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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 : 백제의 역사 46 (백제인의 발자취)

두바퀴인생 2010. 12. 14. 03:35

 

 

 

한국의 역사 100 : 백제의 역사 46 (백제인의 발자취)

 

 

무덤

백제의 고분은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과 흙으로 봉분을 만든 봉토분으로 나뉜다.

 

적석총은 돌무지무덤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만주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이다. 적석총은 원래 고구려인들이 창안했는데, 고구려의 영향을받은 백제에서도 조성되었다. 백제 고분군이 형성된 서울 석촌동의 낮은 대지위에는 수십 기의 적석총이 있었으나, 현재 그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3호분과 4호분 두 기밖에 없다.

 

3호분은 동서 55.5미터, 남북 43.7미터, 높이 4.5미터로 대형 고분이며, 4호분은 제1단 평면이 17미터, 높이 3미터의 중형 고분이다.

 

백제 중기로 오면 적석총이 없어지는 대신에석실분이 유행하고 적축분(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표적인 전축분은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이다.

 

봉토분은 무덤 내부에 돌로 방을 만든 석실분과 관을 돌로 짠 석관묘(돌널무덤),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바로 유해를 안치하는 토광묘(널무덤), 옹기로 관을 만든 옹관묘 등으로 구분된다.

 

석실분은 대개 규모가 크기 때문에 귀족이나 왕실의 무덤으로 조성되었다. 서울의 가락동과 방이동, 여주 상리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개 얕은 구릉의 경사면에 조성되었다.

 

토광묘는 삼국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서민들의 무덤이며, 돌이나 기와를 흙 표면에 깐 것이 특징이다.

 

옹관묘는 영산강 하류인 나주와 영암 일대에 군집을 이룬 채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일본의 고분들과  비슷한 관계로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백제의 고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마지막 도읍지 부여이다. 부여군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 총수는 약 600여 기이고, 대부분 석실분이다. 이들의 형식과 구조는 고구려의 고분 형태를 띠고 있는데, 거석을 상용한 것이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능산리 1호분을 예로 들자면, 이 곳의 벽화는 판석의 표면을 곱게 물갈이하여 그려졌는데, 벽면에 회를 칠하거나 직접 그린 고구려 벽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성곽

성곽은 축조에 사용한 재료에 따라 토성과 석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 나라 성곽은 대개 석성이다. 하지만 중국의 성은 토성이 주류인데, 그 영향을 받아 백제에서는 토서이 지어지기도 했다.백제의 대표적인 토성은 서울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이다. 하지만 이 두 성은 크게 훼손되어 그 규모와 정확한 형태를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성곽은 또 축조된 목적과 기능에 따라 구분될 수 있는데, 왕궁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도성, 지바의 행정.경제.군사의 중심지인 읍성, 유사시에 대비하여 방어용으로 쌓은 산성, 창고를 지키기 위해 만든 창성, 군사적 요충지에 쌓고 군인이 주둔했던 진보, 왕이 행차할 때 일시적으로 머물기 위한 행재성, 국경과 요새에 쌓은 행성(또는 장성) 등이 있다.

 

중국의 성은 대개 네모진 모양인 데 비하여 한국의 성은 모양이 다양하고 굴곡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중국 기록에 부여의 성은 "모두 둥그랗게 쌓아 마치 감옥과 같다."고 표현하였고, 고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은 "매우 험고하다."고 쓰여 있다. 이는 중국의 성들이 대개 평지에 지어진 것에 비하여 한국의 성은 산을 끼고 지어지는 까닭에, 요새의 기능을 함께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지역에 성을 조성한 것은 공격보다 방어적인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역시 왕이 머무는 도성이다. 한국 고대의 도성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왕성 주변의 산성이 보조하는 형태이다. 두 번째는 내성과 외성이 함께 지어지는 형태이다. 

 

첯 번째 형태는 보통 4세기 이전의 도성들로,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환도성 및 국내성, 백제의 위례성 및 한성, 신라의 월성 및 금성이 이에 속한다. 이들 도성은 왕성이 위급해지면 그 주변의 산성으로 피하여 적을 막는다. 백제의 한성 주변에는 한산성이 있고, 위례성 주변에는 북한산성이 있는 것이 그런 특징을 잘 말해준다.

