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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8 : 백제의 역사 44 (백제부흥운동)

두바퀴인생 2010. 12. 11. 04:10

 

 

 

한국의 역사 98 : 백제의 역사 44 (백제부흥운동)

 

 

들불처럼 번져간 백제부흥운동

 

의자왕이 소정방과 문무왕에게 무릎을 끓고 침 세례를 받으며 항복의 술잔을 올린 뒤에도 뜻있는 장수들은 백제의 몰락을 시인하지 않고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그 첯 번째 인물이 복신이었다.

 

복신은 왕족이며 무왕의 조카이다. 627년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 조정을 다독거리고 돌아올 정도로 외교 능력이 뛰어났으며, 군대를 지휘한 경험까지 있어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660년 당시 그는 이미 60세를 넘긴 노인이었으나 용맹이 높고 기개가 대단하여 스스로 군대를 일으키고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주류성에 거점을 형성한 복신은 승려 도침의 도움을 받으며 유민들을 끌어모아 세력을 확대하는데 성공한다.

 

그 무렵, 임존성(충남 예산)에서는 장군 흑치상지가 잔병과 유민을 끌어모아 역시 부흥의 깃발을 내걸었다.

 

660년 8월부터 본격적인 이들의 부흥운동은 백성들의 호응을 받으며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순식간에 수 만의 병력이 되었다. 흑치상지는 불과 10일 만에 3만을 모아 소정방의 당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북신의 군대도 급속도로 수를 불리면서 조직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소정방은 그런 가운데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 및 신료 93명과 1만 2천여 명의 주민을 낙양으로 압송했다.

 

소정방이 떠나자 부흥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면서 한층 거세져 급기야 9월 23일에는 사비성을 포위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당시 사비성에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복신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그 주변 백제 병력이 합세하여 30여 성이 부흥군에 가담했다. 복신은 신라군의 후면 공격을 막기 위해 사방에 성을 수축하여 방어막을 형성하였고 사비성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그로 인해 유인원이 고립되어 외부와 연락이 끓기는 위기 상황에 몰렸다.

 

복신은 그때 이미 왜에 사람을 파견하여 의자왕이 항복한 사실과 부흥운동 소식을 전하고, 구원군을 요청해둔 터였다. 또한 왜에 머물고 있던 부여 풍을 받들어 왕으로 추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왜왕 제명천왕은 복신이 보낸 좌평 귀지에게 부여 풍으로 하여금 원군을 이끌도록 하여 백제 부흥운동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 무렵, 신라 무열왕이 사비성 포위 소식을 접하고 태자 법민(문무왕)과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백제부흥군이 점령하고 있던 이례성(논산시 연무면)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 주변의 20여 성을 무너뜨렸다. 무열왕은 그 여세를 몰아 사비성을 포위하고 있던 부흥군의 후미를 치고들었다. 신라군의 급습을 받은 부흥군은 1천 5백 명의 전사자를 내고 왕흥사 쪽으로 퇴각하였다. 신라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낙화암 동쪽을 흐르는 계탄을 건너 가차없이 짓쳐들었고, 부흥군은 그 기세에 밀려 7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사비성으로 통하는 긿을 열어주어야 했다. 이 때가 660년 11월 5일로 차가운 겨울 바람이 거세게 몰아대고 있을 때였다.

 

만약, 이 때 신라군이 길을 뚫지 못했다면, 사비성 안의 당군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야 할 판국이었다. 그야말로 유인원의 군대는 몰살을 눈앞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라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어쨌던 부흥군의 기세를 누그러뜨린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유민들에게 여러 회유책을 구사하여, 포로로 잡혀있던 백제 왕족과 장수로 하여금 부흥군 진압에 앞장서도록 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부흥군의 사기가 저하된 것은 아니었다. 복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국에 사람을 보내고, 당군의 포로들까지 호송하면서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또한 당군을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다시 한 번 유인원이 주둔하고 있던 사비성을 공객해 들어갔다.

