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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허수아비춤> 조정래 작 : 2.술수의 숨바꼭질(2)

 

 

 

<허수아비춤> 조정래 작

 

2. 술수의 숨바꼭질(2) 

 

 

 

 

며칠이 자나 강기준은 딴 세상에서 온 것 같은 전화를 받았다. 박재우였다.

"아니 선배님!"

"지금 시간 있어?"

그날의 기세처럼 거만이 실림 목소리가 먼 공간을 날아와 핸드폰에서 울리고 있었다.

"예, 있습니다."

"그럼 좀 만날까?"

"예 어디로 할까요? 그날 거기...."

박재우가 말을 토막쳤다.

"아니야, 그기 말고 스카이호텔 1100호로 와. 한 시간 후에, 정확하게."

'예, 예, 1100호!"

강기준이 꾸벅꾸벅 절을 하며 군대식 복창을 하는데 전화가 끊겼다.

 

강기준의 다리는 윤 실장에게 달려가려 하고 있었다. 몸이 생각보다 먼저 날뛰고 있었다. 그는 몸을 낚아채 붙들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먼저 알릴 일이 아니었다. 예감은 나쁘지 않지만 또 일이 빗나갈 수도 있었다. 조직에서 실수는 스스로에게 먹이는 독약이었다.

 

이런 저런 판단을 하고 생각을 하다가, 40분 후 강기준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스카이호텔로 날았다.

 

"그날 이후로 곰곰이 많이 생각해 봤지."

백재우는 담배를 깊게 피우면서 묵직하게 말했다.

"그날 도약의 계기로 삼으라는 자네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박재우는 말의 무게를 이겨 내려는 듯 푸~우 소리가 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

강기준은 자기 회장한테 하듯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이마가 탁자 위의 커피 잔에 부딪힐 듯 아슬아슬했다.

"자넨 나와 동문이라서 나서게 된 걸 거고..."

"예, 물론입니다."

강기준은 박재우의 심중을 잽싸게 읽어내며,

"제가 말 전하면 그때부터 당연히 윗선에서 모시게 될 겁니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

"조오~오~아!"

박재우는 담배를 비벼 끄며,

"자네는 이것 한 가지는 미리 전해. 그쪽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건 내가 가진 노하우 때문이 아니겠어? 그걸 단순히 직위만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지. 스톡옵션을 주듯이 뭐랄까..., 스카우트 보너스 같은 게 있어야 한다 그 말이야."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강기준은 겉으로는 흔쾌하게 동조를 표시하면서 그런 제의가 나오라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배포 큰 것이 남자답게 보이기도 했고, 욕심 많은 도둑눔 심보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 회사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가?"

박재우가 웃음기 번지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 제 생각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모든 걸 크게 생각하시는 윗선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리 있겠습니까. 우리 그룹은 일을 꼭 해야 하는 데다가, 우리 회장님 배포가 크신 것 잘 아시잖아요."라며 강기준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고, 왜 거짓말로 몰릴 허튼소리를 하게 되는지를 깨달았다.

"알았어, 자네 한테 할 얘기는 여기까지야. 다 알겠지만 보안지켜."

그는 커피 잔을 비우면서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비비면서 일어섰다.

"그럼요, 기본인걸요."

 

스커우트 보너스..., 그는 도대체 얼마를 원하는 걸까. 그가 일광그룹으로 온다는 것은 태봉그룹의 막강한 조직 전부가 옮겨진다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는분명 1~2억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중소기업 기술 하나 빼내 오는데 그 정도 돈으로는 흥정이 되지 않았다. 10억, 20억,? 아니 100억을 불러대는 것은 아닐까? 100억..., 숨 막히는 돈이었다. 연봉 1억짜리 월급쟁이가 한 푼도 쓰지 않고 100년을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그런 2~3백만 원 받는 보통 월급쟁이로서는 몇 년을 모아야 할 돈이란 말인가. 게산빠른 그의 머리로서도 언뜻 암산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회장과 박재우 사이에 그런 기상천외한 거래가 이루어지지 말란 법도 없었다. 

 

모든 기업들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하나, 이익 남는 돈벌이였다. 체면과 위신을 세우는 유식한 말로 하자면 이윤 추구. 회장은 몇백조를 헤아리는 재산을 지키고, 앞으로도 줄기차게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태봉그룹이 구축하고 있는 것과 같은 관리 조직을 갖추는 게 시급한 꿈이었다. 그 최적책임자가 백재우인데 그까짓 100억쯤 안 단질 리가 없었다. 아들, 손자 대의 재산까지 지켜야 하는 것에 비하면 100억 정도는 그야말로 하찮은 푼돈에 지나지 않는 금액일 수 있었다. 문화 진흥을 위한 연극 후원금 같은 것은 천만 원도 벌벌 떨면서 결재를 미루는데도, 대통령 선거철이 오면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남들에 앞서 몇십억 몇백억씩 뿌려 대는 배짱이었다. 그러니 이번의 100억 쯤은 망설임 없이 던질 수 있다고 판단한 박재우는 역시 교활한 만큼 노련한 여우였다. 그것 역시 태봉룹에서 익힌 노하우라고 할 수 있었다.