 

4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두 번째 형태, 즉 왕성 주변에 직접 외성을 쌓은 경우로 백제의 웅진성과 사비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도성의 내외성 형태는 지방의 성곽 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각 지역의 중심지는 대부분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한국 땅은 산악 지역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특히 산성이 발달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의 태반이 산성이다. 성은 각 지역마다 적어도 서너 개는 있었고, 특히 접경 지역의 성곽은 늘 빼앗고 빼앗기는 처지였기 때문에, 이 곳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축조 방식이 함께 나타난다.

 

백제의 영토 안에 숱한 산성을 쌓았지만, 망한 뒤에 신라에 의해 다시 축조되거나 허물어져 대개 터만 남아 있거나 성곽의 일부분만 백제의 흔적을 찿을 수 있다.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도 처음엔 백제에 의해 축조되었으나,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백제인의 흔적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은 공주 공산성 정도이다. 현재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이 성은 대표적인 백제의 성곽으로 토축과 석축이 혼재되어 있는 토석혼축산성이다. 전체 둘레로는 약 2,200미터이고, 그 중에서 석축이 1,810미터, 토축이 약 390미터이다. 성벽은 이중으로 쌓여 있다.

 

금강변의 야산에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인 이 산성의 축성 연대는 대개 동성왕 대로 보고 있으며,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에도 성책의 시설이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성

백제의 궁성은 위례성, 한성, 웅성,사비성 등 총 네 곳에 조성됐다. 일설에는 무왕 대에 익산에도 궁성이 조성되었다고 하나 아직 증명되지는 않았다. 위례성의 위치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차산성 주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성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궁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모두 백제 한성 시대의 궁성이었다. 그러나 이 두 성의 구체적인 형태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학계 일부에서는 이 두 성 중에서 하나가 위례성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성에 비해 웅성과 사비성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며, 유적과 유물도 풍부한 편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삼국사기>의 '하남 위례성'이란 기록을 근거로 한강 남쪽에 위례성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위례성이 한강 동북쪽에 있었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고, 한성을 위례성이라고 기록한 사례가 없어 한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온조가 세운 한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그 강 건너 동북쪽땅인 아차산성 주변을 위례성으로 비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향후 많은 연구와 발굴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백제 한성의 궁성으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유력하다. 장수왕이 한성을 장악할 당시에 고구려군은 먼저 북성을 치고, 이어 남성을 쳤다고 했는데, 북성은 풍납토성을 가리키고, 남성은 몽촌토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학계 일각에서는 북성을 북한산성, 남성을 남한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문제가 있다. 당시 고구려군은 북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무너뜨렸고, 이내 남성으로 진격하여 개로왕과 왕실 혈족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만약 북성이 북한산성이라면, 한강이 가로놓인 남성을 이내 공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로왕이 전사한 이후에 그의 아우 문주가 천도하여 터를 잡은 곳이 웅진성이다. 지금은 공주 땅인 이 곳은 전략상 요충지였으며, 산과 강이 잘 어우러져 왕성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475년 백제 도읍이 된 웅성은 성왕이 538년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궁성이 위치하던 곳이다. 사비 천도 이후에도 요충지로 인식되어 방성이 설치되고, 방령이 머물렀다. 백제 몰락 당시 의자왕은 사비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태자와 혈족들을 대리고 웅성으로 몸을 피하기도 하였다.

 

무성, 만수리, 이인,양호,신풍,봉곡,중장리,용성리,평기리,율정,광정리 산성 등 많은 산성이 남아 있는 것되 곳이 한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성은 부여군 부여읍 일대에 형성되었다. 사비성은 궁성과 그 외곽을 둘러싼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궁성 북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른다. 웅성이나 한성과 마찬가지로 사비성 역시 강물이 곡선을 그리며 북쪽으로 끌어안는 듯이 돌아가는 평지에 조성되었다. 위레성 이후 백제의 도읍이 한결같이 북쪽으로 강을 끼고 있었던 것은 북방의 고구려나 말갈의 침입을 대비하려는 목적이엇을 것이다.

