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허수아비춤> 조정래 작 : 3. 돈은 귀신도 부린다(1)

 

 

 

<허수아비춤> 조정래 작

 

3. 돈은 귀신도 부린다(1

 

 

 

 

 

"국정원이 대통령 직속이듯이 이것도 회장 직속이야. 자네들, 그 뜻 알겠지? 나 더 이상 지난번 같은 분하고 억울한 꼴 당하고는 못 사니까 우리도 딱 태봉그룹만큼만 조직을 짜서 팽팽 돌리라 그거야. 그렇게 하고 나면 나 자네들 평생 짱짱하게 보장하겠어. 암, 최고로 하고말고. 그러니까 자네들 셋이 한덩어리로 똘똘 뭉쳐야 한다 그거야. 그래야 일이 착착 잘돼나가고, 그래야 내가 안심하고 사업을 잘해 나갈 것 아닌가. 자네들 열심히 하는 만큼 자금 지원은 충분히 할 테니까 그건 전혀 걱정 말구."

 

회장은 세 사람을 휘둘러 보며 녹차로 목을 축이고는,

 

"그리고 새 부서 이름인데 말야, 거 흔해빠진 기획 뭣이니, 홍보 뭣이니 하지 말고, 거 뭐야, 남들이 뭔지 모르게 아리까리하게, 그러면서도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게 붙이자 그거야. 많이 배우고 실력 좋은 자네들 머리로 잘들 궁리해 봐. 질질 끌지 말고, 급하니까 이틀 내로."

 

회장은 윤실장과 박재우와 강기준 세 사람에게 또박또박 눈도장을 찍어 나갔다. 칠십에 가까운 눈이었지만 상대방을 제압하고 투시하는 어떤 본능적인 카리스마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 옛날 황제나 임금 앞에서 물러나는 신하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몸가짐을 하면서 회장실에서 물러 나왔다.

 

"자네한테 사장 직급을 주지. 그만하면 만족하겠지?"

 

박재우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회장이 내린 발령이었다는 것이다. 박재우는 그 벼락감투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봉그룹에 있었다면 언제 차례가 올 지모를 자리였고, 흠이 큰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영영 잡아볼 수 없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재우 못지 않게 행복이 넘치는 두 사람은 바로 윤실장과 강기준이었다. 윤 실장은 자동적으로 박재우의 윗자리가 되었으니, 회장 그 다음 자리란 부회장 뿐이었다. 그리고 강기준은 박재우의 바로 아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전무급의 벼락출세였던 것이다. 그런 파격적이다 못해 파괴적인 조처는 그들에 대한 회장의 신임이라기보다는 그 조직 구축에 대한 회장의 간절한 집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네들 알겠지. 아리까리하면서도 세련되고, 멋지고, 근사하게. 여러 개를 올려서 회장님께서 낙점하시게 해야 하니까 빨리빨리 뛰어."

 

회장의 말을 더 윤색해서 업무 지시를 내리고 있는 윤 실장의 얼굴에는 생기가 도는 웃음이 싱글싱글 피어나고 있었다. 벼락출세가 부리는 마술이었고 마력이었다.

 

강기준은 새로운 부서의 이름을 고심하다가 광고 회사를 하고 있는 후배를 만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그를 저녁 술집에서 만나 술을 한 잔하면서 대략적인 내용을 알려준 다음 적당히 술로 사기를 올려준 후에 헤어졌다. 다음날 후배가 몇 개의 제목을 선정하여 팩스로 보내왔다. 윤 실장을 포함한 세 사람은 각자 회장실에 몇 개씩 안을 만들어 결재를 올렸다. 

 

"이거, 이거, 문화라는 말 말이야.  어디다 갖다 뭍여도 고상한 티가 나고, 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까리하게 아주 잘 어울리더란 말씀이야. 그리고 이 개척이라는 말, 이것도 또 삼삼하단 말이거든. 기업이란 뭐야, 새로운 시장을 찿아 무서울 것 없이 치고 나가는 개척이거든. 창업 회장께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월남으로 용감무쌍하게 진출하셨던 것도, 저 불모의 땅 중동으로 치고 나가셨던 것도 다 투철한 개척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거든. 그 개척 정신은 우리 그룹의 기본 정신이기도 한 참 좋은 말이야. 그리고 이 센터라는 것. 이것도 아주 근사하단 말이야. 그러니 창의라는 말을 빼고 그 자리에 개척을 넣어서 문화개척센터라고 하면 어떻겠나?"

