보내 당과 친분을 강화하는 한편 당과의 친분 관계를 고려하여 새로 일어난 발해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성덕왕은 당과 밀착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굴욕적인 외교 형태도 보였다. 재위 22년에 중류 귀족층의 미인 두 명을 뽑아 당나라 현종에게 바쳤던 것이다.
한편, 재위 20년경부터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아마도 일본과의 교역 문제 때문인 듯하다. 당시 일본은 발해와 신라 등지에서 곡식을 사 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신라가 굳이 일본과 교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곡식을 거래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일로 신라와 일본 사이엔 전운이 감돌았다. 성덕왕은 재위 21년(722년) 10월에 일본의 침입을 염려하여 모벌군성을 쌓아 침입로를 막았다.
그 뒤로 신라와 일본의 무역 마찰은 계속되었고, 급기야 731년에 일본은 함대 3백 척에 군대를 나눠 싣고 신라 땅에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일본의 침입을 예상하고 침입로를 철저히 수비하고 있던 터였다. 결국 일본은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성덕왕은 직접 훈련장을 방문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간과 이찬 품계를 가진 왕족들을 장군으로 임명하는 등 국방에도 심혈을기울였다. 그런 상황에서 733년에 발해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당 현종은 신라가 발해의 남부지역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고, 성덕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많은 동사자가 발생하여 도중에 돌아와야 했다.
성덕왕은 이 사실을 당에 알리고, 참전이 어렵다고 하였다. 이때 폭설을 만나 병력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보고한 것은 과장된 듯하다. 사실 성덕왕은 발해와 당의 전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폭설을 핑계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성덕왕은 결코 폭설이 핑계가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기 위해 당 현종에게 사죄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모두 당의 의심을 피함으로써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자구책으로 보인다.
어쨌던 이런 노력 덕분에 당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734년에는 당 현종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이 신라의 땅임을 확정하는 조칙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로써 신라는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패강 이남의 땅을 영토로 확정하게 되었다.
이렇듯 성덕왕 대는 정치와 외교 면에서는 아주 인정되었다. 그러나 천재지변이 잦아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였고, 그로인해 유랑민이 많았다.
재위 2년인 703년 7월에 영묘사에 불이 난 것을 시작으로 재난이 이어졌다. 같은 달에 서라벌에 홍수가 나서 많은 백성들이 익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705년에는 봄과 여름에 걸쳐 큰 가뭄이 계속되자, 성덕왕은 8월에 굶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려 민심을 달랬다. 또 9월에는 살생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고, 10월에는 흉년으로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자 국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했다.
706년에는 냉해가 닥쳐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아 또 한 번 흉년을 겪었고, 707년에는 흉년의 여파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성덕왕은 결국 국고를 모두 열어 한 사람에게 하루에 조 석 되씩 지급하였는데, 이 일은 무려 6개월 동안 이어졌다. 이때 백성들에게 나눠 준 곡식은 총 30만 5백 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708년에는 지진이 일어났고, 709년에는 다시 심한 가뭄이 들었다. 714년에도 심한 가뭄이 찿아왔고, 이로 인해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715년에도 큰가뭄이 들어 정월부터 6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성덕왕은 거사 이효를 불러 염천사 연못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 후로 열흘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리기도 했다.
이효라는 인물은 천문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716년에도 가믐이 들자 그를 불러 기우제를 지냈는데 곧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후로도 성덕왕 연간에 지진, 가뭄, 우박, 메뚜기 떼 등에 의한 천재가 여러 처례 계속되어 사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이 외에 성덕왕 대 기록 중에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재위 16년 2월에 의박사와 산박사를 한 명씩 둔 일이다. 의박사는 의사를 의미하고, 산박사는 수학자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박사의 칭호를 내린 것은 당시에는 수학자와 의사를 천시하지 않고 국가가 이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인재를 육성하였다는 뜻이다. 신라의 건축술이 대단히 뛰어난 것도 이와 같은 정책 덕분이었을 것이다.
성덕왕은 재위 36년째인 737년에 죽었다. 능은 이거사 남쪽에 마련되었으니, 현재 경주 조양동이다.
2. 성덕왕의 가족들
성덕왕의 부인은 두 명이다. 첯째 부인 성정왕후는 중경과 수충을 낳았고, 둘째 부인 소덕왕후는 아들인 승경(효성왕)과 헌영(경적왕), 딸 사소를 낳았다.
성정왕후
성정왕후는 소판 김원태의 딸이며 원래 배소부인으로 불리었고, 후에는 엄정왕후라 불리기도 했다. 그녀는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시집와서, 성덕왕 3년(704년) 5월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성덕왕 15년인 716년 3월에 출궁당하였다. 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출궁 당시 그녀에겐 비단 5백 필, 밭 2백 결, 벼 1만 석, 저택 한 구역을 내린 것으로 보아 성덕왕이 다른 왕후를 들이기 위해 내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소덕왕후가 죽은 뒤 다시 궁으로 들어온 듯하다. 경덕왕 7년(748년)에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는 기록이 그 점을 증명한다.
소덕왕후(?~724년)
소덕왕후는 이찬 김순원의 딸이며, 처음엔 점물부인으로 불리다가 720년에 왕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왕후로 책봉되기 전에 이미 성덕왕의 후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왕후가 된 지 4년 만에 그녀 소생 승경이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그녀는 이 해 12월에 죽는다.
중경(?~717년)
중경은 성덕왕의 장남이다. 그는 태자에 올랐으나, 717년 6월에 죽었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죽은 뒤 시호를 효상이라 하였다.
수충
성덕왕의 차남이다. 714년에 당에 숙위하였고,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717년에 형 중경태자가 죽자, 귀국하여 대감의 벼슬을 받았다. 이때 그는 당에서 가져온 문선왕, 10철, 72제자의 화상을 성덕왕에게 바쳤다. 이 그림들이 모두 태학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태자자리에는 앉지 못했다. 당시 그의 어머니 성정왕후가 출궁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소
사소는 성덕왕과 소덕왕후 사에에서 태어났으며, 개성대왕 효방에게 시집갔다. 그의 아들이 혜공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김양상(선덕왕)이다. 양상이 왕이 된 후에 그녀는 정의태후에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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