 

이렇듯 백제는 한반도 땅에 네 개의 도읍을 건설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웅진성이나 사비성조차 그 원형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절을 흔히 가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절의 어원이 상가람에서 온 말이다. 이는 남녀 출가자인 비구외 비구니, 남녀 신도인 우바이와 우바새 등 사중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역하면 승가람마라 하였는데, 줄여서 가람이라고 한다.

 

백제에 절이 세워진 것은 제15대 침류왕 원년(384년) 9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파한 이후였다. 백제 최초의 사찰은 385년 2월에 한산(남한산)에 건립되엇는데, 그 이후로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백제 땅 전역에 절이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고대 한국의 절은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도시 중심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시대 상황과 사회 여건에 따라 절은 산속에 지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절은 입지 조건에 따라 상이한 특징을 갖게 된는데, 그것은 대개 기능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절을 기능별로 보면, 대략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첯째는 평지가람형으로 왕실의 원당이나 국찰이 이에 속한다. 이는 교통의 편리함에 힘입어 불교 대중화에 큰 역활을 했다. 둘째는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산지가람형이다. 이는 주로 수행 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것이 특지이다. 셋째는 천연이나 인공의 석굴에 건립된 석굴가람형이다. 이것은 주로 기도도량으로서의 역활을 했다.

 

백제의 절들은 선종이 들어오기 전에 형성된 것으로 대개가 평지가람형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부여 정림사와 익산 미륵사가 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지만 이 두 절의 규모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 정림사는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사비성 안에 있었으며, 평지에 조성된 거대 사찰이었다. 총면적은 대략 3만 4천 제곱미터로 가람의 형태는 금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사방으로 화랑이 조상되어 있었다. 이런 형태를 장방형의 '남북일탑식 가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백제가람이다. 현재 절터에는 높이 5미터 62센티의 석불좌상과 높이 8미터 33센티미터의 오층석탑만 남아 있다.

 

익산 미륵사는 흔히 제30대 무왕 대에 창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규모가 대단하였고 총면적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절은 조선 중기까지 유지되다가 17세기에 페사되어 서쪽의 탑 하나와 당간 지주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기와류로, 총 6천 5백여 점이다. 여기엔 백제에서부터 고려 때까지 기와가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다. 백제 절의 형태와 구조는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으나, 전체적인 윤곽을 알아내는데엔 여전히 미흡한 상태이다.

 

타븐 원래 석가모니를 보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탑파'의 준말이다. 탑파는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스투파라고도 한다.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ㅇ를 소리로 표기한 것으로 탑파는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스투파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묘라는 의미이다.

 

백제 탑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미륵사지 석탑이다.

 

정림사지 석탑은 현재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소재 정림사지에 있으며,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8미터 33센티미터의 이 오층탑은 일반적인 석탑에서돠 같이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 상륜부를 형성했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기단을 놓앗는데, 기단은 단층기단으로 2단의 높은 굄대위에 면석이 놓여 있다. 면석의 높이는 낮고 각 면에 우주가 마련되어 잇다. 8매의 갑석은 매우 두꺼운데, 이러한 기단부의 형식은 목조 건축물과 비슷하다. 이는 이 탑이 목조탑의 형식을 석재로 준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높이가 14미터 24센티미터로 우리 나라 최고최대의 석탑이다. 현재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잇으며, 전면이 거의 훼손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만 6층까지 남아 잇다. 이 탑 역시 목조탑 형태를 띠고 잇으며, 제작 당시는 높이가 9층 정도, 약 20미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잇다.

 

이 두 탑으로 볼 때 백제의 석탑은 대개 목탑 형식을 띠는 장엄하고 격조 높은 기풍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

불상은 석가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불교 교리의 예배 대상을 시각적인 조형매체를 통해서 표현한 조각이다. 최초의 불상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한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불상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불상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다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등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각 나라마다 특징적인 불상을 조각해내게 된다.

 

백제의 불상은 균형미가 뛰어나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귀족 성향의 불상과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은 서민적인 불상으로 나눌 수가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후자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서산 마애삼불존불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