 

회장은 흥에 겨워 윤 실장과 박재우와 강기준을 휘들러보았다.

 

"예, 아주 좋습니다."

 

세 사람의 엇비슷한 대답들이 동시에 포개졌다. 회장께서 그렇게나 신바람 나게 설명의 말씀을 띄우셨는데 감히 어디라고 반대를 할 것인가. 또 회장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 명칭이 꽤나 그럴듯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강기준은 속으로 쾌제를 부르고 싶었다. 회장이 조립한 것은 자신이 제출한 다섯 개 중에서 두 개였던 것이다. 후배 광고 회사의 그 젊은 직원한테서 팩스를 받을 때만 해도 좀 색다르다고 생각은 했지만 회장이 그다지도 흡족해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햇던 것이다.

 

"문화개척센터, 문화개척센터, 부를 수록 졸고, 들을 수록 좋군 그래, 좋아, 이름도 정해졌으니 거침없이 추진하라구. 거침없이 개척하란 말이야, 알겠어!"

 

회장이 말끝에 불끈 힘을 주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들의 대답에도 불끈 힘이 들어갔다.

 

"좋아, 빨리 나가 일해."

 

세 사람은 복도를 말없이 걸어 나왔다. 그 어색스러운 침묵에서 그들만이 맡을 수 있는 진한 남자들의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강기준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말을 찿기가 어려웠고, 두 사람은 흔해빠진 빈말이나마 덕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강기준은 그들에게서 서운함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건 솔직하게 드러난 그들의 내심이었고, 만약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달콤한 어떤 말을 억지로 꾸며 냈을 것이다.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상사니까. 그러고 보면 기분 상하거나 내키지 않을 때 말을 안 할 수 있는 것도 상사의 특권이었다.

 

한 시간이 미처 못되어 그들은 회장 비서실에서 가져온 새 명함을 받았다. 다른 것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부서 명칭이 정해지자마자 자동 인쇄기를 돌려댄 모양이었다.

 

'문화개척센터 실행총무'

 

강기준은 새 명함에 선명하게 찍힌 새 직함을 응시하면서 가슴 뻐근하도록 숨을 들이켰다. 미처 예상힞 못한 채 새롭게 열린 인생의 길이었다. 미국 유학길에 오를 때처럼, 박사학위를 땄을 때처럼, 공채 1등으로 입사했을 때처럼 새 희망의 욕구가 솟구치고 있었다. 고지는 얼마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보다 더 거세고 굳세게 달릴 수 있는 힘이 전신에서 꿈틀꿈틀하는 것을 성욕 같은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윤 실장은 총본부장, 박재우는 기획처장, 강기준은 실행총무였다. 이렇게 새로 설치된 '문화개척센터'란 부서에 대해서 그룹 내에서는 쉬쉬하는 가운데 직원들 간에는 여러 말들이 얽히고설켜 소문이 한창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회장의 친위대다, 회장의 경호실이다, 회사 내의 국정원이다, 특혜라고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계열사 사장들 핫바지 저고리 만드는 짓이다, 저런 호랑이 새끼들 잘못 키워 결국 회장이 당할 것이다, 계열사 사장들이 일괄 사표를 낸다더라......

 

그러나 그런 소문들은 일시적으로 끓어오르기는 하지만 제물에 지쳐 머잖아 잦아들게 될 물거품일 뿐이었다. 그들은 회사에 목줄을 걸고 있는 한낱 월급쟁이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 삶이 소중한 만큼 눈치도 빨랐고, 그럴수록 그들은 낱낱이 분산되어 있는 모래알일 뿐이었다. 

 

  *                                              *                                         *                                      *                                      *

 

남회장은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서 그룹내 '문화개척센터'라는 새로운 기획부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비자금 만들기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윤 실장, 박재우,강기준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그 부서에 충원할 인재들을 영입하게 되는데,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영입하기 위한 공작이 시작될 예정이다. 대기업의 기획실, 그곳은 바로 이러한회장의 개인적인 비자금 조성과 로비, 인재 영입 등 그룹의 핵심적인 비밀사업을 진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생각으로 가득찬 그룹 핵심 간부들의 삶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기업의 부도덕한 행태를 이 소설을 통해 낱낱이 고발하고 노예처럼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회장의 수족이 되어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영혼이 없는 인간 군상들과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명암과 대기업의 허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