 

강기준은 한 수 배운 느낌으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배가 사르르 꼬이면서 아파 오고 있었다. 나 잘되는 것보다 남 잘못되는 걸 더 좋아하더라고.. 그는 박재우가 스카우트 보너스를 받는다는 것이 그것이 얼마가 되었던 간에 자신의 윗 자리로 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스카우트 보너스...?" 윤 실장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리고는 "또 다른 말은?" 언제나 쏘는 것같은 매운 눈길로 강기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더 말은 없었고, 그런 사항들이 구체적으로 논의 될 수 있는 윗분을 만나길 원했습니다." 

"알았어, 자넨 앞으로 연락이 와도 더 이상 만나지 말어."

"네에...?"

강기준은 윤 실장에게 어리둥절한 눈길을 보냈다.

" 왜, 내 말이 콩고 말처럼 들리나?"

윤 실장은 짜증섞인 얼굴로 강기준을 쳐다 보았다.

"아니, 예에, 알겠습니다."

강기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씹었고, 그만 나가라는 윤 실장의 손짓에서도 짜증이 묻어났다.

"흥, 벼룩 간 꺼내 회쳐 먹고, 모기 뒷다리로 족탕 끓여 먹는 소리하고 앉았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등뒤에서 윤 실장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저러지? 나보고 더 만나지 말라고 하고, 또 저런 소리까지 하고..., 강기준은 갑자기 머리가 뒤죽 박죽 엉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목마른 쪽이고, 배고픈 쪽에서 저렇게 나올 리가 없었다. 누구 딴 사람과 선이 닿았나... 박재우를 포기하고 윤 실장이 도맡기로 했나... 강기준의 추리력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강기준은 날마다 윤 실장 쪽으로 긴 안테나를 세우고 신경을 모았지만 감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윤 실장은 무표정으로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강기준은 윤 실장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중대한 상황을 아리송하게 이끌고 가는 그의 새로운 면모에 이상스런 한기마져 느껴졌다.

 

조마조마하던 며칠이 지나자 박재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더 이상 선배님을 만날 수가 없게 되서..."

"......"

침묵은 길고 무거웠다. 그건 전화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전화를 걸었고, 후배에게 무시당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 박재우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신음 소리이기도 했다.

"누군가..., 만나지 못하게 한 게. 윤 실장이겠지?"

"예, 아니, 그게 그것이 아니고..."

"......"

이번에는 침묵은 더 길었다.

"알았어, 전화 끊어."

칙칙한 구름 같은 한숨이 긴 메아리로 울려 왔다. 그 소리는 거친 풍랑에 휩쓸린 박재우라는 배의 침몰이었다.

 

박 선배의 일은 펑크가 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누가 손해지? 박 선배는 손해일 리가 없다. 윤 실장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거지? 강기준은 다시금 정글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조급함과 막막함에 빠졌다. 강기준은 일체 알지 못하는 사이 무서운 음모는 윤 실장에 의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서 강기준은 그야말로 기절초풍하게 놀랐다.

"정식으로 인사하게 오늘부터 우리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네." 실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윤 실장이 강기준에게 말했다. 그 옆에는 박재우가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

무슨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강기준은 아무 말로 못한 채 박재우가 팔을 흔드는 대로 손을 맡기고 있었다.

 

이렇세 해서 박재우는 강기준과 같이 일광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윤 실장. 박재우. 강기준이 새로운 조직을 짜는 일의 책임자로 회장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 받는다.

 

윤 실장과 박재우는 날마다 서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고 태봉그룹과 맞먹는 조직을 짠다는 소문이 소리 없는 소문으로 사원들 사이에 다 퍼져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 하필이면 태봉그룹에서 어떤 사람이 스카웃 되어 왔으니 그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스카우트비로 2백억을 요구했다며?"

"그러게 말이야. 배짱 한번 무지막지해."

"2백억이 아니라 2천억이면 뭘 해. 한 푼도 못받은 신센걸."

"그것 참 이상한 일이야. 어찌 하필이면 그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래?"

"그러니까 입조심 해야지. 괜히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고 했나."

"조심한다고 되나. 술 만땅구 취하면 안 나올 소리가 뭐 있고 , 못할 소리가 뭐 있어."

"근대 함께 술마신 친구란 눔이 누구야? 어쩌자고 술자리에서 지껄여댄 소리를 고스란히 녹음을 해다가 그 윗사람들한테 바쳤지."

"그렇지, 그눔 그거 인간 말종이야. 그눔이 박을 망치자고 계획적으로 그런 거겠지?"

"그야 뻔한 것 아닌가. 헌데 그 윗사람들도 문제야. 술 취해서 떠들어댄 소린데, 그걸 가지고 모가지를 치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거 무슨 소리야. 윗사람들 깔보고 욕하고 한 것이 어찌나 심한지 차마 들을 수가 없는데다, 회장네 가족들 험담까지 해댔다니 자살골 넣어도 여러 방 넣은 것 아닌가. 당해도 싸지."

 

그 무성한 입길들 앞에서 강기준는 그저 귀머거리고 벙어리였다. 그 소문들을 추리하거나 짜맞추기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 앞의 현실을 직시하고자 했다. 그것은 새로 짜인 조직에서 윤 실장, 박재우에 이어 자신의 위치가 세 번째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자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 자리는 바로 계열사 사장 자리로 도약할 수 있는 가장 탄력 좋은 뜀틀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목표가 눈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