 

사비성 공략에 집요한 노력을 경주하던 부흥군은 661년 2월에 드디어 또 한 차례의 사비성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임명하여 백제 땅에 급파한 상태였다. 당 고종은 유인궤에 앞서 왕문도를 웅진도독에 임명하고 군대를 안겨 시비성을 구원하도록 했는데, 왕문도는 백제 땅에 도착하자마자 660년 9월 병을 얻어 갑자기 급사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의 후임으로 유인궤를 임명하여 보낸 것이다.

 

유인궤는 해로를 이용하여 곧장 금강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복신의 군대가 금강 하구에 2개의 목책을 설치하고 저지했다. 부흥군은 유인궤의 사비성 진입을 막기 위해 병력을 둘로 나누어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신라군이 유인궤와 가티 백제부흥군의 목책을 치고 들었다. 부흥군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나당연합군의 협공에 밀려 1만의 전사자를 내고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그러자 사비성을 포위하고 있던 복신은 군대를 퇴각하여 임존성에 몸을 의탁했고, 밀려들던 나당연합군도 부흥군과 전투에서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내자 진격을 멈추고 일단 뒤로 물러났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역병이 크게 돌아 병력 지원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 점을 간파한 부흥군은 두량윤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을 급습하여 크게 이겼고, 다시 주류성을 공격해오는 신라군과 싸워 패퇴시켰다. 이로써 부흥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사태를 지켜보던 숱한 성들이 부흥군에 가세하는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렇게 되자 당군은 사비성에 일부 군대를 남겨두고, 웅진성으로 웅진도독부를 옮겨갔다. 부흥군은 웅진성을 포위하여 거세게 공격하였고, 그 바람에 웅진성의 당군은 고립되어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복신은 그 소식을 왜에 전하면서 구원군을 파견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하였고 왜국은 이 문제로 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구원군을 보내봤자 패할 것이라는 여론이 드센 가운데 파병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661년 제명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백제를 지지하는 파가 우세하여 왜국은 구원군을 위한 군대 편성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반대파의 반발은 여전히 거세었다.

 

부흥군은 급조된 병력인 까닭에 한번 붕괴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복신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정예 부대의 지원이 절실하였고 , 왜국만이 정예 병력을 보내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왜국은 부흥군의 애만 태울 뿐 쉽사리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신라군도 이러한 부흥군의 의도를 알고 제2차 부흥군 토벌 작전을 전개한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661년 9월 25일 신라군은 부흥군의 전략 요충지인 옹산성(대전 근방)을 함락시키고 수천 명의 부흥군을 궤멸시키면서 기선을 제압하고, 곧 웅진성을 포위하고 있던 부흥군의 후미를 치고 들었다. 당황한 부흥군은 급히 포위망을 풀어 발을 뺐고, 덕분에 웅진성에 갇혀 있던 당군 지도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신라군의 공격은 우술성으로 이어졌다. 그 곳의  부흥군이 격렬하게 저항하며 방어전을 펼쳤으나 1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함락되고 말았다. 이 때부터 부흥군은 신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수성전으로 일관하며 방어전을 펼치게 되었다. 간간이 기습전을 펼쳐 신라군을 괴롭혔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치 한줄기 빛처럼 부여 풍이 왜군 1만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그야말로 부흥군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풍왕이 백제 땅에 발을 디딘 것은 662년 5월이었다. 631년 왜국에 볼모로 갔던 풍왕은 무려 31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이었다.

 

복신이 풍을 맞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왜군 정예 1만이 가세하자, 부흥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이에 부흥군는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웅진성으로 진격하여 금강 동쪽에 포진했다. 웅진도독부와 신라군의 연결 통로를 끓어 당군을 고립시키겠다는 계산이었고, 그것은 주효했다.

 

그러나 기껏 당군을 궁지에 몰아넣은 부흥군은 불행히도 그만 내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대립하다가, 복신이 승려 도침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후 복신은 전권을 장악하고 당군 장수 유인원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그 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해 주겠다."

 

이 말에 발끈한 유인원은 웅진 동쪽으로 군대를 몰아 복신과 한판 결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복신은 크게 패하였고 부흥군의 요새인 지라성과 윤성 등을 빼앗기고 많은 전사자까지 내며 진현성으로 물러났다. 복신의 치밀하지 못한 만용이 불러온 참패였다. 거기에다 추격하던 당군의 기습으로 또다시 8백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진현성에서도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당군과 신라군 사이에 수송로가 소통되었고, 유인원은 본국에 사람을 보내 증원병을 요청했다. 그러자 당에서는 좌위위 장군 손인사에게 병력 7천을 내주어 바다를 건너게 하는 한편,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함께 파견하였다. 당 조정이 부여 융을 파견한 것은 백제 유민들의 당에 대한 반감을 줄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한편, 부흥군의 풍왕은 부흥군의 약세가 복신의 권력 전횡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복신과 풍왕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자, 복신은 풍왕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병을 핑계로 굴실에 누워 있었다. 풍왕이 문병을 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복신은 오히려 제 꾀에 넘어가고 말았는데, 복신의 계획을 눈치챈 풍왕이 문병을 핑계로 심복들을 이끌고 찿아와 복신을 결박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풍왕은 함부로 복신을 죽이지 않고 그를 끓어앉힌 상태에서 모반죄를 성토한 후, 신하들에게 처리 방법을 물었다.

 

비록 복신을 옹호하는 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묶인 처지가 된 그를 위해 옹호하거나 선뜻 목숨을 내놓을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복신과 함께 부흥운동을 해왔던 달솔 덕집 등이 앞장서서 복신을 처형해야 한다면서 풍왕의 속내를 대변했다. 이에 복신은 덕집에게 칩을 뱉으며 '썩은 개 같은 눔!'이라고 소리치며 그의 비겁함을 꾸짖었다. 그러나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목을 가르자, 그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풍왕은 그의 머리통으로 젓을 담갓다고 한다.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영웅치고는 말로가 너무나 비참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부흥운동은 서서히 마지막을 향하여 내리막 길을 가고 있었다.

 

부흥군은 그렇게 내분을 수습했지만, 복신과 도침이라는 두 영웅이 졸지에 황천으로 떠나자, 병졸들의 사기는 땅에 곤두박질쳤다. 거기에다 당의 손인사의 7천 군사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풍왕은 급히 왜와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손인사의 군대는 육지에 상륙하여 유인원의 군대와 합세했다.

 

군세가 강화된 당군은 곧 부흥군 토벌 작전에 돌입하였고,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이 가세했다.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의 중심 거점인 주류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손인사, 유인원, 문무왕 등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 별수두상, 부여 융은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는 방법으로 주류성을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웅진을 출발하여 백강으로 향하자, 복신의 요청으로 급히 백제로 달려온 왜군 선단 수백 척이 백강 어귀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막아섰다. 그래서 일대 격전을 벌인 양 군은 네 차례나 부딪쳤는데, 부흥군을 태운 왜선 4백 척이 불타고 대부분의 병력이 수장되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백강 전투에서 대패한 부흥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풍왕은 탈출하여 고구려로 달아났다. 그러자 풍왕 휘하에 있던 부여 충승과 충지 등이 풍왕의 잔병을 이끌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였고, 나머지 부흥군은 임존성에 남아 외롭게 버티는 형국이 되었다.

 

임존성에는 흑치상지,상여,지수신 등의 장수들이 웅거하고 있었는데, 유인궤는 은밀히 임존성에 사람을 보내 흑치상지와 상여를 설득하여 항복을 종용했다. 유인궤는 부여 융에게 웅진도독부를 맡길 것이며, 흑치상지와 상여가 부여 융을 도와 웅진도독부를 이끌어 달라는 말로 회유했던 것이다. 흑치상지와 상여는 유인궤의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반란을 일으켜 임존성을 장악해버렸고,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후 흑치상지는 부흥군을 이끌고 나와 당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3년 동안 지속되었던 백제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렇듯 비록 실패로 끝낫지만,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진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인들의 무서운 저력을 보여준 사건으로 678년 동안 타오르다 한 줌의 재로 사그라진 백제 왕조에 대한 진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